신학의 역사 둘째 시간 강의안
신학의 역사 강의 둘째 강의 시간(pp 151-197)
제 2장 중세와 르네상스(약 500-1500),
중세의 탄생,
로마의 멸망은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셨다. 로마 제국의 북쪽 전선은 야만인들의 공격에 직면하자 404년 무너지고 말았다. 로마 제국의 광대한 지역은 이제 프랑크족, 고트족, 그리고 반달족의 지배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 자체는 두 번 공격을 받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410년 고트왕 알라리크의 군대에 의해 무너진 경우였다. 476년까지 로마의 서쪽 지역은 폐허로 변했다. 그 지역의 정치적 안정은 침해받게 되었고, 그 결과 기독교는 불안정한 시대를 맞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안이 더 심화 된 것은 7세기에 있었던 아랍의 침략 때문이었다. 결국 아랍 군대로 하여금 750경까지 북아프리카의 전 해안 지역을 지배했다. 성지 점령 지역에서 이슬람이 취한 강압적 태도는 서방 교회로 하여금 큰 우려를 하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1095-1204년 동안에 십자군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태가 더 복잡해진 이유는 기독교 세계 자체 안에 있었다. 그것은 9-10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지중해 헬라어 권역 기독교인들과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쪽의 라틴어권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점증하는 긴장 때문이었다. 니케아 신조의 문구에 대하여 가지게 된 불일치의 증가는 이렇게 점차 고약해지는 분위기에 비추어볼 때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요인들도 가세했다. 즉 라틴어 권역 로마와 헬라어 권역 콘스탄티노플 사이에서 존재했던 정치적 경쟁심과 로마 교황의 권위를 더욱 주장하게 된 배경이 그것이다. 서쪽의 가톨릭과 동쪽의 정교회 사이에서 발생했던 최종적인 결렬 상태는 보통 10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용어의정의
중세 시대는 사상사에서 ‘스콜라주의’ 와 ‘인문주의 라는 중요한 지성적 운동을 일으킨 시기이다.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는 1300년부터 1500년까지 신학계를 포함하여 지성 계를 지배했다.
중세 (The Middle Ages)
“중세”라는 용어는 르네상스의 저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16세기 말이 되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른 것 같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고전적 고대의 영화와 그들 자신의 시대 사이에 끼어 있는 시대를 평가 절하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들은 중세라는 용어를 만들어 두개의 중요하고 창조적인 시대를 나누고 있는 흥미 없고 정체된 기간을 지칭하고자했다.
르네상스 (The Renaissance)
프랑스 말인 르네I상스는 이제 14세기와 15세기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부흥을 지칭하는 말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546년에 파올로 지오비오는 14세기를 가리켜 “라틴 문자가 ‘다시 탄생한(renatae)’ 것으로 간주되는 행복한 세기”라고 말했다. 가장 뚜렷하게는 야콥 부르크하르트 같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는 근대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인간이 처음으로 자신을 ‘개인’ 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시대라고 선언 했다.
스콜라주의 (Scholasticism )
스콜라주의는 아마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비하된 지성적 운동의 하나일 것이다. “바보(dunce)"라는 영어 단어는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라는 가장 위대한 스콜라 학자의 이름에서 파생된 것이다. 인문주의 비평가들에게 스콜라주의가 논리적으로 사소한 것을 시시콜콜 문제 삼는 것으로 비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콜라주의는 기독교 신학에 많은 핵심 영역 특히 이성의 역할과 학에 있어서의 논리와 관련된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실재론과 유명론(Realism and nominalism)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의 구별은 중세 신학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스콜라 시대 전기(약 1200-1350)는 실재론에 의해 주도된 반면에, 후기(약 1350-1500)는 유명론에 의해 주도되었다. 두 체계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다. 두 개의 흰 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실재론은 이 두 돌이 형상화하고 있는 보편적인 “백(whiteness)" 의 개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특별한 돌들은 “백”의 특정을 보편적인 “백”의 특징을 소유하고 있다. 흰 돌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반면에, “백”의 보편성은 다른 형이상학적 영역에 존재한다. 그러나 유명론은 “백”의 보편적 개념은 불필요하며 대신에 특수한 것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두개의 흰 돌은 존재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백’ 의 개념”에 관해 말하기 시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실재론은 ‘’인류“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 자체적인 실재 존재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보편적이다. 특별한 사람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이 보편성에 대한 개인적인 예들이다. 이들 세 사람의 개인들을 통합하는 인류의 공동 특정은 자체적인 실재 존재를 가진다. 그러나 후기 스콜라주의는 실재론 보다는 유명론에 치우친 두 개의 다른 학파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근대적 방식 (via moderna)" 과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schola Augustiniana modema)"라고 알려지고 있다.
근대적 방식 (The modern way)
“근대적 방식 (via modema)"의 추종지들 중에는 오캄의 윌리엄, 피에르 달리, 로버트 홀코트, 그리고 가브리옐 비엘과 같은 14-15세기의 사상가들이 있다. 15세기 동안에, “근대적 방식‘’은 많은 북유럽의 대학들, 예를 들어 파리, 하이델베르크 그리고 에어푸르트에 있었던 대학들에 깊이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철학적인 유명론 이외에 이 운동은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펠라기우스주의” 라 명명된 칭의의 교리를 채택했다. 루터의 신학이 형성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 (The modem Augustian school)
14세기 초에 있었던 “근대적 방식”의 거점 중의 하냐는 옥스퍼드 대학이었다. 이 운동에 대한 첫 번째 주된 부정적 반응이 일어난 곳도 바로 이곳 이었다. 이 같은 급격한 반동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은 토마스 브래드워딘이었는데, 그는 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브래드워딘은 “펠라기우스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라는 책을 통해 옥스퍼드의 “근대적 방식”의 개념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로 돌아가는 칭 의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레고리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구원론 혹은 구원에 관한 교리를 발전시켰다. 우리는 은총의 필요성, 인간성의 타락과 죄상, 청의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선제권(initiative),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론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되고 있다. “근대적 방식” 의 옹호자들이 인간이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들의 의롭게 됨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그레고리우스는 오직 하나님만이 칭 의를 주도하실 수 있다고 고집한다.
“근대적 방식”은 필요한 구원론 적 방편의 대부분( ‘모두’ 가 아니다)은 인간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인간성 밖 존재하는 방편의 예라고 본다. 죄를 그만두고 의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은 비엘과 같은 저술가에 의하면 인간성 안에 위치한 중요한 구원론 적 방편의 예이다. 이와 뚜렷한 대조를 통하여 라미니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런 방편들이 전적으로 인간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죄를 그만두고 의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 역시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방법론은 칭 의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의 역할을 전적으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 한 사상의 학파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후기 중세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비텐베르크 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반 펠라기우스 문헌을 특별히 강조했기 때문에 이러한 전통을 재발견하고 부활시킨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주요 신학자들
캔터베리의 안젤무스 (Anselm of Canterbury 약 1033 -1109)
안젤무스는 두 가지 논의영역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나님의 존재 증명,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그것이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ldes quaerens intellectum)" 이라는 안젤무스의 말은 널리 사용되었다. 이성에의 호소, 논증을 논리적으로 줄곧 이끌어나가는 것, 개념들의 내포된 의미를 철저하게 파헤치는 것, 그리고 그 논쟁의 핵심에서 기독교 복음은 합리적이며’ 그리고 합리적인 것 을 ‘보여줄 수’ 있다는 근본적인 확신이 그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Ihomas Aquinas 약 1225-74)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내가 쓴 모든 것은 나에게 지푸라기와 같이 보인 다“ 고 말했다.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s 약 1265-1308)
스코투스는 의심의 여지없이 중세의 가장 훌륭한 지성의 한 사람이다.
I, 스코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된 지식론의 대가였다.
2. 스코투스는 종종 ‘주의설(主意說 voluntarism)’ 이라고 언급된 교리인 신적 의지가 신적 지성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아퀴나스는 신적 지성이 우위에 선다고 주장했다. 스코투스는 신적 의지의 우선 설에 대한 가정을 기초로 하여 신학에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했다, 공로의 개념,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보상을 받기 위에 적합한 것으로 인정되는 인간의 도덕적 행동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결정의 기초는 무엇인가? '아키나스는 신적 지성이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가지는 내재적 가치를 인정한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에 의지에 그것을 알려 그에 따른 보상을 한다는 것이다. 스코투스는 매우 다른 노선을 따라 주장을 전개했다. 도덕적 행동을 보상하려는 신적 의지는 그 내재적 가치에 대한 어떤 평가보다 먼저 나타난다.
3 스코투스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무죄 수태설의 대가였다. 아퀴나스는 마리아가 인간의 공통적인 죄의 조건을 공유했다고 가르쳤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와는 달리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죄로 물들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그리스도가 그의 완전한 구속 사역의 덕택으로 마리아를 원죄로 물드는 것에서 보호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스코투스의 영향으로 인해 중세 말기에 이르면 “무죄 주장” (죄에서 자유하다는 라틴어‘immacula')이 지배적인 개념이 되었다.
오캄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 약 1285-1347)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주목받는 것은 그의 철학적인 입장이다.
청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렇게 하여 초기 종교개혁과 관련된 칭 의에 대한 보다 개인주의적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Erasmus of Rotterdam 약 1469-1536)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문 저술가로 간주되며. 16세기 전반부 기독교 신학에 심원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인정받는다. 비록 그가 어떤 의미에서도 개신교도는 아니었지만,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지성적 기초를 놓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기독교인 군사의 교본“ 그의 책은 종교 출판물의 역사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 책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이후 6년 동안에 23번이나 개정판을 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에라스무스가 교회가 소유한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고 간주한 교육받은 평신도와 여자들에게 호감을 샀다. 1515년 이후에 여러 해 동안 놀라운 인기를 누리게 됨으로써 평신도의 자아 인식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취리히와 비텐베르크에서의 개혁의 천둥소리가 이 『교본』이 베스트셀러가 된 직후 시작되었다는 것은 결코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본』은 당시의 교회가 교부들의 문헌과 성경으로 집단적으로 돌아옴으로써 개혁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논지를 개발했다.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는 것은 새로운 평신도의 경건의 열쇠로서 제시되었으며, 그것에 기초하여 교회는 갱신되고 개혁될 것으로 보았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하도록 요청받는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받도록 요청되는 모범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기독교 신앙을 단지 도덕법을 외형적으로 준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내적 종교에 대하여 특징적으로 인문주의적인 강조를 보여줌으로써, 성서 읽기가 독자를 ‘변화시키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도록 새로운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의 많은 특정은 특별히 중요하다. 첫째로, 에라스무스는 기독교의 미래적 활력이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와 더불어 존재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성직자들은 평신도가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성경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가진 교육가로 간주된다. 성직자에게 평신도의 책임보다 우월한 영구적인 신분을 제공하는 어떤 미신적인 공간도 없다. 둘째로, 죄를 직접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는데, 단지 그가 신부라는 이유 때문에 왜 귀찮게 다른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느냐 라고 에라스무스는 반문한다. 두 가지가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특별히 중요하다고 본다:
1. 최초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만든 일. 앞서 지적한 대로, 이로 인하여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의 원전에 직접 다가갈 수 있게 되었고 폭발력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들을 포함해 교부들의 문헌을 믿을 수 있는 판본으로 만든 일. 신학자들은 이로써 종종문맥에서 벗어난 이차적인 인용 의존하는 대신에 그러한 주요 문헌들의 전체 본문을 직접 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신학 발전을 위한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게 되었다.
주요 신학적 발전들
교부 적 유산의 강화
암혹시대의 기운이 걷히게 되었을 때, 기독교 신학자들은 위대한 교부 저술가들이 그만두었든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서방 교회가 라틴어를 시용했기 때문에, 서방 교회의 신학자들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쓰여진 중요한 수집 문헌으로 돌아와야만 했고 여기에서 그들 자신의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을 삼았다.
신학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의 탐구
기독교 신학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토대 위에 세우려는 새로운 관심으로 말미암아, 신학에서 이성의 역할에 대해 사려 깊은 탐구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는 스콜라주의의 핵심적이고 명료한 특징이었다.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 하고 ‘확대’ 해야 할 중요성과 그 신학의 ‘내재적 합리성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이었다.
11세기 저술가인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과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egam)." 그의 기본적인 통찰력은 신앙이 이해 보다 우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내용은 합리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명한 형식은 신앙의 전적인 합리성을 주장한 것과 똑같이, 신앙이 이성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확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젤무스는 이성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이성은 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1세기와 12세기 초기에는 철학이 두 가지 다른 차원에서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철학은 신앙의 합리성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었고, 그래서 신앙을 비기독교적 비평가들에 대해 옹호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철학은 신앙의 요목들을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정리하는 방법들을 제공했고, 그 결과 신앙의 요목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철학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2세기 후기와 13세기 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재발견함으로써 찾게 되었다. 1270년경이 되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일한 철학자로서의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다. 당대의 신학적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와 같은 저술가들의 영향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은 기독교 신학을 강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서 확립되었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전제에 기초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상호 연관을 맺게 되었다. 아퀴나스는의 ”이방인들에 대한 총론“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초한 신학 작업의 훌륭한 예이다. 많은 점에서 논쟁은 다음과 같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당신이 이글에 제시한 아리스토테리스적 개념에 동의한다면 그 다음에는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당시 많은 모슬렘 학자들에 의해 높은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퀴나스는 이 철학자의 변증적 잠재력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많은 핵심적인 기독교적 통찰력은, 한 이교도 철학자의 개념과 방법론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됨으로써 상실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특히 칭의 교리가 초점이 되었다. “하나님의 의 (righteousness of God)" 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 (distributive justice)"의 개념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의(iustitia)는 어떤 사람에게 이미 할당된 것을 주는" 개념으로 정의되었다. 이것은 공로에 의한 칭의 교리로 이끄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말하면 칭의가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마땅한 자격에 기초해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마르틴 루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점점 더 싫어하게 된 배경을 어려움 없이 알 수 있으며, 루터는 결국 스콜라적 칭의 교리와 결별하게 된다.
신학체계의 발전
성례전 신학의 발전
은총의 신학의 발전
아우구스티누스적 유산의 핵심적인 요소는 은총의 신학이었다. 중세의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의 교리를 강화할 임무를 가진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그것을 보다 믿을 수 있는 토대 위에 세우고 그 결과를 탐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은총과 칭 의의 교리는 그 시기에 상당히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핵심적인 쟁점들에 관한 종교개혁의 논쟁에 기초를 놓게 되었다.
구원의 구도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
은총과 칭 의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역할에 새롭게 주목하게 만들었다. 이들 중 많 것들은 둔스 스코투스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는 마리아론(다시 말해 마리아를 다루는 신학의 영역)을 지금까지보다 상당히 더 발전된 토대 위에 놓았다. “유죄론자”(maculists ; 마리아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원죄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와 “무죄론자” (immaculists; 마리아가 원죄의 오염에서 보호 되었다고 주장한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또한 마리아를 “공동 구속주”(coredemptrix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구속의 인물로서 간주될 수 있는 나의 문제)로 볼 수 있느냐의 여부에 관해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기독교 신학의 자료로 직정 회귀하는 문제
인문주의적 주제의 핵심적인 요소는 고대 로마와 아덴이라는 서방 유럽문화의 원래의 자료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소에 대한 신학적인 대응은 기독교 신학의 토대가 되는 자원,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으로 직접 돌아가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신학적 원천으로서 성경의 기반적인(foundational)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한 것이었다. 성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이 원천에 대한 라틴어 번역들은 점점 더 부적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중세에 광범한 영향력을 가졌던 성경에 대한 라틴어 번역 중의 하나인 “불가타(Vulgate)" 였다. 특히 불가타 번역본에 대하 수정이 진행됨에 따라, 신학적인 수정도 불가피하다 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인문주의적인 본문 비평 기술과 언어학적 기술의 도입은 불가타와 번역하려는 원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들을 부각시키게 되었고, 결과 교리적 개혁의 길을 열게 되었다. 인문주의가 중세 신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문주의는 불가타 성경의 번역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확실히 보여주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기초한 신학이 마찬가지로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스콜라주의의 성경적 기초는 인문주의가 그 번역의 오류를 계속 밝혀냄에 따라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성경의 불가타판에 대한 비판
인문주의의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프로그램은 “원 자료로 돌아가라(ad fontes)"는 구호로 요약될 수 있다. 그 ‘ad fontes’ 라는 구호는 기독교의 권리증서(title-deeds )인 교부들의 글과 무엇보다도 원어로 연구된 성경으로 직접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헬라어 본문을 직접 다룰 것을 요구했다. 최초로 인쇄된 헬라어 신약성경은 에라스무스에 의해 1516년에 출판 되었다.
1, 대부분의 중세 신학은 결혼을 성례의 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을 정당 파하고 있는데, 이는 결혼을 ‘성례’(sacramentum; 에베소서 5:31-2)로 말하고 있는-적어도 불가타 번역에서-신약성경 본문에 기초한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여기서 “성례”로 번역된 헬라어 “뷔스테리온(musterion)"은 단지 ”신비(mysteπ)"를 의미할 뿐이라고 밝혀냈다. 결혼을 “성례”로 언급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중세 신학자들에 의해서 결혼을 성례목록 포함시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 고전적인 증거 본문의 하나는 이처럼 사실상 소용없는 것이 되었다.
2. 불가타는 예수의 공생애의 첫 마디(마태 4:17)를 “참회하라(dopenance) 하늘나라가 가까웠다”로 번역했다. 이 번역은 하늘나라의 임함이 참회의 성례(=고해성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암시했다. 에라스무스는 그 헬라어는 ‘회개하라(repent)’ 하늘나라가 가까웠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말로 하면, 불가타가 실천(고해성사)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 곳에서, 에라스무스는 내적인 심리적 태도, 즉 “뉘우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중요한 중세 교회의 성례를 정당화하는 제도가 다시 한번 도전받게 되었다.
3. 불가타에 의하면,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은총이 충만한 자”(누가 1 :28)라고 인사를 올림으로써, 곤란한중에 의지할 수 있는 은총을 충만하게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에라스무스가 지적 한 대로, 헬라어는 단지 “은혜를 입은 자” 혹은 “마음에 든 자”를 의미했다. 다시 한번 중세 신학의 중요한 특징이 인문주의 신약성경 해석과 모순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번역의 발전은 불가타 번역의 신빙성을 침해했으며, 성경 본문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바탕으로 신학적인 수정을 위한 길을 열어놓았다.
비잔틴신학
비잔틴은 콘스탄티누스가 330년에 새로운 수도로 정한 도시이다. 그러나 도시의 이름은 그대로 존속되었고, 이슬람 군대의 침략에 의해 1453년 콘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까지 그 지역에서 꽃피웠던 신학의 독특한 양상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정치권력이 점점 더 황제의 도시에 집중되게 되자, 신학 중심지로서의 위치도 그에 상응하도록 상승하여 콘스탄티누스(527-565) 시기에, 비잔틴 신학은 일정한 중요성을 지닌 지성적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점점 더 분리되자(그러한 분리 과정은 1054년 최종적인 분열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시작 되었다), 비잔틴 사상가들은 종종 서방 신학과 다른 입장을 강조했고(예를 들면 필리오케 논쟁: 115-119쪽) 논쟁적인 글들을 통하여 그들의 독특한 법론을 강화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비잔틴 저술가들은 구원을 서방의 법적 혹은 합리적 범주보다는 오히려 ‘신성화(deification)’ 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게다가 그들은 서방 가톨릭 계열에서 세력을 얻어가고 있던 연옥의 교리를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중세에 서방과 동방 사이에 결합을 이루어보려는 어떤 시도도 정치적 역사적 그리고 신학적 요인들에 의해 복잡한 양상으로 꼬여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쯤에는 동과 서방의 차이가 이전보다 더욱 벌어져 있었다. 비잔티움의 몰락과 함께 정교회 내의 지적이고 정치적인 지도력은 러시아로 옮겨가는 양상이 나타났다. 러시아인들은 10세기에 비잔틴의 선교를 통해서 이미 개종했고, 1054년 분열 시에는 헬라 편에 섰다. 15세기 말이 되었을 때, 모스크바와 키에프는 각각 독특한 양식의 정교회 신학을 가진 총대주교의 관구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비잔틴 신학자들은 기독 신앙의 체계적인 구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주어진” 무엇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반대자들에게는 옹호되며, 추종자들에게는 설명되어질 필요성이 있었다. “조직 신학”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인 비잔틴 기풍에는 다소 어색한 것이었다. ”정통 신앙에 관하여“ 로 동방의 독특한 기독교 신학을 강화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다마스커스의 요한(약 675구49)까지도, 통찰력이 있거나 창조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의 해설자로 보아야 한다. 진실로 비잔틴 신학은 아타나시우즈가 그의 글 ”성육신에 관하여“에서 애초에 제시한 원리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 원리는 신학이란 성인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라는데 동의 하는 것이다. 비잔틴 신학(현대의 그리스와 러시아의 정통주의를 포함함)은 이처럼 “전통(parodosis)"의 개념, 특별히 헬라 교부들의 문헌이란 개념에 강하게 경도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은 곧 선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860년 모라비아의 통치자였던 라스티슬라프는 비잔틴 황제에게 중부 유럽의 백성을 위해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두 명의 그리스 형제들인 시릴과 메토디우스가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여 파송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유럽의 문화의 형성에 특별히 중요했다. 그것이 결국 동부 유럽 지역 정교회의 지배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지역에서 상용된 알파벳에 주요한 영향력을 마쳤다, 시릴은 슬라브어를 쓰는 데 적합한 알파벳을 창안했다. 모라비아의 개종에 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그 세기의 나중에 개종했다. 이것은 988년 어간 러시아의 개종으로 이어졌다.
동 서방 교회가 점차 소원해지면서 (1054년 최후의 분열은 오랜 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불화의 산물이었다) 동방사상가들은 빈번하게 서방신학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중세 시대에 동 서방 교회의 재통합을 이루려는 시도는 정치, 역사, 신학이라는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이렇듯 복잡하게 얽혔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되었을 때 동서방교회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벌어져 있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비잔틴 제국의 몰락은 정교회의 지적 정치적 주도권은 러시아로 넘어가게 되었다. 10세기 비잔틴 선교로 개종한 러시아인들은 1054년 분열에서 그리스 편에 섰었다. 15세기말에 모스크바와 키예프는 총대주교 관구로 공고해졌는데 이 도시들은 모두 정교회의 독특한 면모를 간직하면서 오늘까지도 그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 밖에 이 시기 정교회로 개종한 지역으로 세르비아와 들 수 있다. 결국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 정교회가 스스로 통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 교회와 국가의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연계는 더욱 심화되었다. 1523년이 되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매우 가까워져서 어떤 저술가들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언급하기 시작했고, 모스크바를 로마와 콘스탄티노플과 똑같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줄 것을 기대했다. 프슈코프의 펄로태우스는 로마 비잔티움이 타락했기 때문에 기독교계의 지도력은 모스크바로 넘어갔다고 선언하면서, “두 로마는 몰락했으나 세 번째 로마는 굳건히 서있다. 그리고 네 번째 로마는 결코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1. 정교수 불로그 주소 강의안 다운 받으세요. http://blog.daum.net/jnhok
2. 두 번째 독서 보고서
1) 사례연구 1.8 신앙과 철학(pp139~149)
2) 사례연구 2.1 하나님의 존재 증명(pp 203~212)
3) 사례연구 2.2 속죄에 대한 이해(pp 212~222)
4) 사례연구 2.3 성례에 대한 논의(pp 22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