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것"수정본"
1. 본문: 요일 2:3-6
2. 명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확증될 수 있다.
3. 제목: 하나님을 아는 것
1. 갈등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전한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통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비록 죄를 짓게 된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를 절망스러운 상황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아버지 앞에서 대언해 주시는 속죄의 사역을 통해 죄 문제를 다루어 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존 전에 설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에 대한 확신을 가집니다. 사도는 이 문제를 접근하면서 자신의 매우 독특하고 개성 있는 단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란 “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에서 사용된 ‘알 것이요’ 라는 단어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구절을 통해 복음을 단순히 알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떻게 접목시키느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를 ‘알아야’한다고 말합니다. 즉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확신에 대한 위대한 교리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자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요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확신의 교리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이유로 이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반대하는가?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가정이나 억측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 내가 감히 누군데 하나님을 안다고 가정해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지극히 온전하고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과 나는 죄로 가득 차 전혀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내가 감히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무슨 권리로 내가 믿는 그분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나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자신 있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라며 우롱하는 듯한 겸손한 모양을 취해 말하곤 합니다. 분명한 답은 어떤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신약 성경은 확신에 관한 교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거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매우 우울하게 어둡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24:6에서 난리와 난리를 들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환란과 핍박에 대해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롬 8:38-39”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는 축복된 내용을 확신함으로써 또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으로써 모든 환난과 시련과 핍박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 답은 딤 후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 말씀과 같이 성경은 확신으로 가득 찬 말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확신의 교리를 믿지 않은 것은 성경의 핵심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사도의 질문은 ”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입니다. 그리고 두 가지 중요한 답변을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해 그가 이미 말했습니다. ” 아버지 앞에 우리에게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시스도라. “그리스도는 ”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신 “분이십니다.“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기로 출생한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어 그분이 행한 기적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지식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만 이런 지식을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말하는 ’안다‘’ 안다 ‘라는 단어는 좀 더 개인적이고 직접적이며 상관이 있는 관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일반적으로 그리고 외형적으로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의미는 개개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가까이 접하고 관심을 가지는 관계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 같은 방식으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과의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 나는 과연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확실하게 하나님이 보좌에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실재하는 분으로 계시는가? “와 같은 것들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에 대한 어떤 내용들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그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3-5절 ”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로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 여기에서 사도는 그분에 대해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에서 잘 아는 것만으로 멈추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로 연합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그 안에 “라는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 16장에서 그리스도인은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 몸의 각 부분이 그분의 몸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은 요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형태로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생명력이 있는 유기적 관계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포도나무로서의 삶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유기적 연합이 그리스도인과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이 우리 안에 있음으로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생의 위대한 가르침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와 같은 고백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의 삶에 들어와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압니까? 사도가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교회 역사를 보면 신비적인 것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망각하고 이상한 신비주의적 경험으로 이끌려 가버리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초대 교회에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사도 요한은 이런 사람을 염두에 두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비적 진리를 우선적으로 소개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항상 신비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 문제를 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경험을 꼭 테스트해 보아야 됩니다. 진리가 아니라 잘못된 것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들을 시험하고 검증해 참인가 거짓말인가를 가려내야 합니다. 모든 영들을 다 믿지 말기 바랍니다. 영들 중에는 적그리스도의 영도 있고 거짓 영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광명의 천사로 탈바꿈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능히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짜 경험을 하도록 이끌 수 있는 자입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떤 경험을 했다면 그 경험을 엄밀하게 시험하고 검증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은 신비적 체험을 했다고 우기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시험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경험을 자신을 못했기에 안타까워하고 심지어 불행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불덩어리를 받았다거나 온 방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거나 하는 등의 경험을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환상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신약 성경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3. 전환
어떻게 우리는 그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사도 요한의 설명을 들어 봅시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들은 사도 요한을 신비주의자라고 묘사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도 바울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반면 사도 요한은 사랑과 신비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비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 요한 사도가 우리의 경험을 시험하고자 할 때 어떤 신비적인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와 삶 자체로 검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이상야릇한 신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는 말씀은 바로 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풀어서 표현하면 “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고 말하도록 해주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나 느낌이 아니라 감각이나 환상이나 기도에 대한 응답이나 흥미로운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체험해 봐야 주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경험은 우선 적으로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안전한 것도 돨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는 당연히 여러 체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이런 체험을 최고 우선순위에 둘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무엇보다 테스트해야 할 것은 “ 당신의 삶이 과연 어떠한가?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다시 말해 과연 당신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가? ”와 같은 질문을 통해 자신이 그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여러 가지 금지 명령을 벽에 붙여 놓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그분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그분이 원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나에게는 십계명이 있고 산상 수훈의 가르침이 있으며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가르침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 여러분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참으로 관심을 갖고 있으며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살면서 이루고 싶은 소중한 소망이기 때문에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그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안다는 말은 그분이 걸을 때 함께 따라서 걷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자주 우리 인생을 걷는다. 또는 행한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창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행한다. 또는 걷는다는 표현을 통해 주어지는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멋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분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분이 걸으셨던 대로 따라서 걷기 바랍니다. 그분의 발자취와 그분의 행실들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분 안에 거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포도나무의 특성을 자신에게도 담아 그 특성대로 살아야만 됩니다. 무엇인가의 생명을 위한다는 말은 그 무엇인가 지닌 것들을 나타내고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삶을 살펴봅시다. 주님은 겸손과 온유의 모습입니다. 마 11:28-29“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마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도록 격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따라가고자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어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변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연약하고 나약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매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거칠고 힘센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성경에 없습니다.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가졌던 최대 관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그분의 모든 목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비애를 잘 알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세상에 살 때 이 세상의 죄 때문에 통곡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죄가 그분을 상하게 했으며 그분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의 답답한 현실로 슬퍼하고 계시는 그분의 슬픔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고 있습니까? 이런 삶이야말로 주님이 걸으셨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그분의 발자취를 밟아 가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동정 연민과 자애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4. 대단원
사도 요한은 이 같은 것이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테스트라고 말합니다. 어떤 흥미로움이나 환상을 통해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 안에 그분과 똑같아지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나 그분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고 싶은 소원이나 그분이 걸으셨던 길을 더듬어 걸어보고 싶은 것이나 그분의 계명을 다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다 이루고 싶은 소원에 의해 우리 자신을 테스트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 여러분이 그러한 삶을 산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생명은 스스로 드러내 보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면 그분처럼 살지 않으면서 그분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가장 안전한 테스로트로 주어진 것은 어떤 새로운 지식에 대한 이상하고 신비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과 말씀을 지키며 그분이 걸으셨던 길을 좇아서 걷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그분을 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관심사라면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 나는 내가 그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