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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으신 구세주"수정본"

wordlove 2021. 7. 15. 07:56

1. 본문: 요일 3:5

2. 명제: 죄 없으신 주님만이 유일한 구세주가 될 수 있다.

3. 제목: 죄 없으신 구세주

 

1. 갈등

사도는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서와 어떻게 교제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했고 그러고 나서 하나님 자녀의 신분의 위상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신분과 위상을 인식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성결한 삶의 비결은 바로 자신의 신분을 바로 이해하는데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성결의 가르침은 항상 교리의 형태로 소개됨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결 즉 성화의 삶은 교리로부터 분리 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우리의 위상을 바로 이해하면 그 결과로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성결 즉 성화 구원의 삶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성결의 삶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대한 이해가 본질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잘못이란 죄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본성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요한은 1장에서 잘못된 완전주의자들의 위험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완백하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고 죄를 어떤 특정한 행위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들 안에 거하는 죄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죄의 오염된 상태를 인식하는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죄에 대한 또 다른 이단성을 지적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짓는 것을 대수로운 것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4절에서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라고 강력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여러분은 죄의 본질에 대한 모든 것을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 만일 잘못 이해하면 구원에 관한 교리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교리도 잘못 이해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의 강조점은 죄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슬러 반역하는 행위이며 불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삶의 내용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를 단순히 우리에게 있는 어떤 약점이나 실수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한 아직도 버리지 못한 과거의 어떤 형편없는 삶 정도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거룩한 뜻에 불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한 전체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에 관한 개념도 역시 온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고 불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사람에게 있어서 본질적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정죄 받은 것과 그로 인해 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죄는 마귀에 의해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마귀가 처음에 사람을 유혹해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했으며 이것이 불법입니다. 마귀가 사람을 유혹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깨뜨리도록 했으며 어리석은 인간은 그 유혹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계속해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법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항상 죄인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우리는 징벌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죄에 관한 나의 의견이다 라고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목적에 대해 두 가지를 진술했습니다. 5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라 했으며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서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초림의 전반적 목적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진술에 근거해서 그분의 성육신을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5절 말씀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는가? 그분의 가르침과 이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하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왜 땅에 묻혀야 했고 다시 살아나 사람들에게 보이셨으며 다시 승천하셨는가? 요한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든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분명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사실이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또 한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오신 것만도 아닙니다. 물론 그분의 가르침과 비교될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한 주님은 우리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 오신 것만도 아닙니다. 요한은 주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인간이 처한 상태 때문에 전반적인 율법의 문제 때문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법의 관점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문제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율법 아래 있었으며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5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관점에서 죄의 문제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셔야 만 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 다른 길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이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이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봅시다. 요한은 주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은 온전하고 흠이 없고 비난받을 일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원죄와는 상관없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동정녀 탄생이 필수적이었는가에 대해 율법의 관점에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심으로 주님은 출생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지만 그분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라는 구절이 출발점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인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과 구속의 참 의미를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요한은 2장에서 주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를 향해 거짓말하는 자라고 강하게 비난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인성을 잘못 알고 있다면 모든 것이 다 틀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인성을 바라볼 때 죄와 허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에 살았으면서도 죄가 없으신 분이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할 것입니다.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분은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단순하게 도덕적으로 훌륭한 선생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하신 자로 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출생 시에 죄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 죄를 짓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존중했기 때문에 완전하게 순종했으며 완벽하게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법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 법이 지켜지기를 원하셨으므로 그 법을 존중되어야 했으며 지켜져야만 했습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그분과 함께 있을 수 없으며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지켜져야만 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고서는 그분과 교제를 할 수 없고 그분과 영원토록 함께 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율법을 지키신 분이 계십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율법을 완성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목수로서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신 것을 사람들은 해내지 못했지만 그분만은 해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법을 만족하게 지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셨으며 온전하게 지켜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에 지극히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된 인간의 문제는 죄의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단순히 용서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가 롬 8:3-4절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죄를 정 하사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지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주님 안에서만 율법을 지킬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율법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만족하게 하셨고 그 법에 순종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해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의 죄의식 문제까지도 다루어 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모든 번제와 희생 제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에 대한 희생 제물이 드려져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런 모형과 그림자를 보여주셨습니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희생 제물과 제사는 온전하고 조금도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온전한 희생 재물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 이제 여기에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 제물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의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습니다. 율법이 완전한 것을 요구하는 한 어떠한 흠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허물이라도 있으면 죄를 위한 온전한 속죄 제물로 드려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번이라도 죄를 지으셨다면 그분은 우리의 죄악을 위해 속죄 제물로 드려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는 말씀이 있음으로 그분은 희생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 죄의 값을 지불할 수 있는 또 다른 만족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은 육신을 덧입고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죄가 없었으므로 자신을 드려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분이 그렇게 하심으로 그가 우리 죄를 씻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3. 전환

세례 요한이 처음 예수 님을 뵐 때 1:1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를 상기해 보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고난이 주시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이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는 주께서 내 모든 죄악을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내 죄가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개념들은 레 19장에 나오는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 즉 모든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쫓겨난 아사셀을 위한 어린양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오셨으며 이것이 그분의 성육신의 전체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셔야 했고 이것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나의 죄악을 온전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을 요구한 것은 다름 아닌 율법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죄를 위해 희생하지 않고서는 율법을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죄악을 씻겨지는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죄를 대수롭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죄를 어떤 약점 정도로 생각해 이제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것은 별로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까지 이끌었던 못된 것이 죄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7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거룩한 법 즉 하나님의 존재와 특성의 표현인 율법은 죄를 사정없이 정죄합니다. 정죄란 죽음을 의미하며 어떤 희생적 속죄 없이는 용서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그와 같은 용서를 허락할 수 있는 속죄의 사역을 제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악들이 더 이상 나를 고발하지 못할 것이며 더 이상 나를 거슬러 기록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죄악에 대한 기록이 성경책 안에 나타날 때 그리스도에 의해 다 제거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죄를 가벼운 것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진심으로 믿으면 이런 사실에 근거해 사는 사람들과 신약 성경에 기초해 참으로 성결된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성결 된 삶이라는 것이 그저 좋은 삶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성결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조명 아래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은 성결해져야 되기 때문에 성결하게 살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은혜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합니다.

 

4. 대단원

마지막으로 요한은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범죄 에서 멈추어 서지 않고 그 이상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우선이 되는 본질적 내용으로 우리가 저지른 범죄로부터 구원받았음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감사하게도 주님은 우리를 죄의 권세와 오염으로부터도 역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근본적 의미에서 우리의 죄악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있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확실하게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몽탕 제거할 때 영화의 단계는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분의 거룩하신 존전에서 우리는 흠 없고 책망받을 것이 전혀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죽으셨네!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맞는 말입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 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과 성화를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결과 용서를 구별해서도 안 됩니다. 이 모두가 한 가지며 한 가지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결이란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구속해 주신 주님의 사역과 새로운 생명의 선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만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는 길을 걸으신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성결이 바로 그분의 죽으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 자신의 백성을 선한 일에 열심하는 "특별한 보물로서 그리고 자신의 소유한 백성으로 따로 분리해 놓기 위해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과 공중의 권세들을 향해 그분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의롭고 성결한 삶을 살 것을 기대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죄악 되고 타락한 인간이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그리스도의 특별한 보배요 소유된 백성으로서 분리된 자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나는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주께서 죄의 권세와 오염으로부터 점차 구원해 주고 계심을 바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분이 언젠가 다시 오셔서 이 땅과 시간과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모든 악을 멸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공유하게 될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시리라는 소망을 바라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주님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