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의 새와 꽃들"수정본"
1. 본문 마 6:25-32
2. 명제: 천국 백성은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염려와 근심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3. 제목: 공중의 새와 꽃들
예수 님은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지나친 염려와 근심하는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마귀는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거나 염려하게 만들도록 유혹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집중되어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 님은 이러한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을 집중시킴으로 마음을 나누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여 영적 생명을 죽이는 것이 마귀의 유혹입니다. 예수 님은 천국 백성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되는 점을 경고하십니다. 예수 님은 천국 백성은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염려와 근심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염려와 근심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1. 공중의 새를 보십시오.
26절을 보십시오.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음식과 마실 것과 생명유지의 문제와 관련해서 예수 님은 첫째로 공중의 새들을 예로 드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십시오. 예수 님은 우리의 눈앞에 있는 새를 바라보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새들에게 먹이가 공급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새들이 생명유지를 받는 것과 사람이 생명유지를 받는 방법 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새들의 경우에는 먹이가 그들에게 공급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다른 어떤 과정이 있습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가꾸고 자란 곡식을 거둡니다. 그런 다음 이것을 곡간에 모아 그것이 필요할 때까지 저장합니다. 사람의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 사람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역사의 시발점으로 돌아가서 보면 파종기와 추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종과 추수와 곡간 속에 저축하는 것은 사람에게 절대 옳은 것입니다. 사람은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 염려하지 말라 ”는 명령이 우리가 가만히 앉아 양식이 아침마다 기적으로 도착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이것을 믿음의 사람들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늘만 쳐다보고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주께서 정죄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은 씨를 뿌려야 하도록 일하도록 하나님께 명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확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임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님은 새들에게 주의를 돌립니다. 새들은 목숨을 위해서 먹이가 자연을 통해서 제공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께서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삶의 단순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작은 새들도 먹이를 공급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이 보존되게 주선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반 섭리를 통해서 짐승과 공중의 새를 이와 같이 다루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 공주의 새를 보라... 그러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요. 조물주로서 보존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일반 섭리의 배려를 통해 그들을 다루고 계십니다. 여기 아주 미묘한 말씀에 주의를 하십시오. “ 너희 천부께서 그들을 기르시나니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반 섭리로만 관련되어있는 저 새들을 이렇게까지 크게 돌보실진대 하물며 그의 자녀인 우리에 대한 그의 돌보심은 얼마나 더 커야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땅의 아버지도 새나 동물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단순한 생물을 위해 먹이를 공급하면서 자기 자식을 등한히 여긴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땅의 아버지도 이러할진대 우리 하늘 아버지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만물의 보존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새들을 위한 먹이를 공급하시며 새들은 먹이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있도록 주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나는 어떤 자입니까?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만 되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하나님을 아버지이시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 님은 우리에 대한 이런 사실을 인식할 때 염려와 걱정은 불가능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를 적용하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일반 섭리를 통해 예수 믿는 자나 안 믿는 자에게나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내립니다. 마는 특별히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사람은 예수 믿는 신자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도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 외에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그 속에 내주 하지 않는 한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죄가 됨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근심과 걱정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새들을 돌보신다면 그의 자녀인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더 크게 돌보시고 계시겠습니까? “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아니한가?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참으로 위대한 존재로 설명합니다. 사람의 참된 존귀함은 성경적 인간관을 망각함에 따라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속적 인간관은 인간을 하찮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세속적 인간관은 인간은 동물이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은 동물을 천시하고 학대하듯이 인간이 인간을 천대하고 학대하고 노예로까지 삼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시편 8편을 보면 ”시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인류“ 역사는 진정 예수 님이 전파된 곳에서 참된 인간성의 회복이 시작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님이 들어간 곳에 인간 불평등이 타파되고 인간의 존귀성이 높아졌습니다. ”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인간이 귀한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 다스리라고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짐승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그런 새들도 돌보십니다. 새들도 하나님이 보시게 소중합니다. ”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새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아닙니다. 예수 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죄 용서함을 받는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여러분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로 보호하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단번에 영원히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겠느냐? ”여기 키란 원어 적 의미에 대한 두개의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키의 높이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우리는 키라고 하면 높이를 생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키란 말의 헬라어의 또 다른 의미는 생명의 길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문맥에서 살펴보면 이 뜻은 키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입니다.. 예수 님은 " 너희 중에 이렇게 수고하고 염려하고 근심함으로 생명의 길이를 한순간이나마 연장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라는 말씀입니다. 원문은 너희 목숨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 님은 몸을 말씀하시지 않고 생존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수명을 연장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에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습니다. 예수 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행위로 너희의 모든 노력으로 너희의 모든 수고와 근심 걱정을 한다고 너희 중 어느 누가 한순간이나마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잘 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오늘날 사람의 수명이 크게 연장된 사실을 모르십니까?라고? 의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은 과거보다 영양가 높은 음식 공급과 의학의 발전으로 사람의 수명이 과거보다 얼마간 연장된 것은 사실입니다. 조선 조 초기 우리나라 국민 평균 수명이 30세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에 비하면 굉장히 수명이 연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본래의 인간 수명이 근본적으로 연장되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영생을 누리다가 죄를 지어 하나님을 떠난 이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장수했던 인간의 수명이 노아 홍수 심판 이후 어떤 학자들은 우리 인간의 수명이 120세까지 줄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죄를 줄이고 몸과 주변 환경을 잘 개선한다면 어쩌면 120세까지 수명이 길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운동하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는 것은 오래 살기보다는 건강하고 병들지 않게 살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힘이다.라고. 말하지만 억만장자의 수명도 가난한 자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억만장자라고 가난한 사람보다 수백 년을 더 삽니까? 북한에는 최고 지도자 한 사람을 위하여 4000명이 되는 사람들이 장수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감정일은 70도 못살았습니다. 수명은 사람에 따라 하나님이 정하시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건강 상태에 있는 환자도 어떤 환자는 살고 다른 환자는 죽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 답은 아무도 수명에 인간 스스로가 한 치를 보탤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음식과 어떤 의학의 기술도 사람의 목숨에 단 한 치도 더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은 왜 이렇게 법석을 떨고 안달하느냐? 왜 이렇게 근심하며 걱정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일으키고 그 종말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목숨을 유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걱정하고 근심하거든 즉시 그 자세를 바로잡고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나의 목숨을 시작하거나 계속하거나 끝낼 수 없다. 이것은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로 근심하는 것은 철저하게 헛되고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임을 인정하십시오. 여러분의 할 일이나 하십시오. 씨 뿌리고 추수하고 추수하여 곡간에 거두고 일하고 운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어떻게 염려와 근심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들의 백합화를 보라.
28절 “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이번에는 “ 들의 백합화 “를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백합화는 팔레스타인의 평범한 들풀입니다. 예수 님은 이것들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풀들은 수고도 아니 하고 직조도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 풀들의 그 경이와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솔로몬의 영광은 유대인들 사이에는 속담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솔로몬의 장려함과 화려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화려한 의복과 금과 보석으로 만든 가구들 백양목으로 꾸민 화려한 궁정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꽃 하나와 비교해 볼 때 그의 모든 영광은 빛을 잃고 하찮은 것이 됩니다. 꽃에는 그 형태와 무늬와 짜임새와 바탕과 색깔이 사람의 온갖 재간을 갖고도 인간이 결코 모방할 수 없는 본질적 자질이 있습니다. 예수 님은 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보십니다. 주님은 꽃들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니다. ” 들풀에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나님이 들꽃에도 이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얼마나 더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어째서 그렇습니까? 30절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들의 꽃은 잠깐 있다가 지나갑니다. 백합화와 풀은 덧없는 것으로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꽃들을 장기간 존속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들을 베는 순간 풀들은 죽기 시작합니다. 꽃들이 오늘 그 섬세한 미와 온갖 완전함을 지니고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이면 모두 가버립니다. 이 아름다운 것들이 왔다가 가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불멸임을 아십니까? 사람은 시간의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영원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여기 있다가 진정한 의미에서 내일 가버린다고 하는 말을 우리 인간에게는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영혼을 심어 놓았습니다. “ 너는 흙이라 흙으로 돌아가리라 ”말은 눈에 보이는 육체를 말합니다. 하지만 영혼에 대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죽음을 두 번 겪는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가 육체의 죽음입니다. 두 번째는 육체가 죽은 순간 우리 영혼은 즉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심판받기 위해 올라갑니다. 예수 믿는 영혼은 예수 님의 피 공로로 죄 용서함 받아 천국으로 갑니다. 그리고 예수 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 몸도 부활하여 영원히 주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님의 피 공로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아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것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지금 살아 있을 때 예수 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죄 용서함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에서 돌이켜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구주 예수 님을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실 구세주와 나를 만드신 하나님으로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죄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이것이 영생의 축복의 시작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받게 됩니다. 예수 님은 천국 백성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염려와 근심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