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사 1부 첫 시간
초대 교회사 1부 첫 시간
교수: 정노훈 목사
섬김의 교회 담임
부산 대학교 졸
고신대학원 졸
Regent University, D.Min:목회학 박사
교재: 교재: 정교수 강의안. 참고도서: 기독교 교회사, 김영재 저,
이레 서원. 역사 신학, 앨리스터 맥그래스 저, 知와 사랑. 기독교 인물 사상 사전, 토니레인 저, 홍성사
블로그: http://blog.daum.net/jnhok(로고스 아가페)
역사는 무엇인가? 기원전 612년 고대 근동의 패권 국가였던 앗시리아의 제국의 수도 니느웨이가 바벨론 군대의 의해 멸망당함.(욘 1:2).(욘1:2) 나훔 선지자는 이 사건을 유대 민족을 괴롭힌 앗수르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했다.(나1:12-13) 유대 사람의 관점에서 본 역사 해석. 그 후 천년이 지난 후 영원한 도시로 불리던 로마 제국이 야만족 고트의 침략으로 함락됨. 세계 최강의 로마 문명이 야만족에 의해 망하다니 충격을 받은 로마인들은 애꿎은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이런 원망을 들은 어거스틴은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유명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통해서 ”로마가 고트족에 의해 함락된 것은 기독교인들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고트족의 군사력이 우세했기 때문이며, 지난 역사를 상고해 볼 때 로마 군대가 야만족에 패배한 적이 지난 과거에도 물론 있었다. 야만족에 의해 망한 도시는 로마이지만(인간의 도시)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한 것”이라고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나름대로 해석했다. History 그분의 이야기 즉 역사의 주이신 주님의 이야기를 역사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난 시대의 사건과 역사적 인물 가운데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 나가는데 이러한 우리 자신을 향한 계속되는 질문을 이름하여 ”(역사)"(History)라고 한다. 지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하였는지를 돌아봄으로써 오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 있다. 역사란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주체 작업이다.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왜 역사를 배워야 할까? 1. 과거를 읽는 것은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함. 과거 역사를 알면 우리가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잘 이해함 2. 현재를 (극복)하기 위함. 과거를 배움으로 우리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고 더 정확한 관점에서 자신을 사고할 수 있다.
과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1. 역사를 (거울)로 보는 방법. 이런 관점을 가지면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에 도취된다.. 자신을 지지해 줄 만한 특정 시기의 특정 인물만을 연구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대로 과거를 재창조한다. 역사가 왜곡된 거울로 변하면 우리는 과거 속에서 우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2. (창문)으로 보는 방법. 창문은 우리 자신이 아닌 바깥세상을 보게 해 주기 때문에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 외국 여행을 가면 우리가 사는 방식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람직한 관점이다. 3. 과거의 교훈은 우리의 선입견이나 현 상황에 대한 적응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교회 역사의 아버지는 유세비우스이다(Eusebius). 그는 역사를 기록하는 동기가 단순히 예수 님의 전기나 사도들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바탕을 이루는 증언과 신학을 담고 있다. 교회는 신약 그리스도의 말씀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간섭하시는 구약의 역사도 선지자들의 기록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로 보았다.
유세비우스(AD 260-340). 가이사랴의 감독
1) 기독교 교회사를 처음 쓰신 분
2) AD 니케아 종교 회의에 참석
3) 교황과 교회에 관한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기독교란 종교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글(저서: 교회사)
4) 교회사의 아버지
초대교회 시대에서 주 후 500년까지
교부시대(petristic age)는 사도 사도시대 이후부터 312년 콘스탄틴누스의 전환을 거쳐 451년 칼케톤 공의회(counsil of Chaledon)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또는 교부시대의 마무리를 8세기의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ea)로 생각하기도 한다.
초대교회는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인정되기 전까지. AD 30년에서 4세기까지 존재하고 활동했던 교회를 일컫는 말. 무수한 박해가 있었지만, 교회는 오히려 진리를 지키며 신앙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
AD 313 콘스탄누스 황제. 기독교 공인된 종교가 됨. 338년 데오도시우스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 복음의 능력 때문.
알렉산더(BC 356-323) 페르시아 제국 정복. BC 323년 알렉산더 죽음. 4 장군에 의해 분할 통치. 2개가 큰 영향력을 행사. 프톨레마이오스, 셀룻키드. 프톨레마이오스가 먼저 BC 301년 팔레스타인 정복. BC 270 구약의 헬라어로 번역. 70인 역(Septuagint) 유대인은 헬라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BC 2세기경 세룻키드의 안티오크스 팔레스타인 정복.
BC 165년 마카비 잠시 주권회복. BC 67 폼페이의 로마 군인이 점령. 로마의 지배.
BC 586 유대는 바빌론에 의해 망함. 디아스포라 발생. 흩어져 사는 유대인
AD 2세기경. 이집트에서 인구의 10~12%가 유대인. 로마에도 2%. 로마 제국 내 총인구, 4-4,500 만 명의 7%가 유대인. 흩어진 유대인의 구심점은 회당(synagogue) 교회에서는 발칸반도 동쪽을 동방. 서쪽을 서방이라고 부른다. 서방의 언어는 라틴어가 공용어로 사용됨. 복음 전파에 큰 기여. 하나님의 섭리.
기독교의 국교. 부정적인 요소: 교회가 제도 화가 되고 세속화가 됨. 긍정적인 요소: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 게르만 민족을 기독교화 시킴. 온 세계의 복음 전파의 계기가 됨.
그리스도 교회의 형성과 시대적 변경
로마의 카이사르의 친구 이두 메이아인 안티 파터의 아들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게 함. BC 37년 예루살렘 점령. 유대인 장악. 성전 건축. 새 도시 세움. 백성의 마음을 무마시키려고 했으나 실패. 도리어 반로마 감정만 증가.
종교적인 그룹: 1) 바리새인: 정통적인 유대교. 마카비 시대에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 했던 핫 시딤의 후예로 추정. 2) 사두개인: 제사장과 상류층 가문 출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역사를 믿음. 사두개인은 역사의 운명을 개척하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 전자는 천사를 믿지만 후자는 믿지 않음. 3) 에센들(Essences) 세례요한이 이 파 출신. 4) 열심당원(Zealdts, 독립파): 이들은 종교를 위해서는 목숨을 각오. 공통점은 외세의 압제를 벗어나 나라의 독립을 쟁취 목적. 메시야 대망.
안식일: 주일로 바뀜. 유대인과의 차별.
AD 60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이 로마 제국에 대항. 유대인 기독교는 말리는 편. 예루살렘 교회는 AD 66년 전쟁이 일어났다. 유대인 기독교는 예루살렘을 빠져나감. 요단강 건너 이방 도시 필래(Pella)로 이주. AD 70년경 로마군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그것에 머묾.. 그들은 진정한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함.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인의 도시가 되었다. 이교 사원이 들어섬. 이 이후 예루살렘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대적인 전통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를 누리며 세계 종교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터틀리안의 증언: AD 200년경.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중해 연안의 아프리카 전역에 확산. 이탈리아 반도에도 AD 250년경 100개의 주교구가 있었음. 안디옥이 서방 선교의 중심지. 에데사(Edessa)가 동방 선교의 근거 지었다.
도마 행전에는 AD 3세기 인도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로마는 사회의 하층 계급에서 상층으로 침투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빈부귀천이 없고 형제자매로 묶어주는 사랑의 복음이 큰 매력.
초기 기독교
1) 시대 상황 특징.
(1) 주 후 100년까지 교회는 핍박받는 사회적 소수
(2) 신약 성경은 묶이기 전이었고 “(예수는 구주이시다)”라는 짧은 신앙 고백만 있었고 공식적인 신조(Creed)는 채택되지 않았음. 주기도문과 같은 구체적인 형식의 기도문이 있었지만, 모든 교회가 합의된 정형화된 예배 형식은 없었다.
(3) 300년부터는 달라지기 시작. ① 지배층 신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함. ②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포. ③ 구약과 신약이 형성된 때도 이때다.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이단에 반대하는 정통 개념이 분명해지기 시작. ④ 교회는 기본적으로 감독, 장로, 집사, 세 가지 직제와 정형화된 기도문을 포함한 예배 형식이 존재.
(4) 초대교회는 두 가지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다.
① 주 후 (70년)를 기점. 이때까지는 유대인이 예수를 따르는 주류. 일반적으로 유대교라는 틀 안에 속하나 정도를 벗어난 무리 정도로 보였다.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보임.(행 24:5) 모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였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사실을 확립하기 위해 투쟁. AD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예루살렘 교회도 파괴됨. 이때부터 (이방인들의 교회)가 초대교회의 주축이 됨.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 교회가 모 교회 역할을 함. 신약 성경 시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유대인이 되어야 하는가?)이었다면?) 이었다면 2세기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가였다.”(유대교 안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가?)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보편적 신앙)으로 전환.
여자들의 역할이 컸다. 여자들이 평등한 대접을 받은 종교는 없었다. 롬 16:1 뵈뵈는 겐그리아 교회의 중직으로 활동.
박해 아래 성장하는 교회.
로마 정부: 종교와 사상을 포용하는 정책. 기독교인 황제 숭배 거부. 각 사회 계층으로 침투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변함. 기독교의 이질적인 위험한 세력으로 봄. AD 64년 네로가 로마의 대화재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을 속죄양으로 삼았다.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25-107), 순교.
서머나 감독 폴리갑(Polycarp), 69-155. 황제가 주님임을 거부 순교함.
AD 250년 로마 건국 1000년 기념. 옛 신들에 대한 신앙이 새롭게 고조.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데키우스(Decius), 249-251,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한 최초의 황제.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했다는 증서를 소지를 거부하는 자는 사형.
오리겐(Origen), 185-254. 심한 고문 후 3년 만에 죽음.
AD 312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Χριστός) 그리스도의 첫 두 글자의 ( )의 표시로 군기에 달도록 지시. 환상 중에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른 것이라고 전해짐. 티베르강가의 전투에서 승리. 기독교가 로마의 보호를 받은 국가 교회로 발전. 312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시작.(312년 로마의 북쪽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 전투를 앞두고 신비한 체험과 ‘그리스도’ 의 첫 헬라어 두 글자 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군기를 앞세운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둠. 황제가 박해를 종식시키고 교회에 협력을 약속함.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 유세비우스 같은 사람은 교회와 국가의 결탁을 열렬히 지지함.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오류였다고 지적도 함. a. (진지한 신앙 고백) 없이 대규모로 기독교로 개종. b. 기독교인들의 도덕 수준이 낮아졌고 이교도의 우상 숭배 관행이 들어옴. c. 박해받은 교회가 박해하는 국가 교회가 됨. 고난 겪는 종이었던 교회가 억압하는 교회가 됨. d. 유럽이 기독교회가 되면서 기독교는 유럽인의 민족 종교가 되는 위험에 빠짐. 유럽에서 전 세계로 복음이 전파됨. e. 초대교회는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과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으로 분리되었다. 언어 배후에는 그리스로 로마 문화 차이가 있었다. 초대교회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그리스인들이었고 신약 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됨. f. 로마 교회 역시 3세기까지는 헬라어를 주로 사용. 교회가 라틴어를 사용한 것은 2세기 말 북아프리카 터툴리안이었다. 처음 몇백 년 동안 주로 공용. 5세기 말 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 두 교회는 서로 멀어졌다. 후에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됨.
AD 316, 콘스탄티누스( 306-337) 밀라노 칙령, 기독교 칙령. 기독교 자유 허용. 니케아 공의회, 삼위일체 교리를 교회의 신조로 받아들임. AD 337 콘스탄틴누스 세례 받음..
AD 380 테오도시우스 가톨릭 교회를 국가 교회로 선포. 이방 종교는 종식.
AD 381년 콘스탄티노풀 공의회: 삼위일체 교리 문제를 두고 일어난 소위 아리우스 파를 이단으로 종결.
AD 382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대제사장 직함을 내려놓고 원로원 회의실에 있는 승리의 여신 제단 제거. 로마 감독이 종교의 수장임을 지칭하는 이 칭오를 5세기 이후부터 사용.
초대교회의 선교
AD 250년 기독교는 로마 제국 전역에 전파됨.
AD 300년경 유일신 사상은 계몽된 사상으로 간주 됨. 기독교의 사랑과 순교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음.
콘스탄티누스-565년까지 추진된 선교 방법:: 첫째 방법은 황제가 직접 추진된 선교 방법.. 이 경우 종교적인 목적과 정치적인 목적은 밀접한 상호 관련이 있었다. 둘째는 감독들이 자신의 교구에 거주하는 이들을 만족하게 하려고 셋째는 외국의 포로 개개인을 개종자로 만듦.
초기의 교회 조직
사도: 바울 사도는 전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를 조직하는 역할을 했다. 교회를 세우고 장로를 세웠다. (행 1:23) 여기 장로는 지역 교회의 목회자였다. 선지자: 전도자를 지칭하거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직분 자의 명칭. 초기에는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2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장로와 감독이 예배를 인도. 선지자의 직분은 소멸하여 갔다. 선지자의 기능은 쇠퇴.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교회는 선지자라는 이름을 회피. 감독: 2세기에 신약의 서신서에 감독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장로와 감독은 같은 기능. 교회가 많이 서자 감독과 장로는 다른 직분과 직위로 구분. 교회는 감독, 장로, 집사로 제도화됨. 사역의 특수성 때문에 새로운 역할이 부가. 감독은 권징을 시행, 설교하며, 성례를 베풀며,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으로 상승. 1세기부터 2세기 중엽까지 속사도 교부들은 감독으로 불렀다. 교회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 이전부터 교구 교회로 발전했다. 이것은 정치적인 행정구역과 비슷. 그리스도의 교회가 감독제의 교회로 발전. 사도 파송 전도자 등 교회 자체가 경험한 역사적인 과정 때문. 동시에 교회가 있었던 정치적인 상황이 즉 공화정이 아니라 군주 정치가 시행됨.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제도를 가짐. 종교 개혁 시대 때에도 나라의 교회들이 통치자의 세력을 배경으로 가톨릭으로 남았다. 장로는 감독과 더불어 당회 구성. 감독을 보좌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가르치기도 했음. 집사: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돌보며 예배 시종을 듦.
초대교회의 사상적 배경
플라톤주의와 그리스 철학
초대 교부들은 대부분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인과 로마인)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을 동시대 사람에 소개하면서 그들의 사고방식 즉 그리스 철학과 관련지어 소개하려 애썼다. 초대 교부들에 영향을 주었던 주류 철학 파는 (1) 소크라테스(주전 390년 사망) (2) 플라톤(주전 347년 사망) (3)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22년 사망) (4) 제논(주전 263년 사망)이 창시한 스토아학파.
a. 그리스 사상의 특징. a) 존재(being)와 생성(becoming)을 구분.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변하고 부패한다. 불변하는 것은 없다. 플라톤은 무언가 늘 변하는 이 세상과 대조적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은 세계가 있다고 주장. 인류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은 (이데아)(idea)가 있다고 보았다. 개별적인 인간 존재는 영원한 이데아의 희미한 반영일 뿐이다. 실재하는 것은 영원한 이데아다. 기독교 시대 전까지 그리스 철학은 최상의 초월적인 (유일신)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철학적 일신론은 기독교 변증 가(apologist)와 접촉점과 문제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문제점은 (a). 철학의 신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은 존재다. 따라서 변하고 생성하는 이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b) 철학의 신은 감정이나 감동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러한 철학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개념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모순과 싸워야 했다. c). 그리스 신은 불변 하며 존재의 세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신과 이 세상을 연결해 (중재자)가 필요했다. 중재하는 능력과 원리를 가리켜 그리스 철학이 사용한 개념이 로고서(logos)였다. 로고서는 그리스 철학이 헬라어로 이성(reason)과 말(word) 모두를 의미했다. 이 개념이 요 1장에 나오는데 기독교 변증 가들이 활용했다. 문제는 (a) 말씀이(the word) 신이 변화하는 세계와 직접 연결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 인류의 (죄) 때문에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b). 그리스 철학은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이 세상은 일시적이고 변화하며 열등한 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물질로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 이 세상은 최상의 신에 의해 만들어낸 것으로 보지 않았다. 따라서 이 세상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대체로 금욕적이며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무엇을 추구했다. 이러한 사상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c). 그리스인은 (물질세계)을 경멸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발견했듯이(행 17:32) 육체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리스 사상과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d) 그리스 철학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 두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육체는 생성하고 변화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고 영혼은 존재의 세계에서 나오는 신의 광채이며 이성적인 것이었다. 인간의 운명은 신성화 즉 신처럼 되는 것이었다. 모든 감정과 느낌에서 벗어나서 마침내 아무것도 느끼지 않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a). 기독교 사상과 비슷하지만, 결코 같지 않다. 그리스인들은 유일신을 믿었지만, 그 신은 인간이 되어 고난 겪으신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무런 감각이 없는 불변한 존재였다. 그리스인들도 이 세상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이유가 인격적인 하나님에게 (불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가 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보았다. (b). 그리스인들은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지만 구원을 기독교 복음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
초대 교부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산과 기독교 신앙을 (연관) 시켜 설명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즉 기독교 신앙을 그리스 용어로 표현하되 왜곡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리스 사상은 기독교 사상으로 전환되었고 성경적 기독교에 부합되지 않은 요소 대부분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역시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을 무 감각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남아있고 금욕주의 역시 무감각이라는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결과가 완벽하지 못한 것은 초대 교부들도 부족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유대교: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갈망.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율법적으로 성립된다고 봄. 많은 계명. 상급사상을 가짐. 메시아는 능력 있는 초인적인 왕으로서 400년간 살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린다고 생각.
로마 종교: 세계동포주의. 여러 사상과 종교들이 혼잡을 이룸. 고대의 신비주의가 구원의 방편으로 등장. 미드리스 페르시아의 태양신으로서 황제 숭배 교가 됨. 4세기 기독교에 의해 제거됨. 그리스 유대 철학은 이원론적인 인간관을 가짐. 구원은 감각적인 몸의 욕정을 벗는 것으로 봄.
스토아 철학(Stoicism): 로마의 귀족들과 지식인에게 널리 퍼짐. 육체로부터 해방이 지고의 목표 그 후 평화가 있다고 주장. 유물론, 범신론, 유신론. 자고의 선은 덕이라고 봄. 죄의 근원은 무지. 이성의 결핍이라고 주장. 죄는 인류의 보편적인 상태라고 봄. 세계동포주의
기독교 교리와 그 발전의 특이성
속사도 교부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교리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음. 칭의 교리는 중세를 거쳐 종교 개혁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옳게 재발견. 기독교 교리는 사도를 거쳐 교부로 말미암아 더 개발되고 그다음 변증 자들과 교회 교부들을 통하여 더 발전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 교리는 전 시대의 교리적인 지식을 거점으로 하여 성경의 진리를 더욱 새롭게 풍부하게 발견해온 역사이다. 기독교 교리는 주변의 헬레니즘 견해를 제거하고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고 더 밝혀 내려온 과정의 역사이다.
속사도 교부들과 그들의 신학
사도들을 뒤이은 지도자들을 속 사도 교부라고 한다. 그들의 가르침에는 독창성과 깊이가 빠져 있으며 교훈이 빈약하고 명확성이 빠져 있었다. 그들은 신약의 정경 성과 완전성을 증거 했다.. 사도 적 교부들-사도 시대 이후. 베드로와 바울로 대표되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에 의해 유대 중심의 기독교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로 급속히 전파된 시기를 “사도들의 시대”(The Age of Apostles)라면 2세기 중엽부터 태동한 지중해 중심의 초대교회를 “(교부들의 시대)”(The Age of Apostolic Fathers)라 부른다. 사도 적 교부란 사도 시대 이후(150년경까지)를 산 사람들이다 그들이 남긴 저작들은 신약 성경과 2세기에 등장한 기독교 변증 가들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 1세기의 사도 적 교회와 2세기의 보편적 교회를 연결하는 역할.
이그나티우수는 ‘기독교’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다. 그는 감독과 장로 집사들을 한 사람이 지도하는 감독직을 강화한 인물. 가현설 반대,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심을 강조. AD 108년 순교. 서머나 감독 폴리갑8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기둥에 매달려 화형 순교.
신론: 속사도 교부들은 다신교 신앙을 반대 유일신 주장. 클레멘트 1서에서는 성 삼위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말함. 그러나 성령이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흔적은 없다. 성령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경. 그리스도의 신성은 기정사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를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진정한 연합을 말함. 이그나티우스는 교회는 지역적인 공동체이기보다는 전 세계에 미치는 보편적인 제도이며 영원한 이상적인 존재인 동시에 현실적 존재로 보았다.
성례론: 이그나티우는 불멸의 약, 죽음을 막는 해독제로 봄.
종말론: 예수 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하며 도덕적 개선에 관심을 두었다. 속사도 교부들은 구약 성경을 교리적 표준으로 절대적 권위를 인정했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 님의 말씀도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신약 성경의 정경화
그리스도 교회는 구약을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딤후 3:16 절) 그러나 신약의 정경화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레니우스 (AD -202)에 의해 정경의 가닥을 잡혔다. 그는 4 복음서와 13개의 바울 서신, 벧전, 요한 1서, 2서, 계시록, 허버스를 정경으로 여겼다. 터툴리안은 4 복음서, 바울의 서신 13개, 사도행전, 계시록, 요한 1서, 벧전, 유다서도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히브리서는 신약의 일부로 보지 않았다. 허버서는 그가 몬타누스주의 자가 된 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클리멘트는 히브리서를 바울의 자작으로 보았다. 오리겐은 인정된 책과 논란이 되는 책들을 분류했다. 인정된 책은 4 복음서와 13개 바울 서신, 벧전, 요한 1서, 계시록, 사도행전, 논란이 되는 책은 벧후, 요한 2-3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4 복음서와 13개의 바울 서신을 포함한 현재의 27개의 책이 신약 정경으로 된 것은 AD 367년 교부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296-373) 자신의 39번째 부활절 메시지에서 발표한 이후부터 동방 서방 교회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그대로 시인하고 그 권위에 순복 한 것임을 말해줌.
기독교 초기의 이단 사상과 분파 운동
2세기에 교회는 외부와 내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로마 제국의 박해, 당시의 사상가들, 이 외에 성경을 오해하고 왜곡시킨 이단들이 있었다. 유대교적인 에비온파(Eboites)와 영지주의(Gnostics) 에비온 주의는 사이비 베드로 노선을 따름. 기독교화된 유대주의자로서 그리스도는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의 양자라고 주장. 영지주의자는 사이비 바울 적인 경향을 띤 이교적인 사상으로 사변적이며 신비주의적 그리스도를 말함. 이 두 개는 이단적인 원형이었다. 에비온파는 바울을 배교자로 보고 할례를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 예수 님은 단지 메시아로 지명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그의 율법적인 경건 때문에 메시야로 택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님은 세례를 받을 때에 이 사실을 인식했으며 선지자와 교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결함을 받았다고 주장. 유대교적인 전통에 따라 천년왕국을 믿었다. 영지주의는 AD 70-250년까지 퍼졌던 이단 사상. 영지주의는 우주의 신화, 그리스와 동방의 이교적 철학 사상, 기독교 교리들을 혼합한 사상. 가현설 주장,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었음을 부인하고 몸을 입은 것이라는 가현설 주장. 물질을 근본적으로 죄악시하고 구원이란 금욕과 계몽을 통하여 물질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봄. 영지주의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말한다. 조로아스트교의 사상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빛과 어두움, 정신과 불질을 대립적으로 보며, 물질은 악의 원리에 지배당하며, 정신의 세계는 성신 신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부인하며 인간의 영과 육이 합하여 하나의 인격체가 된다는 것과 육체의 부활을 부인. 성육의 실재성을 부인.
변증 자들과 그들의 신학
이들은 기독교 진리를 헬라 적인 사상 배경에서 이해하려고 했으며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스도를 로고스 사상으로 이해하고 변증 했다.. 기독교 진리를 헬라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변증 가들은 신학은 속사도 신학보다 후퇴한 것으로 평가.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her)-신앙의 수호자.
시대 상황, 125경 사마리아에서 출생. 그리스도 안에서 참 진리를 발견하기까지 진리를 찾아 여러 철학 사상을 편력했다. 165년경 순교.
주요 활동, ① 그리스 철학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자 함. 처음에는 스토아 철학에 심취. 그러나 실망. 바닷가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은 저스틴에게 구약 성경과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해 줌. 저스틴은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이 없이 순교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이 철학만이 해를 끼칠 염려가 없고 유익한 것이라는 알고서 그리스도인이 됨. “나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는 철학자다”라 했다. ② 그는 (기독교) 철학을 그리스 철학의 완성으로 보았다. 플라톤의 철학은 모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
특징, ① 기독교를 변호하는데 자신의 지식 사용. 황제 앞에서 기독교 변호. 다른 신들에게 예배함으로써 그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며 순교. (황제에게 그리고 당신 당신이 우리를 죽일 수는 있어도 헤칠 수는 없다) ② 기독교 신앙을 자신이 물려받은 그리스 유산에 정착시켰다. 저스틴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믿음을 위해 죽음까지 감수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의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③ 신약이 구약이 성취라고 주장. ④ 겸손 정직 용기의 사람. ⑤ 버나드에 의하면 그는 ”기독교 안의 (보편주의적 요소)를 파악하고 전 문명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 완성한 바울 이후의 최초 사상가였다 “라고“ 평가. 구속을 위해서는 유일 신관과 도덕적 생활을 요구하고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 구원에 대한 이러한 공로주의 사상은 교회에서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이해에 이르게 됨. 변증 가들은 헬라 문화와 사상에 젖어 기독교 진리를 주변의 사상으로 설명하려다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했으며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한 신성을 가졌는지에 대한 표현도 모호하여 아들을 아버지보다 하위에 속한다는 종속설로 말함. 그리스 사상에서는 첫 원리에서 유래된 것은 첫 원리보다 하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결국, 로고서로 그리스도를 설명하다 보니 종속설을 극복할 수 없었다. 로고서 기독론은 4세기 이후에 신학자들은 로고서 교리를 탈피하게 된다.
아레니우스(Irenaeeus)-이단에 맞서
시대 상황, 115-119 사이에 출생. 소아시아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폴리갑의 가르침을 받았다. 202년 순교.
중요 활동, ① 저스틴이 변증 가였다면 이레니우스는 이단 사상을 공박하고 사도 적 교회를 설명하는 데 공헌. 영지주의를 논박하기 위해 “영지주의에 대한 고발과 논박”을 씀. ② “영지주의자란 영지를 소유한 자” (영지)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서 아는 사람이다. 영지주의는 하나님이 인간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고 지고(至高)의 존재라고 믿었다. 피 조 세계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사이에 있는 신적 존재들 간에도 높고 낮음이 있다고 봄. 우주는 하급 신인 (아이온)(Aeon)에 만든 것으로 봄. 그래서 이 세상은 죄악과 재앙이 있으며 구원은 이 악한 물질의 속박에서 해탈되어 신에게 돌아오는 데 있다고 주장. 구원은 지식(그노시스, gnosis, 영지, 靈知)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에 이르는 과정에서 신성한 존재들 옆을 지나가는데 필요한 암호를 알려주는 지식으로 신비한 길이거나 혹은 실존적 자아 인식으로서 좀 더 철학적인 길이라 이해했다. 영지주의 분파들은 자기들만의 경전과 비밀스러운(전통)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특정 사도 혹은 다른 사도에게 받았다고 주장. ③ 이레니우스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a.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었다면 그들이 사도들이 세운 교회에 그 가르침을 전했을 것이라고 주장. 그리고 로마 여러 곳에 교회들이 흩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같은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사실을 강조. b. 만약 누군가가 사도 적 기독교를 찾아야 한다면 사도들이 세운 이래로 개방적이고 연속적인 가르침을 견지해 왔고 또 서로 간에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 사도 적 교회 안에서 찾겠는가? 아니면 사도적 전통에 대한 주장들이 증명될 수도 없고 모순되며 서로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영지주의 안에서 찾겠는가? ④ 정통 기독교와 영지주의는 서로 다른 별개의 두 (종교)이다. ⑤ 그는 문자적인 부활을 주장하여 영혼의 구원만을 중요하게 다루는 영지주의의 이원론 사상에 반대.
특징, ① 이레니우스는 신약 성경을 구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정경)으로 인정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② 그는 사도 적 교회 안에 존재하는 사도들의 기록(신약 성경)과 전해 내려오는 사도들의 가르침(전통)에 호소했다. 그러나 전통을 신약 성경에 첨가할 의도는 없었다. 특별히 이레니우스가 전통을 강조한 이유는 영지주의가 신약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 ③ 그의 신학 사상은 성육신과 속죄를 강조하여 바울 신학을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