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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가운데 행함

wordlove 2022. 5. 29. 16:25

1. 본문: 요일 1:6-10

2. 본문 요약: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인간이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

3. 본문 주제: 하나님과의 교제

4. 본문 테마: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인간이 할 일

5. 명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인간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과 죄를 고백하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용서 축복이 주어진다. (예언적 명제)

6. 목적: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7. 질문제기: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인가?

8. 전환 문장: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인간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과 죄를 고백하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용서 축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인가?

9. 대지

10. 제목: 빛 가운데 행함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구원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 불신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지켜야 할 몇 가지 조건에 대해 말씀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우리 인생은 죄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적극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일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7-9절을 보십시오.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라는 말씀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릴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해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는 하나님이 해주실 부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인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빛 가운데 행함 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인 의미는 오직 한 가지 전적인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잘못 이해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철저하게 온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중에 죄 없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6절에 어둠에 행함 이란 말은 세속적이고 죄 된 생각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두움에 행하는 사람들이 항상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매우 존경받은 사람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매우 도덕적인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어두움의 왕국에 속해 있으며 인생관도 일반적으로 빛 밖에 있는 어둠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행함이라는 말을 어둠에 행함 이라는 내용과 정반대로 해석하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절대적으로 완벽해야만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왕국에 전혀 적합한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왕국 안에 머물고 있고 속해 있으며 그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함 이라는 말을 베드로도 벧 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씀에서 거룩한 나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속한 왕국이 바로 이 왕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화에 대한 특별한 이론을 가진 어떤 사람들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필연적으로 빛 가운데 행하게끔 됐으며 비록 그들이 연약하고 나약하며 합당치 못하다 해도 어쨌든 빛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의 실제적인 의미는 먼저 회개하지 않고서는 빛 가운데 행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며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죄 가운데서 형성되었고 죄악 중에 출생했다는 사실과 출생 시로부터 진노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죄악과 사탄의 지배 아래 출생해 죄의 종노릇을 해왔다는 사실도 압니다. 나는 어둠의 영역 속에서 왔으며 나는 악하며 또한 죄악을 행해 왔다는 사실도 알고 인정합니다. 나는 이런 죄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와 같은 죄 성을 비통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행한 죄악에 대해 후회하며 이로 인해 슬픔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올바로 직시할 수 있으며 자신에 대해 항상 조심하며 경거망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의 바울의 고백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 필요함을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되는데 아주 필수적인 부분들입니다. 이런 죄에 대한 인식과 회개가 없다면 누구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한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상황과 현실을 바라보고 자신의 문제를 진실하게 깨닫는 탕아와 같은 사람들은 이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야겠다. ”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탕아가 자신이 속해 있던 어둠의 영역과 방랑자의 태도를 바꾸어 아버지의 영역에 들어와 아들의 위치로 왔듯이 자신이 속해 있던 영역과 위치를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어둠의 영역 즉 죄의 영역에서 마귀의 영역에서 빛의 영역으로 즉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위치를 바꾼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또 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항상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는 삶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삶도 역시 포함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그 신분에 충분히 어울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긍정적인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항상 노력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항상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어둠의 세력 영역 가운데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고방식이 현재의 빛의 영역 속에서의 삶을 따라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모습 자체가 바로 빛 가운데 살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주인이십니다. 그들은 의롭게 살고 순결하게 사는 것에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바로 빛 가운데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두 가지 오류가 교회 역사에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어둠의 영역에 거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이제 어떻게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해 속세를 떠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세상을 떠나 모든 시간을 하나님과 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비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직접 찾아야만 하므로 지금 당장 속세를 떠나 살자 여기에서 신비주의 운동과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두 번째 오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며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란 식의 행위를 통한 칭 의 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으심을 믿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것도 구원과 관련 시켜서는 안 됩니다. 행함과 관계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신칭의와 행위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정죄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는 마음가짐과 하나님이 빛 가운데 거하시듯이 빛 안에서 행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동원하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않는 자처럼 산다는 것은 그 믿음은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어둠에 거하시면서 입술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뿐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골백번 해도 그 믿음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회개가 참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단순한 지적 동의와 참된 믿음을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단지 머리로 즉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행위로 그 믿음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말은 회개와 죄 된 생활로부터 성결한 생활로 이전하는 것입니다. 이 삶이 참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빛 가운데 거하시듯이 우리도 빛 가운데 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불완전하면 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과 같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물론 나도 그들과 한가지로 여러 면에서 죄 된 자이지만 본질에서 그들과는 다릅니다. 라고 감사하게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실수를 범하는 것을 보게 되면 저런 그리스도인 좀봐 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봤자 별것 아닌 것을 입증하듯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들이 행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바로 그들이 어떠한 왕국 즉 하늘나라에 속해 있느냐가 그것을 결정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느냐 아니며 사탄의 나라에 속하느냐? 이것이 그리스도이냐 불신자냐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인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죄의 고백입니다.

8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 외양간 우리 죄를 사하시며......”왜 우리가 죄를 고백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사귐 즉 교제를 방해하고 무너뜨리는 것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빛은 언제나 어둠에 숨겨진 것들을 들추어냅니다. 우리가 죄를 직시하는 것을 피한다면 그 말은 우선 적으로 빛을 회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빛 되신 하나님이 들추어내시는 죄악을 숨기고 대면하는 것을 피한다면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는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죄를 고백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말은 성령을 거스른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감추어진 죄악들을 빛으로 인도해 주시고 그 죄악들을 정죄하며 그런 죄악들을 범하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말은 우리 자신에 대해 정직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정직할 수 있겠습니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니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길 수 없는 자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다면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그는 모든 사람에게 거짓되다. ”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이 참되면 어떠한 사람에게도 거짓이 될 수 없습니다. 또 한 내가 지은 죄악들을 외면하려는 것은 빛을 싫어한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듣기는 원하지만, 복음의 빛을 싫어한다면 어떻게 빛 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요? 죄에 대한 고백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것은 빛의 사역 즉 성령의 사역을 언제나 수용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살피게 허용함과 동시에 거기서 들추어지는 모든 잘못된 부분에 대해 방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면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죄를 세세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한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그냥 나는 죄인입니다. 한 번도 내가 성자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고백은 구체적인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특정한 죄악들에 대해 세세하게 하나하나 이름을 대면서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도맷값으로 묶어 넘겨서는 안 되며 부인해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하며 주목해야 합니다. 또 한 우리의 죄악을 가능한 한 빨리 대충 넘어가게 해서도 안 됩니다. 고백은 우리가 지은 죄들과 우리가 행한 좋은 일들의 거울이신 하나님 즉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조명하게 해서 우리가 저지른 못된 것들을 보면서 비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됨됨이와 저지른 일들을 정직하게 직시하면서 하나님께 구체적인 단어들을 사용해서 고백해야만 하는 것이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을 자신에게 자백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어떤 사람들은 죄에 대한 고백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빛 가운데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한 사도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하나님과 사귐과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고 손해를 입혔다면 변상을 해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가 죄를 언제나 모든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죄는 하나님께 고백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악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마치 다윗이 시 32편에서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열어서 내려놓았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죄악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말씀드리며 있는 그대로 벌거벗어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비해 놓으신 크고 영광스러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내 죄악을 보고 인식할 때 우리의 죄악에 대해 정죄받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본성의 빛이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 보이실 때 우리는 고백해야만 됩니다. 우리는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고 인정하고 그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깨끗이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한 번도 죄 안 지은 것처럼 십자가 보혈의 피로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고백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더 깊어지고 성령님과의 친밀한 동행의 걸음이 계속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