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love 2022. 11. 20. 15:30

1. 본문: 8:1-11

2. 명제: 율법적인 사람은 사람을 죽이지만 은혜적인 사람은 사람을 살린다. (비교적 명제)

3. 제목: 감사, 감사, 감사

 

갈등

어느 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신 예수님 앞에,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런 여자는 돌을 던져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실상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 무엇을 쓰기 시작하십니다. 어떻게 할까요?라고? 계속 재촉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다 떠나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너를 정죄하던 자가 없느냐? 여자가 없다고 하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율법적인 사람이요. 다른 한 사람은 죽어가는 한 여인을 살리신 은혜로우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율법적인 사람과 은혜적인 사람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2. 갈등 심화

예수 선생! 모세 율법에 따르면 이런 여자는 돌을 던져 죽이라고 했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약 성경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22: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그런데 이상한 점은 구약 율법은 간음한 남녀를 다 죽이라고 했는데 여자만 잡아 왔습니.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요? 이들은 율법을 사랑하는 의로운 사람들 같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율법을 이용하고 있었을 뿐임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식민지였기 때문에 유대 법은 신성 모독죄를 제외한 어떤 죄인도 사형 선고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재판권은 로마 총독의 소관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대로 돌을 던져 죽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로마법을 어긴 살인교사죄로 로마 법정에 고발할 것이고, 죽이지 말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불의한 자라고 유대 법에고발할 작정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게 곤경에 빠뜨려 죽이고자 율법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 자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거울을 보고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음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율법의 기능은 몽학 선생 즉 가정교사와 같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죄 씻음을 주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을 이용하는 율법적인 사람이 문제입니다. 율법적인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는데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남을 잘 정죄합니다. 예수님 당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교만과 영적 무지가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판단하는 자리에까지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합니다.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 가운데, 아니 우리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남의 허물을 잘 지적하고 판단하며 재판하는 율법적인 사람이 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율법적인 사람은 사람을 살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사람을 만나며 사람이 힘을 잃고 사람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정죄하기에 빠릅니다. 율법적인 사람과 은혜적인 사람과의 또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죽음 앞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자를 가르키면서 예수 선생! 이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칠까요? 말까요? 이때, 예수께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들은 이제야말로 예수를 죽일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예수 선생! 어떻게 할까요? 어찌할까요? 그렇다면 이 위급한 순간에 과연 예수님은 땅에 무엇을 쓰고 계셨을까요? 물론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기에 추정만 할 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지금 흥분하고 있는 유대인을 진정시켜 위기의 순간을 피하고자 시간 벌기 목적으로 무엇을 쓰고 계셨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어쩌면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 네 이웃의 아내나 네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 을 쓰고 계셨을 것으로 보고 있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침묵하시던 주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조용하시면서도 아주 확신에 찬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천둥과도 같았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현장에 있었던 모든 자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둘씩 빠져나가 오직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는 말을 듣는 순간 거울 앞에 자신들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처럼 온갖 죄가 다 떠올랐을 것입니다. 원래 율법에 따르면 고소한 자가 먼저 돌을 던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죄로 드러나면 고소한 자는 똑같이 벌을 받게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향해 너는 죄인이기에 죽기에 맞당하다고을 들고 위협하고 있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일 먼저 핫바지 방귀 세듯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죄가 많은 어른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젊은이 마저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치라고 말씀하시자 9그 말씀을 듣고 양심이 찌려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선 여자만 남았더라 모든 인간이 다 죄인임이 폭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이 죄인을 정죄할 수가 있습니까?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이런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고 남을 정죄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와 사회 갈등의 큰 원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 사회는 끊임없이 갈등과 분쟁으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과연 해결책이 있을까요? 그러나 여기 분명한 해결책이 보입니다. 9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선 여자만 남았더라 여기 죄인인 한 여인이 서 있고 그 옆에는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 주님이 이렇게 여인에게 묻습니다. 10~11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3. 전환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심으로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항의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기 위해 오셨음을 아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는 죄인을 살리기에 빠릅니다. 예수님은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자들은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할 자가 없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만이 죄인을 정죄할 자격이 있으십니.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어 인생을 살리시기 위해 오신 온 세상의 구세주이십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대속물이란 희생 제물이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인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제사장 앞에 희생 제물을 가져갔습니다. 자신들의 형편에 따라 비둘기, , 염소, 등을 가져가면 제사장은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와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죄인의 죄를 이 짐승에게 전가해 주옵소서. 그래서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짐승을 죽여 피를 뿌립니다. 이 짐승은 죄인을 대신해서 죽은 희생 제물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큰 죄인이라도 자신을 찾아오는 죄인을 쫓아내지 아니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의 크신 은혜 때문에 그분을 믿는 우리도 살아났습니다. 또한, 기 주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십시오. 고소하는 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말씀 한마디로 입을 막아 버린 이 놀라운 지혜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이 없다고 우리는 감탄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을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이 여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온갖 죄 사슬에 묶여 마귀의 종살이하는 뭇 인생을 구원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주님이 죄인을 대신하여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자 십자가를 졌습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주님은 이 여인에게 이렇게 복음을 전합니다, 11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주님은 죄인을 정죄하시기 위해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린다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죄인을 대신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정죄 받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당시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사형법으로 로마 제국 시민권자들에게는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이 형벌을 행하지 않았고, 로마 제국을 반역한 가장 추악한 죄수들에게 이 형벌을 집행했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이 이런 부끄럽고 추악한 불명예스러운 형법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고 믿는 우리에게 주님의 의를 전가해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입니다. 나는 이처럼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죽기까지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실패한 너를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잇습니다. 11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 죄가 이 여인의 삶을 망가뜨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여인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 연인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이 여인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나는 이제 끝났다. 체념, 포기, 절망의 그 순간에 주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자신을 용서하시는 그 주님 앞에 이 여인은 엎드려 감사, 감사,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녀를 다스려 참으로 죄를 이기는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변화시키지 못할 자는 없습니다. 거룩한 심판 자이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대신하여 참혹한 심판을 받으심으로 또한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신 그분의 순종의 결과 그분의 의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습니까? 추수 감사절을 맞이해서 무엇이 진정 감사 거리입니까? 모든 것이 감사 거리이겠지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주님의 용서를 통하여 영생을 소유하게 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가장 큰 감사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멘!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주님을 떠난 본문의 많은 무리를 보고 안타까움이 앞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주님 앞에 와서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구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서도 죄를 짓고 무서워서 나무 뒤에 숨었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이들에게도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찬송가 537 형제의 지체 말라 왜 거기서 방황하나 그 은혜를 입은 자 중에 주 너희를 두시려네 오라 오라 지체 말고 오라 오라 오라 지체 말고 오라. 숨지 마시고 나와야 삽니다.

 

4. 대단원

어떻게 우리도 예수님처럼 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해답은 내 안에는 없고 주님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 주님의 크신 사랑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철저히 외면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별수 없는 죄인인 나를 긍휼로 대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무자비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함부로 나를 판단하시지 않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이로부터 짐승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나 같은 죄인도 은혜받으면 언젠가는 변화될 것을 기대하면서 비참하게 버려졌습니다. 주님은 나를 오래 참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7000번이라는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관대하시기 위해 자신은 잔인한 십자가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실패한 나 대신 하나님의 모든 의로운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크신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따뜻하고 평화가 넘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 주제는 율법적인 사람은 사람을 죽이지만 은혜로운 예수님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도 예수님처럼 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이 나 대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다 이루셨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고 믿으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능력이 우리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 주의 은혜를 이 연약한 저에게도 충만히 채워 주소서, 그리하여 나를 통해 주님이 많은 약한 자를 살리시는 구원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