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love 2022. 12. 11. 16:12

1. 본문: 요일 3:16-18

2. 본문 요약: 사랑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

3. 본문 주제: 사랑

4. 본문 테마: 사랑의 본질

5. 명제: 사랑은 행함으로 그 진실성은 드러냅니다.(선언적 명제)

6. 목적: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상고하여 행함으로 사랑을 표현하도록 돕기 위해서

7. 질문 제기: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8. 전환 문장: 사랑은 행함으로 그 진실성은 드러냅니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9. 대지

10. 제목: 행함으로 사랑하라

 

갈등

형제 사랑에 대한 적용 단계에 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요한 사도는 왜 우리는 형제 사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지 좋아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본능적인 그리고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육체적인 것이지 이성적인 것은 아닙니다. 좋아하는 상태는 어떤 사람에 대한 관심이 간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그 사람에게 어떤 특성이나 삶에 관한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좋아하는 것은 인격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외적인 것들 즉 외모나 색깔이나 기질이나 행동 태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어야 합니다. 성경이 사랑하는 방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사랑한다는 단어가 오용 또는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형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에 비추어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이성적입니다. 사랑은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것을 뛰어넘는 것이며 육감적이고 육신적 매력을 초월해 좀 더 크고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적인 것을 넘어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의 본질적 부분입니다. 사랑은 장애물을 넘어 서며 핑계를 극복합니다. 이런 정의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인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추하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넘어 들어옵니다. 사랑은 지극히 영적이며 이성적이며 깊이 생각하는 것이며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것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영적이며 이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이어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발전한 정의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좋아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동물적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은 동물적인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 중에는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매력이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라는 말은 마치 그들을 좋아하는 것과 똑같이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좋아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싫다고 그대로 표현해 버리고, 그 이상의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를 봅니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 점을 눈감아 주려하며 그러한 자를 도와 주려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이 강조하는 점을 보면 먼저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6절의 이로써 사랑을 알고를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고 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여기에서 우리는 이론으로만 남아 있는 사랑의 위험성을 볼 수 있습니다. 믿는 것에 대해 그저 생각만 하고 느끼기만 하며 표현만 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주일날 교회 안에서 형제 사랑을 생각하며 느낍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나가서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교회 밖에서 무엇인가 우리를 귀찮게 구는 것이 있으며 사랑의 감정으로부터 떠나 실패자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 요한이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잘못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내용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만을 가지고 사랑할 수 없는 면이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도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방하고 서로에게 가혹해질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수록, 우리는 생각으로만 사랑하면서, 생활에서는 실패하는 자들이 아닌지를 더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런 성경의 경고를 명심하면서 행동으로 옮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주여 주여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지 아니했습니까? ”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7: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서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두 종류의 집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시면서,, 하나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고 또 하나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집을 반석위에 짓는 자들로서 바람이 불고 홍수가 몰아쳐도 견뎌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참으로 기가 막히고 훌륭한 말씀이다. ”라고 반응하면서도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모래위에 집을 지은 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집은 단단하지 못해 바람과 홍수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행함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열 처녀 비유입니다. 다섯 명의 지혜로운 처녀와 다른 다섯 명의 미련한 처녀에 관한 내용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특히 땅속에 자신의 달란트를 묻어 둔 사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신의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요청받은 것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는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염소로 비유된 자들은 정죄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어려울 때 그리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나를 위해 너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라고 반문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이 비유들 역시 사랑의 감정만으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가르침으로 만족해하는 자들에 대한 엄한 교훈입니다. 성경을 보면 혼돈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이 영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행동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쪽을 따라가야 합니까? 고전 13장을 보십시다. 여기서는 영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3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선한 일들을 하며 행동으로 옮기고,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며 실천하는 훌륭한 자들도, 영적으로 동기 면에서 잘못되었으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말씀에는 오직 행동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행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14:21-24절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사람이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와 같습니다. 주님은 이것이 바로 테스트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또는 성화 앞에서 어떤 신비적 상태에서 시간만을 보내는 것들이 사랑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 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둘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3. 전환

여기에서 사랑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랑에 대해 막연하게 감상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누가복음 7장에서 확실히 보여 줍니다. 주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주님이 식탁에 앉아 계실 때 한 부도덕한 여인이 와서 주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어 주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줍니다. 그리고 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이 때 바리새인이 이 여자를 향해 왜 쓸데없는 짓을 하며 돈을 허비하느냐라고 비웃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시몬아 사랑이란 그 사랑 자체의 특성으로 저절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랑은 특성상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어 있다. 이 자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발을 씻어 주고 닦아 주고 값비싼 향유를 부어주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표현이 없다면 그곳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주님이 마 18장에서 자신의 주인에게 많이 탕감받은 자가 자기 친구에게는 탕감하지 않고 오히려 심하게 구는 무자비한 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리라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은 우리가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해 용서 받았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믿는 자들은, 그들의 가슴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며, 그들 가운데 있는 사랑이 저절로 나타나는 사람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용서 하지 못하는 자들은 용서를 받아 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용서를 받아 본 자들은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자신들이 철저하게 깨어졌기 때문에 남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신약 성경은 막연하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까? 또는 다음과 같은 권면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가운데 머물러 계신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 안에 있다면 당신은 형제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스스로 나타나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적극적이고 역동적입니다. 만일 우리의 사랑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래서 그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 을 닫아버린 무자비한 종의 예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세상 물질을 많이 가진 자들이 있는데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가 아주 궁핍한 것을 보면서도, 전혀 마음에 불쌍한 생각조차도 갖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아름다운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전혀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다면 궁핍한 형제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4. 대단원

마지막으로 요한은 당당한 어조로 16절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여기에 관한 바울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완벽한 삶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그분이 우리의 곤경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 가운데 바로 그러한 연민의 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비참함과 곤경과 문제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상태를 보시고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분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권한이 있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권한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아버지와 동등한 자이며 영원한 영광을 공유하는 영원한 자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그분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으며 우리를 생각한 나머지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만 생각했으며 우리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구원받는 것에만 신경을 쓰셨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말구유에 태어났으며 목수로 일했으며 죄인들의 죄악들을 참아내셨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분은 자신을 낮추고 낮추시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우리의 필요 외는 다른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소망 없음과 절망스러운 상태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행하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그와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라는 구절에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고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확신합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나아갑시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