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부 하나님 1
1. 본문: 눅 15:1-3, 11-32
2. 본문 요약: 둘째 아들이나 첫째 아들 모두 다 아버지 앞의 불효자였다.
3. 주제: 탕부 하나님
4. 테마: 탕부 하나님 아버지의 무모한 은혜
5. 명제: 탕부 하나님 아버지의 무모한 은혜는 모든 죄인을 다 받아 주실 수 있다. (가능성의 명제)
6. 목적: 탕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 어떠한지를 소개하여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하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서
7. 질문제기: 탕부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하며 반면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8. 전환 문장: 탕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은혜는 모든 죄인을 다 받아 주실 수 있다. 탕부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하며 반면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9. 대지
10: 제목: 탕부 하나님,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
1. 갈등
이 설교 말씀은 유명한 팀 겔러 목사님의 글 ” 탕부 하나님 “을 참고하여 앞으로 몇 주 시리즈로 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 ”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흔히 '탕자’(蕩子)로 번역되는 문구의 형용사 'prodigal'은 '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비유 속의 둘째 아들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수식하는 말로도 어울립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따지거나 그에게 죄의 책임을 돌리거나 응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이런 반응을 못마땅해했습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를 상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5:19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라고 썼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탕부'(蕩)이십니다. 하나님의 무모(한)한 은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요,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며, 이 말씀의 주제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 비유를 읽을 때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 즉 '탕자'에게 집중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야기의 진정한 메시지를 놓칩니다. 두 형제가 각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다른 길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길도 양쪽이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앞서 우리는 저자 누가가 제시한 역사적 배경부터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누가가 15장의 첫 두 구절에 밝혔듯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우선 1절 " 세리와 죄인들 ”이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는 둘째 아들은 성경의 도덕법도 준수하지 않았고, 종교적 유대인들이 따르던 규율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동생처럼 그들도 사회와 가정의 전통 윤리를 버리고 집을 나가 허랑방탕했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청중은 비유 속의 '형'으로 대변되는 2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입니다. 그들은 자라면서 배운 전통 윤리를 고수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그대로 순종하며, 충실히 예배하고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두 번째 부류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예로부터 교회에서 이 본문을 가르칠 때면, 아버지가 회개하는 둘째 아들을 거저받아 준다는 데 거의 전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든 하나님이 늘 사랑으로 받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비유를 감상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타이르시는 대상은 부도덕한 둘째 아들이라기보다 도덕적인(율법적인) 첫째 아들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눈멀고 편협해 스스로 의로운 줄로 알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영혼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삶까지도 멸망에 빠뜨리고 있음을 보여 주려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주로 동생들에게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을 확신시켜 주려고 이 이야기를 하셨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동생의 해로운 자기 중심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형의 도덕주의적 삶도 가차 없이 질책합니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사람이나, 종교를 등진 사람이나 둘 다 영적으로 잃어버린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교회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고 탄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비유에 나오는 ‘형’ 부류의 사람들과 '동생' 부류의 사람들은 양쪽 다 같은 교회 안에 함께 있습니다. 같은 사회 안에 있고, 종종 한집안에도 있습니다. 어느 집이든 대체로 맏이는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하고, 책임감 있게 부모의 기준에 따릅니다. 동생은 반항하는 경향이 있어 차라리 자유인이 되어 친구들 틈에서 인정받으려 합니다. 맏이는 자라서 전통적인 직장을 잡고 부모의 근처에 정착하지만, 동생은 비록 허름한 월세방에 살지라도 집에서 멀리 떠나 화려한 도시에서 삽니다. 요즘은 종교가 없거나 아예 종교를 배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도덕적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것이라고 여기는 그들은, 타인의 삶에 대한 도덕적 권위를 주장하는 개인이나 기관을 무조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의 편일까요? 그분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의 편도 아니고, 종교적인 사람들의 편도 아니지만, 종교적 도덕주의를 특히 치명적인 영혼의 병으로 꼽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종교에 충실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로 여겼지만, 종교나 도덕을 준수하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그분께 매료되고 마음이 끌렸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신약의 전체 기사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반면 '형' 부류의 사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위가 높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마 21:31절"21:31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을 항상 끌어들인 반면, 당대의 종교적이고 성경을 믿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대체로 그런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끌렸던 분류의 소위 세리와 죄인들이 현대 교회에는 끌리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가 종교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2. 갈등 심화
예수님의 이야기는 먼저, 둘째 아들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12절"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를 들은 최초의 청중은 이런 요구에 경악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죽으면 맏아들은 다른 자녀보다 두 배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상속자가 둘이면 재산의 3분의 2는 맏이의 차지가 되고 나머지 3분의 1은 둘째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유산의 분배는 아버지의 사후에만 이루어졌습니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지금 달라고 한 것은 지극히 무례한 행위였습니다. 아버지 생전에 유산을 구한다는 건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한마디로 둘째 아들의 말은, 자신은 아버지의 재산만 원할 뿐 아버지는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여태 그에게 아버지란 유산을 물려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는데, 이젠 그 관계마저도 지겨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는 아버지를 감히 찾아가서 " 이제 내 몫을 넘겨주시지요 ”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반응은 아들의 요청보다 더 충격적입니다. 당시는 고도의 가부장 사회였으므로 어른들, 특히 부모에게 품는 경의와 존경이 더없이 중요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중동의 전통적인 아버지가 의당 보일 반응이란 아들을 호되게 혼낸 뒤 집안에서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러기는커녕 그냥 눅15:12절"15:12절"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 "습니다. 이 의미를 이해하려면 본문에 " 살림 "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비오스'가 본래 '생명'을 뜻한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이 아버지의 재산은 주로 부동산이었을 테니 순 자산의 3분의 1을 떼어 내려면 보유한 토지의 상당량을 팔아야 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의 정체성 자체가 장소와 땅에 매여 있었습니다. 땅 일부를 잃으면 곧 자아의 일부를 잃고 지역사회 내에서 지위가 뭉텅 잘려나갔습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둘째 아들이 요구한 것은 아버지 목숨을 찢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해 그대로 해줍니다. 이 아버지는 사랑을 거부당한 고통뿐 아니라, 처참한 명예 훼손까지 참고 견딥니다. 대개 우리는 사랑을 거부당하면 화가 나서 복수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을 줄곧 사랑하며 괴로움을 견딥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전환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빼앗은 재산을 가지고 13절“먼 나라"로 가서 고삐 풀린 생활방식으로 전 재산을 날립니다. 자기 신세가 말 그대로 돼지와 같아지자 그는 17절" 스스로 돌이켜 "혼잣말로 계획을 짭니다. 첫째로, 아버지에게 돌아가 자신이 죄를 지어 아들의 자격을 잃었음을 자인합니다. 둘째로, 염치 불고하고 아버지에게 19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부탁합니다. 종은 주인집에 살면서 일했으나 “ 품꾼은 인근 마을에 살면서 품삯을 벌던 각종 상인과 노동자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하려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 아버지, 제가 다시 집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에 저를 도제로 붙여 주신다면 일을 배워 품삯을 벌어서 조금이나마 빚을 갚겠습니다. "이것이 그의 계획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염치를 불고하고 대면할 준비를 마치고 일어나 귀향길에 오릅니다. 둘째 아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갑니다. 그렇습니다, 달려갑니다! 대체로 중동의 기품 있는 가부장은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이처럼 겉옷을 들춰 올려 다리의 맨살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렇게 합니다.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틀림없이 아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당황해서 앞으로의 계획을 주섬주섬 늘어놓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말을 막습니다. 오히려 “ 빨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라 "라고 종들에게 명합니다! 그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이라면 아버지의 옷이었을 테고, 이는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었다는 확실한 증표입니다. 아버지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 나는 네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거다. 뼈 빠지게 노역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네 힘으로 자격을 얻어서 이 집안에 다시 들어오는 게 아니다. 내가 그냥 너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해 축하연을 열어 23절“ 살진 송아지 ”를 내놓게 합니다. 당시에는 고기 중에도 살진 송아지보다 더 비싼 건 없었습니다. 이 정도의 잔치는 가장 기쁜 일이 있을 때만 벌어졌을 테고 필시 온 마을 사람들이 초대되었을 것입니다. 어느새 말이 퍼져 나가 금세 잔치의 흥이 무르익고 풍악과 춤까지 곁들여졌습니다. 이 모두가 가정과 지역사회로 살아 돌아온 둘째 아들을 환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그 어떤 죄나 허물도 다 사면해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든 상관없습니다. 고의로 사람을 괴롭히거나 심지어 살해했어도 상관없고 자신을 지독히 학대했어도 상관없습니다. 동생은 아버지 집에 17절" 양식이 풍족한 "줄은 알았으나 이제 은혜도 풍족함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사랑으로 용서하고 덮지 못할 악은 없고, 아버지 은혜에 맞먹을만한 죄는 없습니다.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시듯이 아버지가 사랑으로 아들을 끌어안은 시점은 아들이 개과천선을 입증하기 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회개의 대사조차 다 읊기 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 어떤 공로나 뼈저린 참회로도 얻어 낼 수 없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수용은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어떤 주 석가들은 이 비유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다고 결론짓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보라, 속죄가 언급되지 않았다. 구주가 십자가에서 죗값을 치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보편적인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모든 사람을 수용하신다. "메시지가 그것이었다면 예수님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지가 그게 아니기에 그분은 여기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보여 주었다면, 뒤에서는 그 은혜의 값비싼 대가와 이 이야기의 참된 절정을 보여 줄 것입니다. 한편 형은 종들에게서 동생이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신분을 회복해 주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분노합니다. 이제 그가 아버지를 욕되게 할 차례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베푼 어쩌면 가장 큰 잔치이자 공적인 행사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문밖에 남아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불평하며 불신임의 표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들어가자고 타일러도 그는 한사코 거부합니다. 맏아들이 이토록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특히 이 모든 일에 뒤따를 손해 때문에 속이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29절“ 나한테는 염소라도 주어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어떻게 감히 그놈에게는 송아지를 주십니까? "동생을 도로 집안에 들임으로써 아버지는 그를 다시 상속자로 삼아, 이미 확 줄어든 가산의 3분의 1에 대한 권리를 주었습니다. 형의 계산으로는 이는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 나는 죽도록 일해서 내 몫을 벌었지만, 그는 한 일이 없으니 번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쫓겨나 마땅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에게 돈을 퍼 주시니 도대체 정의는 어디로 간 겁니까? "그래서 형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권리가 있습니다! 이번 일에 나도 의견을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아버지 혼자 일방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실 권리는 없습니다. 이렇듯 형은 홧김에 아버지를 무례하게 대하기까지 합니다. " 존경하는 아버지여 "라 하지 않고 그냥 29절 NIV 성경에“Look, 보소서! ”라고 합니다. “ 이거 보세요! "와 같은 말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들이 아버지의 치부를 다 폭로해 평생의 이력과 명예를 짓밟는 것과 같습니다.
4. 대단원
맏아들의 공공연한 반항에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 시대 남자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부자의 연을 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이번에도 놀랍도록 자애롭습니다. 31절“ 아들아 ”(my son)라고 그는 말문을 엽니다. “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욕되게 했다만, 나는 너도 잔치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나는 네 동생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널 버릴 마음도 없다. 내 말대로 자존심을 버리고 잔치에 들어오너라. 선택은 네 몫이다. "이 집안은 결국 사랑으로 다시 뭉칠까요? 두 형제가 화해할까요? 이 너그러운 아버지의 제의에 형의 마음이 누그러져 아버지와도 화해할까요? 그러나 예수 님의 비유에서 분명한 명제는 둘째 아들이나 첫째 아들은 다 아버지 앞에 불효자식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세상 인간은 하나님 앞에 다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을 무조건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허랑방탕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 그를 무조건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까요? 그러나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습니까? 이 하나님 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깨닫습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힘이 일어납니까?? 이 사랑에 감동하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면서 살고자 하는 것이 맞당한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