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love 2023. 3. 5. 15:02

1. 본문: 눅 15: 28-32

2. 본문 요약: 방탕한 둘째 아들도 죄인이었으며 도덕적인 형도 죄인이었습니다.

3. 본문 주제:

4. 본문 테마: 죄의 정의

5. 명제: 죄란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이다.(선언적 명제)

6. 목적: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서 복음의 의미를 깊이 영접하도록 돕기 위해서

7. 질문제기: 죄란 무엇인가?

8. 전환 문장: 죄란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이다. 죄란 무엇인가?

9. 대지

10. 제목: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갈등

비유에 나오는 두 형제를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 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도덕적 순응의 길이고, 또 하나는 자아 발견의 길입니다. 둘다 그 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틀입니다. 비유 속의 형은 도덕적 순응의 길을 대변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로되 그 신분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복과 최종 구원을 받으려면 성경에 엄격히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행복을 얻고 세상을 바로잡는 길은 올바른 도덕성을 갖추는 것뿐이었습니다. 비유 속의 동생은 자아 발견의 길을 대변합니다. 이 틀의 주장대로라면 개개인은 관습과 인습을 초월해 자유로이 각자의 목표와 자아실현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전통, 편견, 위계적 권위 등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벽이 약화되거나 제거될 때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도덕적 순응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전통과 공동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자아 발견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 무엇이 내게 옳고 그른지를 정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서 거기서 나의 참 자아와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 "서구 사회는 뿌리 깊게 이 두 접근으로 양분되어 있어 누구도 그 외의 삶의 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도덕적으로 순응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제멋대로 구는 부도덕한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다. 해답은 도덕적인 사람들에게 있다. "자아 발견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 진리가 우리에게 있다라고 말하는 완고한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다. 해답은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있다. "양쪽 다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의 길이 곧 세상을 바로잡는 길이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둘 중 하나의 범주에 속한다고 결론지어야 할까요? 수많은 사람이 기질상 도덕적 순응의 삶이나, 자아 발견의 삶중 한쪽으로 끌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왔다 갔다 하는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의 시절에 따라 이쪽 전략을 시도하다가 저쪽으로 넘어갑니다. 한 성격 안에 두 접근이 공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전통적인 형이지만, 동생처럼 처신하는 비밀 생활을 배출구로 유지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담긴 메시지는 양쪽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다른 대안이 비유 속에 예시됩니다. 예수님이 둘째 아들을 통해 묘사하신 죄는 누구나 수긍할 만한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집안을 욕되게하며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완전히 통제력을 잃고, 하나님을 대변하는 비유 속의 아버지와 멀어집니다. 그러나 초점은 맏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철저히 순종했고 유추컨대 하나님의 명령에 다 순종한셈입니다. 그는 대단한 극기로 자신을 완전히 통제합니다. 두아들을 보통 기준에서 보면 하나는 '못됐고' 하나는 '착하지만아버지와 멀어져 있기는 둘 다 똑같습니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둘 다 사랑의 잔치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비유 속의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못된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는데 착한 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은 구원받는데 여전히 잃어버려진 상태입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바리새인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여태까지 그들이 배웠던 모든 내용이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습니다. 형은 왜 들어가지 않습니까? 자신이 직접 이유를 밝힙니다. 15:29 내가,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형이 아버지의 사랑을 잃고 있음은 착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아버지를 갈라놓은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이력에 대한 교만 때문입니다. 그를 아버지의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게 막는 건 그의 악이 아니라 의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답은 두 형제의 마음과 그것으로 대변되는 두 삶의 길이 언뜻 달라 보이나 몹시 닮았다는 데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삶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유산의 지분에 대해 아버지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게 못내 싫었습니다. 스스로 결정해 자기 몫의 재산을 마음대로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어떻게 이루었습니까? 대담한 강공 작전을 폈습니다. 지역사회의 규범에 보란 듯이 저항해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맏아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잘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그가 원한 것도 동생과 똑같았습니다. 그도 동생 못지않게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었습니다. 그도 아버지보다 아버지의 재물을 원했습니다. 다만 동생은 멀리 떠난 반면, 형은 옆에 남아 명을 어김이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는 방식만 달랐습니다. 형은 무언으로 요구했습니다. “ 나는 아버지께 불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내 인생의 모든 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셔야 합니다. 두 형제의 마음은 똑같았습니다. 둘 다 아버지의 권위를 못마땅해하며 거기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둘 다 아버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두 아들 모두 반항했습니다. 방법상 하나는 아주 못되게 굴었고, 또 하나는 지극히 착했을 뿐입니다. 둘 다 아버지의 마음을 멀리 떠난 잃어버린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고 계신지 이제 알겠습니까? 두 아들 중 누구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둘 다 아버지를 이용해 자기들의 이기적인 목표를 이루려 했을 뿐이지, 아버지를 사랑해서 즐거워하고 아버지를 위해 섬긴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반항해 그분과 멀어지는 길이 두 가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는 그분의 규율을 어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규율을 열심히 지키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힘써 순종하는 게, 오히려 그분께 반항하는 하나의 전략이 될 수도 있다니!

 

3. 전환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정의합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입니다.’ 그분이 알려 주지 않으시면 우리 중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하나님의 행동 규범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주로서의 예수님의 도움을 피하려면 모든 도덕법을 지키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권리'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기도 응답, 행복한 삶, 사후의 천국입장권을 주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값없는 은혜로 당신을 용서해 줄 구주는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구주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이것이 비유 속 형의 태도입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그토록 노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는 집안의 옷이며 반지며 가축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개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엄격한 윤리와 경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합니다. 당신도 하나님께 순종해 착한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이유로, 그분이 당신에게 복과 도움을 베푸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당신을 돕는 자 내지 감화를 주는 모본은 될지언정 당신의 '구주'는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 구주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행동의 틀은 두 형제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만, 이면의 동기와 목표는 같습니다. 방식만 다를 뿐 둘 다 자기 마음속에서 집착하고 있는 목표물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줄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재물이라 믿습니다. 이야기의 끝에 맏아들에게 아버지를 참으로 기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잔치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노하여 거부하는 것으로 보아 한번도 아버지의 행복이 그의 목표였던 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의 신분을 회복시키자 자기 유산의 지분이 줄어든 형은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는 갖은 수를 써서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상처를 입힙니다.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당신의 모든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에서 젊은 살리에리가 하나님께 벌이는 흥정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살리에리는 소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오만한 기도를 몰래 올리곤 했습니다. “ 주여, 저를 위대한 작곡가가 되게 하소서 음악으로 주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고 저도 칭송받게 하소서! 사랑하는 하나님이여, 제가 온 세상에 유명하게 불멸의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가 죽은 후에도 제작품이 사랑받고 제 이름이 영원히 회자되게 하소서! 그 대가로 저는 주께 제 순결과 근면함과 가장 깊은 겸손과 삶 전체를 드리겠나이다. 또한 사람들을 최대한 돕겠나이다. 아멘, 또 아멘! "처음에 살리에리는 이 맹세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여자들을 건드리지 않고, 열심히 음악을 공부하고, 많은 음악인을 무상으로 가르치고, 빈민을 줄기차게 도왔습니다. 자신의 길이 음악 쪽으로 잘 풀리자 그는 하나님이 거래 조건을 잘 지키시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때 음악적인 재능이 살리에리보다 훨씬 뛰어난 모차르트가 등장합니다. 그의 천재성은 하나님이 부여하신게 분명합니다. 모차르트의 중간 이름인 " 아마데우스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속된 방종을 일삼는 '동생'입니다. 하나님이 모차르트에게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부어주신 재능은 살리에리의 마음속에 신앙의 위기를 촉발합니다. 살리에리의 말은 비유 속 형의 말과 비슷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재능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려고 본능적 욕망마저도 다 물리치고 있었건만, 모차르트는 온갖 방종을 일삼는데도 아무런 징계가 없다니! 결국 살리에리는 하나님께 이제부터 당신과 나는 서로 적입니다 라고 말하고는 그 뒤로 어떻게든 모차르트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살리에리는 순결과 자선에 부지런히 힘썼으나 결국 그것은 지독한 사욕의 산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빈민은 유용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돈을 희생한다고 되뇌었지만 사실 희생은 없었습니다. 다 자신을 위한 일이었고 명성과 큰돈과 자존감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살리에리는 " 모차르트 그 자가 나타나고부터 나 자신이 싫어졌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빈민을 섬겼어도 그는 그토록 탐하던 영광을 얻지 못했고, 이를 깨닫는 순간 마음에 살기를 품었습니다. 점잖고 도덕적인 살리에리가 속되고 부도덕한 모차르트 보다 더 큰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종교와 담을 쌓은 사람은 모차르트지만, 결국 하나님과 훨씬 더 멀어진 쪽은 독실한 살리에리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와 같습니다. 형이 하나님께 순종한 건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얻으려고, 즉 그분을 닮고 사랑하고 알고 즐거워하려고 순종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동생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스스로 옳고 그름을 정한다지만,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구주와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여기 우리 죄에 대한 예수님의 재정의가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죄를 일련의 규범을 어기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덕적 비행을 사실상 하나도 범하지 않은 사람도, 가장 방탕하고 부도한 사람 못지않게 영적으로 철저히 잃어버려진 상태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왜 그럴까? 죄란 단순히 규범은 어기는 게 아니라, 구주요 주님이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몰아내려던 두 아들처럼 말입니다. 그분의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한 게 아니라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빚을 지워 그분을 통제하려 함으로써 그는 스스로 자신의 구주로 행세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구주와 주인이 되는 길은 두 가지가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도덕법을 어기고 자기 기준대로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도덕법을 지켜 극도로 착해지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도덕적인 착한 사람들과 부도덕한 나쁜 사람들로 가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시듯이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력 구원 사업에 몰두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용해 스스로 권력과 통제력을 거머쥐려 애습니다. 방법만 다를 뿐입니다.

 

4. 대단원

그러나 두 아들 모두 틀렸는데도, 아버지는 둘 다 소중히 여겨 사랑의 잔치 속으로 불러들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종교나 무종교, 도덕이나 부도덕, 도덕주의나 상대주의, 보수나 진보가 아닙니다. 영극단 사이의 중간 어디쯤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두엇입니다. 복음은 앞의 두 접근과 구분됩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으나 모든 사람이 사랑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불러 그 사실을 인식하게 해서 변화시킵니다. 반면에 형 부류의 사람들은 세상을 둘로 나눕니다. " 우리처럼 착한 사람들이 실세이고 나쁜 사람들은 퇴물이다. 세상의 진짜 문제는 후자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동생 부류의 사람들도 똑같이 말합니다. 아니다, 넓은 마음으로 관용하는 사람들이 실세이고 옹졸한 고집불통들은 퇴물이다. 세상의 진짜 문제는 후자다. “그러나 예수님은 눅 18:14절에서 겸손한 사람들이 실세이고 교만한 사람들은 퇴물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별로 선하지 못하거나 마음이 넓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쪽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자신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아는 게 선결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대로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138:6“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돌보시며 교만한 자들을 멀리하신다 "두 아들 모두 틀렸고 모두 사랑받았으나, 이야기는 서로 다르게 끝납니다. 왜 하나는 구원받고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지만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할까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력 구원 사업은 둘 다 틀렸지만 똑같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동생이 아버지를 피해 떠난 일은 너무도 명백했습니다. 그는 마음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몸으로도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형은 집에 남아 있었지만 실상은 동생에 비해 아버지와 더 멀어지고 소원해졌습니다. 눈이 멀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만일 그도 역시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에 반하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면 그는 분하여 길길이 날뛰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은 지독히 반항했습니다. 눈멀어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형 같은 바리새인의 상태가 영적으로 더 절망적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행여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다는 말이라도 들으면 이렇게 반응합니다. " 나한테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는 교회 주일 성수 하고, 십일조도 잘하고, 구제도 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항상 말씀에 순종하고 있어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너는 하나님의 자리에 네가 올라가 있어! 네 스스로가 구원자야 예수님처럼 복음을 가르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