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부 하나님 4
1. 본문: 눅 15:1-32. 본문 요약: 참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만날 때 죄인은 변화 되기 시작한다.3. 본문 주제: 참된 그리스도인4. 본문 테마: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5. 명제: 참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만날 때 죄인은 변화 되기 시작한다.6. 목적: 인생은 누구나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영접할 때 변화가 시작됨을 소개하여, 우리의 진정한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이심을 알리기 위해서 7. 질문제기: 인간을 변화 시키는 것은 무엇이며 누구이신가?8. 전환 문장: 참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만날 때 죄인은 변화 되기 시작한다. 인간을 변화 시키는 것은 무엇이며 누구이신가?9. 대지10. 제목: 의의 뿌리까지 다 회개하라1. 갈등 동생이나 형이 각자의 잃어버린 바 된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마음속 두려움과 분노에서 기쁨과 사랑과 감사로 바뀔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도적 사랑입니다. 보다시피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먼저 나가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들을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는 저만치 오고 있는 둘째 아들을 대문간에서 기다린게 아닙니다. “ 저기 아들놈이 오는군. 큰 사고를 쳤으니 납작 엎드려 기어들어 와야지! "그런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버지는 달려가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에게 자백할 겨를 조차 주지 않습니다.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유발한 게 아니라, 아버지의 아낌없는 사랑 덕분에 아들이 참회를 표현하기가 훨씬 더 쉬워집니다. 아버지는 분노와 원망을 품은 맏아들에게도 나가서 잔치에 들어오라고 다독입니다. 이 장면은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한편으로 가장 율법적인 즉 도덕적인 사람들도 똑같이 잃어버려진 상태라서 하나님의 주도적 은혜가 필요함을 보여 주고, 또 한편으로 바리새인에게도 진정 희망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지금 종교 지도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결국 그분을 로마 당국에 넘겨 처형당하게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비유 속의 형이 받은 것은 매서운 정죄가 아니라, 독선적인 분노로부터 돌이키라는 사랑의 당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일 적들을 사랑으로 타이르십니다. 그분은 바리새인을 대하실 때 바리새인과 같지 않으시고, 자칭 의인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방탕하게 살아가는 자유분방한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완고한 율법적인 사람들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지 않으시는 한 우리는 절대로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찾으시는 방식이 각기 다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동생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극적으로 와락 우리를 얼싸 안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사랑이 생생히 느껴집니다. 그런가 하면 형의 경우처럼 그분은 차분히 끈기 있게 우리를 설득하실 때도 있습니다. 지금 그분이 당신을 설득하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일 자신의 길 잃은 상태가 점차 느껴지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갈망이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순간 그분이 당신 곁에 계시다는 확실한 증표입니다. 2, 갈등 심화이 비유에서 배워야 할 게 또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개별적인 죄를 뉘우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깊어야 합니다. 집에 돌아올 때 둘째 아들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참회했음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란 이런 것입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려면 당신 죄의 목록을 꺼내 항목별로 그분께 사죄해야 한다. “그러나 회개란 그것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맏아들의 상태는 죄의 목록으로 접근해서는 충분히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잃어버려진 채로 아버지의 사랑의 잔치 바깥에 있는데도 그가 저지른 잘못은 딱히 죄 목록에 올릴 게 거의 없습니다. 그는 눅 15:29절 " 내가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이라고 말했고 아버지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도덕 규범에 관한 한 그에게 흠이 없음을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려진 상태이되 목록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까요?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신중히 처리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성경의 모든 저자는 예수님 외에 어떤 인간도 죄나 흠이 없다고 암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행동상의 결점에만 집중하면 그만큼 본질을 놓친다는 게 요지입니다. 바리새인은 죄를 지으면 비참한 심정으로 회개합니다. 자신을 벌하거나 자기 연약함 때문에 비탄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나면 그들은 여전히 형입니다. 참회와 뉘우침도 자력 구원 사업의 일환일 뿐입니다. 바리새인의 회개는 깊이가 없어 문제의 핵심에 닿지 못합니다. 그 핵심이란 무엇인가요? 형을 구원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자신의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 때문입니다. 형의 문제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이력을 내세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자신을 자랑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하나님을 통제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게 만듭니다. 그의 영적 문제는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성취와 행위에 두는 데서 비롯되는 지독한 정서 불안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는 느낌을 끊임없이 떠받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흠잡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주된 장벽은 " 그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받을 선행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만나려면 자신이 잘못한 일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냥 형일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합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죄의 이면과 모든 의의 이면에 깔린 스스로 자신의 구주와 주인이 되려 한 죄를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동안 자신의 궁극적인 소통과 신뢰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두었으며, 잘못된 행동과 올바른 행동 모두를 통해 하나님을 피하거나 통제하여 그 다른 것들을 얻고자 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당신의 죄악과 착한 행실 양쪽 모두의 배후에 스스로 구주와 주인이 되려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만 당신은 비로소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직전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만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지 문턱에 이를 수 있을 뿐 핵심에는 닿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돌이켜야 하는지만 알 수 있을 뿐 무엇 또는 누구를 향해 돌이켜야 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주도적 사랑이고 복음에 합당한 더 깊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즐거운 잔치에 들어가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3. 전환누가복음 15장 1-3절에 나와 있듯이 바리새인은 예수 님이 죄인들과 교제한다며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그들에게 하나가 아닌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백 마리의 양 떼를 치던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었습니다. 목자는 손실을 감수한 게 아니라 나가서 찾아다닙니다.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자 그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6절“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입니다. 비유 속의 여자는 집에 있던 은화 열 개 중 하나를 잃어버립니다. 그녀 역시 손해를 보았다고 체념하기는커녕 8절 “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습니다. ”마침내 찾아내자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 나와 함께 즐기자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냈다 ”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비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입니다. 세 이야기의 유사성은 명백합니다. 비유마다 양, 동전, 아들 등 뭔가를 잃었다가 도로 찾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비유와 처음 두 비유 사이에는 한 가지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두 경우에는 누군가가 나서서 잃어버린 것을 부지런히 찾습니다. 찾는 이들은 그 무엇에도 한눈을 팔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윽고 세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 잃어버린 아들의 곤경에 대해 들을 때쯤이면 당연히 우리는 이번에도 누군가가 찾아 나설 것을 예상합니다. 그런데 그를 찾아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님이 일부러 허를 찌르신 것입니다. 세 비유를 나란히 병치하심으로써 그분은 경청하는 이들에게 이런 의문을 유발하십니다. 흠,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나섰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예수 님은 성경을 속속들이 아셨으므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형제의 이야기도 아셨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분노에 찬 교만한 형에게 말씀하십니다. " 네가 네 동생을 지키는 자니라. ”에드먼드 클라우니 교수는 베트남전 중에 실종된 미국의 한 젊은 병사에 대한 실화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가족들은 공식 경로로는 그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의 형이 목숨을 걸고 베트남에 가서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정글이며 전쟁터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가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미군뿐 아니라 적군들까지도 그의 헌신을 듣고 수색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유 속의 형도 마땅히 그랬어야 했습니다. 진정한 형이라면 의당 그랬을 것입니다. 이런 말과 함께 말입니다. " 아버지, 동생이 어리석어 삶을 망쳤습니다. 하지만 제가 동생을 찾아 집으로 데려오겠습니다. 짐작대로 재산의 다 날렸다면 제 몫을 희생해서라도 동생을 다시 집안에 들이겠습니다. ”사실 동생은 형의 희생으로만 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이 말씀하셨듯이 동생이 떠나기 전에 아버지가 이미 유산을 나눴기 때문입니다. 전 재산에 대한 배당이 끝났습니다. 동생은 자신의 몫인 3분의 1을 가져다 완전히 날렸습니다. 아버지가 형에게 눅15:31 "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라고 한 말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남은 재산은 한 푼도 빠짐없이 다 형의 것입니다. 모든 옷과 반지와 살진 송아지의 소유권이 그에게 있습니다. 지난 세월 많은 사람이 동생의 회복에 아무런 대가나 속죄도 수반되지 않았다는 피상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동생이 배상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말렸음을 지적합니다. 그가 전혀 값없이 집안에 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는 용서와 사랑이 항상 값없고 무조건적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단순 논리입니다. 누가 당신의 차를 망가뜨리면 당신은 상대에게 배상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상대를 용서하고 당신이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습니다. 역시 당신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입니다. 명예 회복의 목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상대를 욕해 그의 좋은 평판을 짓밟으면 됩니다. 또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를 비방하지 않으면서 누명을 풀어야 하는 더 어려운 길입니다. 자비와 용서는 가해자 쪽의 대가 없이 거저 베풀어져야 합니다. 대가를 요구한다면 이미 용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를 베푸는 쪽에는 언제나 대가가 수반됩니다. 앞에서 아버지의 값없는 용서를 보여 주었다면, 이제 그 용서에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동생의 지위가 값없이 회복된 것은 형의 엄청난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그냥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형의 희생이 아니고는 아버지도 그를 도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진정한 형은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고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구원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님은 그런 형을 비유 속에 등장시키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상황입니다. 이 동생의 형은 오히려 바리새인 같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경우는 다릅니다. 험 많은 형을 비유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 님은 진정한 형을 상상하고 동경하도록 우리를 유도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흠 없는 형이 계십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찾으러 옆 나라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낮은 땅까지 오셨습니다. 한정된 금액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라는 무한한 대가를 기꺼이 치러 우리를 하나님의 집안에 들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빛이 그만큼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형으로든 동생으로든 우리는 다 아버지께 반항했습니다. 비유의 요지는 용서에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값을 치러야 합니다. 형이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동생이 다시 한 식구가 될 길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습니다. 거기서 그분의 옷과 존엄성이 벌거벗겨지셨기에 자격 없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엄성과 신분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님이 버림받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집으로 값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분이 영원한 심판의 잔을 마시었기에 우리는 아버지의 기쁨의 잔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진정한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이는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받아 주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4. 대단원어떻게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과 분노에서 사랑과 기쁨과 감사로 바뀔 수 있을까요? 여기 그 길이 있습니다. 당신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치러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대가를 보고 가슴이 뭉클해져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예수 님 제자의 핵심적 차이는 마음 깊은 곳의 동기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착한 것은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욕구 때문이고, 그 욕구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정말 신뢰하거나 정말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애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깐깐한 상전이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을 보았기에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며 우리의 참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빌 2장에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힘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추한 우리를 보시고 자신의 영광을 비워 종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 영광 즉 자신의 본체를 버리시고 친히 목숨을 바쳐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이 그렇게 하셨음을 알면 속속들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분께 어찌 우리 자신을 바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예수 님이 베푸신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속의 불신을 허물어뜨립니다. 십자가에서 큰 희생과 대가를 치르신 예수 님의 사랑이 이를 바꿔 놓았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아름다운 일을 보면 그것이 우리 마음을 그분께로 이끕니다. 여태까지 온갖 엉뚱한 데서 찾으려 했던 사랑과 위대함과 위안과 영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우리의 두려움도 없애 줍니다. 온 우주의 주가 그런 일을 대신 당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두려워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아름다운 주를 보는’ 정도만큼 우리는 동생이나 형을 만들어 내는 두려움과 결핍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존 뉴턴의 친구인 시인 윌리엄 카우퍼는 이 개념을 다른 찬송가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율법을 성취하신 주를 보고 주의 용서의 음성을 들으면 노예가 변해 자녀가 되고, 의무가 변해 기쁨이 되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이루신 사랑과 용서의 일을 경이롭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동생이나 형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