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love 2023. 3. 26. 17:38

1. 본문: 고전 2:2

2. 본문 요약: 십자가는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 피해자가 값비싼 대가를 혼자 짊어지는 사랑이다.

3. 본문 주제: 십자가

4. 본문 테마: 십자가와 용서

5. 명제: 십자가는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 피해자가 값비싼 대가를 혼자 짊어지는 사랑이다. (평가적 명제)

6. 목적: 십자가가 사랑만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임을 증거가 되기 위해서

7. 질문 제기: 어째서 예수 님은 반드시 죽어야 했던 걸까요?

8. 전환 문장: 십자가는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 피해자가 값비싼 대가를 혼자 짊어지는 사랑이다. 어째서 예수 님은 반드시 죽어야 했던 걸까요?

9. 대지

10. 제목: 십자가와 용서

 

십자가는 늘 기독교 신앙의 으뜸가는 상징이었습니다. 예수 님이 인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건 복음의 핵심이자 말 그대로 좋은 소식이었다지만 갈수록 복음이 같은 문화 속에 사는 다른 이들에게는 나쁜 소식이 되어 가는 느낌입니다. 적잖은 이들이 이를 우스꽝스럽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악하게까지 생각합니다. “ 예수 님이 꼭 죽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라는 질문은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다들 입을 모아 "그냥 용서해 주시면 안 되나요? 라고 묻습니다. 자유주의적인 개신교 신학자 중에도 '거룩한 아동 학대'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십자가 교리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십자가를 치워 버리지 않습니까? 예수 님의 죽음보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에 더 초점을 맞추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십자가는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 피해자가 값비싼 대가를 혼자 짊어지는 사랑입니다. 어째서 예수 님은 반드시 죽어야 했던 걸까요?

 

첫 번째 이유는 참다운 용서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상대가 저지른 짓을 그대로 갚아 주지 않기로 작정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힘껏 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 그걸 억누른다는 건 괴롭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다른 이에게서 빚을 받는 대신, 그 대가를 송두리째 감수하며 스스로 빚을 떠안는 일입니다. 상처를 헤집는 아픔이 따릅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 지난주에 기도하는데, 갑자기 30년 넘게 용서하려 애써 왔던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애쓰며 기도한 것뿐이었습니다. “루이스 교수는 아버지가 미워 죽겠다고 하소연하는 열여섯 살 소녀와 상담했던 기억이 났다고 합니다. 하도 진전이 없기에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 아버지를 미워하면, 아버지한테 늘 질 수밖에 없단다.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나 분노가 발목을 잡을 거야. "어린 친구가 그걸 깨닫고 받아들이자 속에서 매듭이 풀려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상처가 더 깊어지는 느낌이었지만, 소녀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 가며 용서의 아픔을 헤쳐 나갔고, 결국 영원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용서가 먼저이고 느낌은 나중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감정도 따라오게 됩니다. 아울러 새로운 평화, 곧 부활로 이끌어 갑니다. 악의 확산을 막는 길은 오로지 용서뿐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를 위해, 자신을 위해, 또는 그저 원수를 갚기 위해 맞선다면 가해자가 회개할 여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럴 경우, 피해자 쪽은 정의가 아니라 복수, 변화가 아니라 상대의 고통을 추구하게 됩니다. 상대가 아파하는 꼴을 보고 싶은 욕구가 사라져야 실제로 변화와 화해, 치유를 불러올 기회가 생깁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만큼 값비싼 용서를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 독일로 돌아온 뒤에 쓴나를 따르라>에서 본회퍼는 용서가 항상 고통의 형상을 띠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 죄를 짊어지는 유일한 길은 이제 나눠 가지게 된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에 힘입어 용서하는 데 있습니다. 용서는 크리스천이라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1943, 본회퍼는 체포 갇혔다가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용서는 나를 따르라에서 이야기한 '값싼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죄를 외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죄가 삶을 송두리째 앗아 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워하기를 거부했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하는 용서였습니다. 본회퍼는 원수를 사랑하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했기에, 적의 악행을 향한 그의 저항은 원한에 차거나 잔인하지 않고 신중하고 또 과감했습니다. 어디에도 쓰라린 원망이 서리지 않았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 저와 관련해서는 부디 초조해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잊지 말고 기도해 주세요. 당연히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앞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너무도 굳게 믿는 터라 그 확고한 믿음을 늘 지키길 바람 따름입니다. 제가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그분이 이끄시는 길을 걷고 있음을 한 치도 의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선하심이 저의 지난날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제 죄를 가려 줍니다. ”여기서 보듯, 본회퍼는 자신을 위해 예수 님이 행하신 일을 그대로 되풀이해 살아 내고 있습니다. 예수 님은 죄를, 그리고 그 대가를 고스란히 떠안으셨습니다. 이제 본회퍼는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그 일을 되풀이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가져다가 인간을 용서하는 데 사용합니다. " 예수 님 꼭 죽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인류를 그냥 용서해 주실 수는 없었던 걸까요? "이렇게 묻는 이들이 허다하지만, 아무도 심각한 죄를 그냥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용서란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대신 자신이 떠안고, 상대가 새롭게 달라지기를 기대하며,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죗값을 스스로 짊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죄악을 용서하는 이는 누구나 죽음을 지나 부활에 이르며 고통과 피, 땀과 눈물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주님께 잘못한 일이나, 서로에게 잘못한 일들을 하나하나 벌주는 게 아니라, 도리어 용서하기로 하시고 예수 님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회퍼의 말처럼 용서하려면 상대의 죄를 대신 져야 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뚜렷하게 보여주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파악했다는 점을 기억해 두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고통을 주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온 세상의 아픔과 폭력, 악을 스스로 떠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피를 제물로 받고서야 진노를 푸는 원시적인 신들과 전혀 다릅니다. 도리어 윤리적인 정의와 자비로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셨으며 생명의 피를 흘려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으면서, 악을 파멸시킬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저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사례가 아닙니다. 쓸데없이 생명을 내던지는 것은, 존경받을만한 행동이 아니며, 오히려 그릇된 처사로 봐야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님이 반드시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그 값을 내 대신 치르셨습니다. 받아야 할 형벌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친히 그 벌을 받으셨습니다. 용서는 늘 대가가 큰 고통의 형상을 띱니다. 인간의 용서에 궁극적인 토대이자 자원이 되는 건 역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본회퍼는 이를 되풀이해 증언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안전하게 머물며, 다른 이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십자가에서 예수 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용서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째서 예수 님은 반드시 죽어야 했던 걸까요?

 

두 번째 이유는 참다운 사랑은 인격적인 교환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중반쯤, 어느 개신교단이 개최한 신학 콘퍼런스에서 한 강사가 목소리를 높여 주장했습니다. “ 대속의 교리는 전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를 뚝뚝 흘리는 인간이든지 초월적인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되는지 알려 주는 가르침에만 집중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십자가를 빼 버리면 사랑의 하나님도 사라집니다. 삶을 나누는 참다운 사랑은 예외 없이 이런 식의 상호 교환을 포함합니다. 정신적으로 안정되고 행복한 이를 사랑하는 데는 큰 힘이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상처를 입은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깊이 사랑하면서 정서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지켜 낼 수 있는 방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서적으로 상대방을 세워 주려면 당사자의 정서가 말라붙는 상황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자녀를 키운다고 생각해 보라. 아이들은 철저하게 의존적인 상태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부모가 여러 해 동안 자신의 독립성과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급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일하거나 노는데 끼어들지 못하게 막는다면, 그리고 불편하지 않을 때만 보살펴 준다면, 아이들은 몸만 클 것입니다. 그러나 온갖 다른 영역에서는 정서적으로 애정에 주리고 불안해하며 지나치게 의존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선택은 분명합니다. 부모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거나, 자녀들의 자유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아니면 부모, 둘 중 하나입니다. 제대로 사랑하려면 부모의 몫을 줄여서 자녀의 몫을 늘여야 합니다. 부모라면 기꺼이 자녀들이 가진 의존성에 개입해서, 결국 부모가 가진 자유와 독립성을 맛볼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심각한 어려움을 가진 이들의 삶이 변할 만큼, 사랑을 쏟기 위해서는, 대속적인 희생이 필요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인격적으로 개입하면, 사랑하는 자의 강건함은 연약한 자들에게 흘러갑니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에서 그리스도가 전한 메시지의 한복판에는 그런 대체가 자리 잡고 있다고 썼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게 죄의 본질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대신하신 게 구원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이 계셔야 마땅한 자리에 자신을 앉히고,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친히 들어가셨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세상에 인격적으로 개입해서 인류가 겪는 것과 똑같은 폭력과 억압, 괴로움과 연약함, 고통을 맛보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 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 하나님은 그리하신다 "인데 세상의 주요 종교 가운데 단 기독교만이 하나님은 그리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어째서 예수 님은 반드시 죽어야 했던 걸까요?

 

세 번째 이유는 큰 능력을 갖추신 하나님의 역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가 어느 글에 쓴 그대로입니다. “ 십자가가 아니라면 스스로 하나님을 믿을 길이 없습니다. 고통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 살면서 어떻게 고통을 알지도 못하는 신을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절대로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감수하라고 부추길 수 없습니다. 예수 님이 인류를 위해 고난을 겪었던 것은 정의를 존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고난을 겪으시는 것은 억압하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의 눌린 이들과 하나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삶을 바꾸는 사랑은 모두 교환, 다시 말해 자리바꿈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여기 사상 최대의 역전이 있습니다. 더없이 큰 능력을 갖추신 하나님이 소외된 이들, 가난한 이들, 억눌린 이들과 그 자리를 맞바꾸신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언제나 눅 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노래했지만, 바로 그분이 스스로 영원한 보좌에서 내려와 눌린 이들과 함께 고난을 겪으시고 그들을 높이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권력과 힘, 지위를 떠받드는 세상의 속성이 낱낱이 까발리고 무력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버림으로 얻으셨고, 짐으로 이기셨으며, 약함과 섬김으로 권세를 얻으셨고, 가진 것을 남김없이 내주심으로 도리어 부유하게 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으신 것입니다. 라이트(N. T. Wright)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 무엇보다, 진정한 적은 로마가 아니라 인간의 오만과 폭력 뒤에 도사린 악의 권세였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나라는 폭력의 악순환에 휘말리길 거부함으로써 세상 나라들을 이기고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예수 님은 십자가에서 원수를 사랑하셨고, 다른 뺨을 돌려대셨으며, 십 리를 더 걸으셨다. "이렇게 역전된 십자가 방식은 세상의 생각과 너무 딴판이어서 일종의 대안 나라, 대안 현실, 그 가치로 변화된 이들 사이의 대안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이 평화로운 나라에서는 권력과 인기, 지위, 부를 바라보는 세계관을 완전히 뒤엎는 역전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새로운 대안 문화 속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돈을 나눠야 할 것으로 봅니다. 권력을 반드시 섬기는 데 써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인종과 계급에 뿌리를 둔 우월감, 남들을 희생시키며 부와 권력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행위, 인기와 인정을 향한 갈망을 비롯해 인생의 여러 측면은 십자가를 알고 경험한 크리스천들의 마음가짐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다른 삶의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십자가의 위대한 역전을 경험한 이들은 더 돈과 지위, 출세, 인기, 권력 등을 도구로 자기를 합리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님이 반드시 죽어야 했던 이유를 이해하자면 십자가의 결과인 값비싼 대가가 따르는 죄 용서와 십자가의 방식 즉 세상 가치를 뒤엎는 역전을 둘 다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우리를 깊이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님의 죽음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관계든, 사랑과 정의에 대해 이와 똑같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불의를 묵인해선 안 됩니다. 예수 님은 억눌린 이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악을 악으로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예수 님은 원수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왜 예수 님이 죽어야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수 님마저도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혹 다른 길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런 길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시면서 주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 왜죠!? "어째서 그리스도는 버림을 받았던 걸까요?" 꼭 필요한 일이었을까요? 성경의 답은 짧고 분명하다. " 그렇다 우리를 위해서! ”

십자가 이야기는 그저 감동적인 사연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진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이야기 속에 실제로 등장합니다. 예수 님은 비행 청소년과 같은 처지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명성과 견줄 수 없을 만큼 크고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친히 감옥으로 찾아오셔서 구원받고자 하는 뜻조차 없는 우리와 자리를 맞바꾸셨습니다. 예수 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고 기꺼이 처지를 바꿔 주셨음을 깨닫고 나면 얼마나 큰 힘이 생기겠습니까? 오직 이 말을 전할 뿐입니다. 바깥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살피는 것도 큰 감동이 되지만, 실제로 예수 님의 이야기 속에 그리고 주님이 나의 이야기 속에 들어왔음을 깨달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을 얽매고 있던 두려움과 교만의 족쇄가 풀립니다. 예수 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이 교만을 버리게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더불어 두려움에서 벗어나 확신을 품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