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을 앎
본문: 요일 4:16
본문 요약: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의지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 안에 사는 자는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
주제: 하나님의 사랑
테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경험
명제: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적인 측면과 경험적인 측면에서 나눌 수 있다.
목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무엇인지를 밝혀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적으로 아는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질문제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무엇이며, 사랑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전환 문장: 하나님의 사랑은 지식적인 측면과 경험적인 측면에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무엇이며, 사랑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지
10. 제목: 하나님의 사랑을 앎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15절“누구든지 우리가 증거하고 목격한 바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고 그분이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이다.” 16절“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알고 믿었노니."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의 상태를 넘어 지식의 상태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은 지식적인 측면과 경험적인 측면에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무엇인지를 밝혀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적으로 아는 방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무엇이며, 사랑을 아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연관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와 교훈과 교리의 골자로 믿는 그 무엇입니다. 다른 하나는 경험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죄와 타락의 결과로 둘 중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치명적인 성향이 있는 듯합니다. 순전히 지적인 의미에서 신학과 교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말하면서도 서로 간에 분노를 표출하며, 그들의 논의가 순전히 이론적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머릿속에만 있을 뿐 결코 삶에 옮겨져 적용되지 않으며 경험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적 삶을 순전히 주관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며 교리를 간과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내게 당신의 교리를 말하지 말라. 나는 체험해서 무엇인가를 느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비극은 이 둘 중 어느 하나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영광스러움은 그것이 항상 전인을 사로잡는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성이나 마음 혹은 의지만이 아니라 지성과 마음과 의지를 모두 사로잡습니다. 바울은 롬 6 : 17에서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라는 칭찬의 말을 통해 그 점을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순종했으며, 마음으로부터 순종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마음에 와닿은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믿어야 하고 알아야 하며 경험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사도들에 의해 이미 증거 된 사항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우리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또 그분을 통해서만 충분하고 온전히 알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9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4절"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말하는 소위 신비 종교 혹은 이상한 사고들이 당시에 창궐하고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알 수 있다고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신비주의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간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간과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아무리 선하든지, 아무리 고무적이거나, 고상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따라서 나는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면,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결코 어떤 수단과 방법에 의해서든 하나님은 알려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직접 하나님께 접근하려는 혹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려는 다른 모든 시도를 피해야 합니다. 딤전 2:5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분 없이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어떤 사랑도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항상 기억합시다. 객관적인 것이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무엇이며, 사랑을 알 방법은 무엇인가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적 측면을 살펴봅시다..
결국,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삶에서 실천적인 결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의 무가치합니다. 요한은 우리가 처한 곳과 마찬가지인 어려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하는 감격스러운 사실은 비록 모든 세상이 악한 자의 세력 아래 놓여 있긴 하지만 우리의 기쁨이 충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기쁨이 충만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모든 난관을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까? 중요한 해결책이 여기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면 롬 8: 38-39 “나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물음들이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이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 언급은 신약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바울은 갈 2:20절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속죄의 교리와 관련해 사도 바울과 같이 진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분이 바로 자신을 위해 죽으셨고 자신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지식이며 개인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기독교적 입장이란 단지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특정한 개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하고 아는 그 무엇입니다. 바울의 위대한 언급에 주목해 봅시다. 딤후 1:12절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우리는 그것을 알고 습니까? 어떤 미래가 나를 기다리는지 알지 못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과 세상은 불확실합니다. 나는 이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아는 것이며, 내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그 사실을 안다면 다른 그 무엇도 그렇게 문제 될 것이 없으며 내게 심각하고 본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앏니까? 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이 자각하고 깨닫습니다. 나는 그분과 그분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를 위해 행하신 그 완전한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내가 그 점을 맨 먼저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요한이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앏니까? 그것은 어떤 정서나 느낌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우선적 고려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 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며 그리스도가 내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9절"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까? 그분이 중심이 됩니까? 여러분의 죄에 대한 징벌을 담당하시고 또 여러분의 죄악을 제거하셨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이 그분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여러분의 지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신약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기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그분의 영원한 사랑이 그토록 놀랍게 드러나고 표현된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면 어떻게 내가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마지막으로, 나는 열 가지 시험 방법들을 여러분에게 제시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들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과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각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신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인은 항상 하나님이 자신을 대적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무엇이 잘못될 때마다 그가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용하실까?"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적대적일 때,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외경심은 남아 있는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 12:8절”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분께 나아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존경하되 두려움은 사라지는 경외심은 남아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고 사랑하신다는 느낌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는 느낌을 갖지 않으며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자비로우시며 내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또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느낌과 생각을 갖기 시작합니다. 네 번째는 죄 사함 받았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자각합니다. 나는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와 감사 기도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다. 여섯 번째는 죄를 점점 더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을 아는 지식에 대한 증거로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여러분이 죄를 미워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고 혐오스럽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느낌이 어떠하든지 간에 점점 더 죄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누구도 죄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는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선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는 죄를 미워하게 될 뿐 아니라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짓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더욱 나은 삶을 살며 더욱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요 14:21 절"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덟 번째는 우리가 그분을 더 잘 알고자 하며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그분과 더불어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소원 중 하나입니까?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더 잘 알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고 그러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와 더불어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너무도 보잘것없다는 의식적 뉘우침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만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결코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들의 사랑이 모자란다는 생각에서 슬퍼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깨달음, 곧 하나님이 그분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그분이 세상에 왔다가 다시 돌아가심으로써 이루신 일에 대한 깨달음, 곧 그분이 나의 전부라는 자각, 그분이 나를 위해 사역하셨다면 그것은 내가 죄로부터 구출되고 구속함을 당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이 나의 구주시며 주님이시라는 깨달음 등 그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을 향한 나의 태도가 바로 열쇠가 됩니다. 과연 나는 바울과 더불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빌 3:10-11."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여러분은“ 신비주의적 방법을 통해 시작할 필요가 없으며, 감정을 북돋우고자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마주하고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죄를 직시하며,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하나님을 소유한 셈입니다. 그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너무도 사랑하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여러분을 구하고 죄로부터 구속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땅 위에서와 하늘에서 계속 울려 퍼지는 "나는 알고 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있다."라는 이 위대한 합창에 여러분 모두가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모든 삶의 원동력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