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love 2023. 7. 30. 16:09

1. 본문: 요일 4:16-17

2. 본문 요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3. 주제: 그리스도인

4. 테마: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

5. 명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다. 평가적 명제

6. 목적: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임을 사랑 안에 거하는 삶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7. 질문제기: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8. 전환 문장: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9. 대지

10. 제목: 사랑 안에 거함

 

 

여러분에게 앞서 상기시킨 바와 같이 이 구절들은 사도가 요일 47절로부터 전개해 온 주장에 대한 일종의 요약이라 하겠습니다. 그의 주제는 형제 사랑의 중요성입니다. 그는 16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항상 함께 다루어져야 합니다. 나는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막 12:29-31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는 질문을 받고서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이 둘은 항상 함께 다루어져야 하며, 여기서 요한은 한 가지 위대한 사실을 요약하는 데 구원의 확신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그의 말의 요지는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처지 및 입장에 대한 구원의 확신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확신의 기초가 되며 요한이 전하기를 원했던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이 서신을 쓸 때는 자신의 생애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고 있던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위로하고자 했으며 그들의 어려움과 그들이 살았던 세상에 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시련으로 에워싸여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사회 속에 내재한 죄성과는 전혀 별도로 머리를 쳐들고 있던 간교한 이단들과 적그리스도 그리고 거짓 교사들로 말미암은 시련이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을 돕기를 원했습니다. 처음부터 그가 강력히 주장해 온 사실은 하나님이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느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기를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라고." 말하기를 다소 망설이고, 그 점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사랑 안에 거하는가? 나는 사랑 안에 살며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임을 사랑 안에 거하는 삶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그리스도인은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에 관해 말할 때 무슨 의미로 그렇게 했습니까?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 역시 이전에는 딛3:3절“가증스러운3:3절“ 자요 피차 미워하는 자"였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사랑의 정신에 의해 특징지어집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 거하고 살며 존재합니다.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구원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구원은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안에 거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의하자면,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여기 17절 끝 부분에서 그는 매우 각별한 사항을 진술합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인은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며, 요한의 말에 의하면 이는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닮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습니다. 아이작 와츠가 이 지상의 땅에서 '천상의 열매이 자라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나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상의 열매들 곧 성령의 열매인 사랑입니다. 그것이 으뜸가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성부와 성자가 그러하심과 같이, 그리고 주께서 사랑이시듯이, 온갖 문제와 곤경과 시련,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그러합니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마음속에 자애심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산상수훈 가운데서 이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5:45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그것이 바로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배려이며,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인류와 세상을 향한 광범위한 자애심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우리가 행하거나 생각하거나 말하는 바에 의해 혹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제하고서는 구원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그분에게서 자기 발생적으로 나오는 것이며, 우리의 모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고" 말하는 사도의 주장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찰해 봅시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데서, 하나님이 자신의 영예와 영광을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데서, 그 사랑의 위대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고려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행해야 했으며, 내게 이런 식으로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반역했다. 그러므로..……….”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우리의 타락한 상태를 고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사역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결국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우리도 그러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태도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거나 좌우되지 말아야 함을 뜻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항상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거나 의와 명예와, 다른 것들을 받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보아야 하며 이렇듯 특이한 방식과 태도에서 자신을 잊어버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을 영혼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와 딱한 곤경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죄와 사탄의 희생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세상을 살피셨으며 우리의 모습 자체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을 보셨습니다. 그분은 죄악에 속박된 우리를 보셨으며 이 죄악으로 인해 우리가 황폐해지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돌아보셨습니다. 그분이 그러하신 것처럼 만일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 말은 그들은 잃어버린 영혼 로봇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탄의 노예들로 여기며, 하늘에 있는 악한 세력들과 사악한 존재들의 희생물로 간주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듯이 우리도 용서하고 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고 용서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분이 우리 죄를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죄악들을 망각의 바다 가운데로 던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잊으셨다는 것은 그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 사실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음에 대해 그분에 감사드리십시다. 그분은 과거에 범한 나의 죄악들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을 잊으셨습니다. 그것들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그분의 성호를 찬양합시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잊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악들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악들이 다시 찾아와 우리와 함께 거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추방해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용서하고 잊어야 합니다. 또한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악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수동적으로 우리의 죄악들을 제쳐 두고 그것들을 잊기로 결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대처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영원한 회의석상에서 사람들의 타락한 상태와 그들에게 구원의 필요하다는 사실에 관해 함께 의논하셨습니다. 성부가 성자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성자는 "내가 하늘을 포기해야 합니까? 내가 스스로를 낮추어야 합니까? 그것이 옳습니까? 나는 당신과 동일합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을 아셨지만 하늘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흔쾌히 한편으로 제쳐 두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원한 영광을 나타내는 표지를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겸비해 지사 종의 실체를 지니셨으며, 결코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네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요한은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것은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 그분의 것이라면 스스로를 낮추고 오해를 받으며 비웃음과 경멸과 조소를 당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방어적 차원이나 자신의 권리와 정당성을 요구하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진 것을 본받아 선을 행하고 기뻐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5:46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여러분은 주님의 주장을 기억합니까?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자신에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푼다면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특별한 것은 이러합니다. 5:44내가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그 대답이 여기 있습니다. 5: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하신과 같이 나희도 완전하라". 요한은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되풀이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죽게 하신 정도로 너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그러므로 완전하라. 그분이 그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리하니라. 사랑 안에 거한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특별히 '거한다'는 단어를 좋아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우리는 그 단어를 나무도 자주 접합니다. 그것은 거하다, 존속하다, 머무르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사랑 안에 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사랑은 거하는 것이며 간헐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친절할 때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들에게 친절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빛들의 아버지이시다.” 그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만일 우리의 결함에 따라 하나님이 변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그분의 우리와 더불어 우리의 세상과 더불어 혹은 해나 비와 더불어 변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항시 동일하게 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통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이 사랑의 삶에 위배되는 모든 것에 대처해야 합니다. 이는 항시 지속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 전체는 통제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모든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나 자신을 살피고 관찰해야 하며, 이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저지해야 합니다. 3:5땅에 있는 지체"를 억제해야 합니다. 나의 애착, 탐욕, 자기 영광, 이와 유사한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나는 그것들을 내리눌러야 하고 억제해야 합니다. 더욱더 그분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대해 과감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너무도 자주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혀를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표현대로 이 작은 지체, 통제하기 힘든 이 지체, 인생이라는 배 전체의 방향을 돌리는 이 작은 키는 그토록 하찮은 것이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폐해는 얼마나 심각합니까? 3:1-12”같은 구멍의 샘으로부터 단 물과 쓴 물을 얻을 수 없다. 같은 나무에서 가시와 포도를 얻을 수 없다. 이는 신약성경의 말씀이다.“ 혀를 다스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입술과 혀를 주의하라. 이 사랑의 삶에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의 말을 통제하라. 자신의 말을 다스림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보다 잘 다스리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사랑의 삶이 더욱 자라고 발전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삶을 진전시키기 위한 궁극적 방법은 자신에게 그러한 진전에 뒤따르는 결과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 결국 사도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내가 한 말이 너희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너희가 서서 재판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해명해야 할 날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너희가 담대하게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지금 여기서 사랑 안에 거하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