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love 2023. 8. 13. 15:50

1. 본문: 고후 5:14

2. 명제: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를 옥죄는 오랏줄인가?

3. 제목: 속박

 

갈등

고 팀겔 목사님의 글을 편집하여 올립니다. 크리스천들은 스스로 누구나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 진리를 소유했다고 믿죠 한 젊은 아티스트 케이스(Keith)는 말했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위태롭게 만듭니다." "맞아요!" 또 다른 젊은 아티스트 클로이(Chloe)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모두에게 들어맞는 유일한 진리라는 식의 접근은 지나치게 억압적이 잖아요.. 알고 지내는 크리스천들을 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사상의 자유가 없는 것처럼 보여요.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고 봅니다.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믿음은 자유의 적인가? 오늘날 뉴욕에서 만난 이들은 십중팔구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눈에는 이런 주장이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행동으로 비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민들을 통합하기보다 분열시키는 까닭으로 오해합니다. 문화적으로 편협해 보이기도 합니다. 문화에 따라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오해합니다. 결국에는 구성원들을 노예로 만들기나 기껏해야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사회 통합과 문화적인 적응성, 심지어 참다운 인간성을 해치는 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는 진리와 공동체, 기독교와 자유의 본질에 얽힌 오류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2. 갈등 심화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일이며 다양한 형태를 지닌 통제의 산물일 따름이고 권력 효과들을 함유하고 있다" 적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푸코의 영향을 받아 진리 주장은 하나같이 권력 놀음이라고 단정합니다. 진리를 소유했노라고 장담한다면, 권력을 잡고 누군가를 통제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제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푸코는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이런 분석을 들이댔습니다. 니체 앞에서 "누구든지 가난한 이들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면 당장 정말 정의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통제력과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질문이 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진리는 권력 놀음'이라는 반론은 모든 진리는 문화적인 제약을 받는다" 주장과 똑같은 문제에 부닥치기에 십상입니다. 어떤 공동체도 완전히 포용적일 수 없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신념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성질 탓에 사회 분열을 부른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인간 공동체는 철저하게 포용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성을 공통분모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주민들의 인종과 종교적 신념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이뤄 함께 살고 일하지 않느냐고 비판자들은 지적합니다. 공동체 생활에 필수 요건은 다른 이들의 사생활과 권리를 존중하고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과 직업, 의사결정 기회를 누리도록 보장하는 정도이며 그게 바로 자유민주주의라고 못 박아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시각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사고방식을 드러낼 뿐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유익보다는 개인의 권리가 우선이며, 개인 윤리와 공공 윤리는 별개이고 개인의 선택을 신성시하는 따위의 숱한 전제들을 깔고 있습니다. 사회는 이성, 권리, 정의 따위를 둘러싼 공동의 약속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어느 하나 보편적으로 합의된 정의 같은 게 없습니다. 인간 공동체는 어김없이 공동의 신념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며, 자연히 누구를 그 테두리 안에 넣고 누구를 제외하느냐와 같은 경계가 생기는 법입니다. 예를 들이 보자, 게이와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센터 이사진 가운데 한 명이 어느 날, "앙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이제는 동성애가 죄라고 믿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칩시다. 몇 주가 지나가는데도 꿋꿋이 같은 주장을 되풀이합니다. 또 동성애 반대 연맹의 간부 하나가 "아들아이가 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동성 파트너와 결혼할 권리가 개한테 있다고 봅니다"라고 발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쪽 집단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너그럽고 유연한 성품을 가졌는가와 상관없이 저마다 "신념이 다르니 인제 그만 이사회에서 나가 달라"라고" 통고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반드시 닥칠 것입니다. 두 그룹 가운데 첫 번째는 배타적이라는, 그리고 두 번째는 포용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운영 방식에서는 둘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양쪽 다 구성원들끼리 공유하고 있는 확신들을 기초로 삼고 있으며 그 믿음은 포용하고 배척할 상대를 가르는 경계선으로 작용합니다. '편협해서'가 아니다.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편 다 그저 공동체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따름입니다. 구체적인 신념과 실천 방안을 구성원들에게 책임지고 제시하지 못하면 그 어떤 공동체도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으며 공동체라고 말할 근거를 완전히 잃게 될 것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공동체가 그러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전환

기독교 신앙은 문화적으로 경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흔히들 기독교는 문화적인 속박이라고들 합니다. 다채로운 문화들을 단 하나의 강철 같은 단단한 틀에 억지로 쑤셔 넣으리라고 지레짐작합니다. 그러니 다원주의와 다문화주의의 적이라는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세속주의를 포함한 다른 세계관들보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적응성이 월등하게 높으며 훨씬 덜 파괴적입니다. 크리스천의 확장 패턴은 다른 종교들과 전혀 다릅니다. 이슬람 인구의 구심점과 절대다수는 여전히 그 발원지인 중동 지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힌두교와 불교, 유교의 인구학적 중심 역시 그 발상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판이한 양상을 보입니다. 초기에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흐름을 주도했지만 곧이어 지중해 연안의 헬라파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나중에는 북유럽의 야만인들이 신앙을 받아 들었고 차츰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크리스천들이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세계 기독교 인구의 대다수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 거주합니다. 기독교가 지극히 이질적인 여러 문화 속으로 세계의 주요 종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파고들어 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성경은 크리스천들에게 서로 연합하여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가르치지만, 운율과 리듬, 감정 표출의 수준, 기억 편성 따위를 시시콜콜 처방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방식을 통해 문화적으로 표현되도록 맡겨 둘 따름입니다. 역사학자 앤드류 원스(Andrew Walls)는 이렇게 썼습니다. 문화적인 다양성은 기독교 신앙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습니다. 15장에서 새로 크리스천인 된 신자들은 굳이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회심한 이들은 그리스 방식으로 크리스천의 삶을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기독교 신앙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60장과 요한계시록 21-22장 같은 성경은 문화적 다양성 각 나라의 족속과 백성과 방언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새로워지고 완비해진 미래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 문화마다 제각기 다른 이점과 능력을 갖추고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함을 의미합니다. 세간에서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기독교는 토착 문화를 파괴하는 서방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다른 신앙들보다 문화적으로 더 다채로운 양상을 보입니다. 히브리 문화, 그리스 문화, 유럽 문화에서 유입된 통찰을 깊은 바닥에 차곡차곡 깔고 있으며 앞으로 백 년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의 문화를 통해 또 다른 모습으로 빚어질 것입니다. 오랫동안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다른 이들에게 리더십을 개방한 덕에 기독교 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폭넓은 시각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유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할지 선택할 자유를 제한하여 개인의 성장과 잠재력을 가로막는다고들 넘겨짚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권위나 전통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에 의지하는 것을 계몽된 인간의 조건으로 꼽았습니다. 윤리적인 문제들에서 권위에 저항하는 이런 마음가짐은 이제 현대 문화의 커다란 흐름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윤리적인 기준을 설정하는 자유는 온전한 인간이 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필수 요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발상입니다. 자유는 오로지 구속과 제한이 없다는 식의 부정적인 낱말들만을 엮어서 정의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구속과 제한이 자유의 통로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음악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면, 몇 년이고 피아노를 치고 또 치면서 연습을 거듭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는 자유를 구속하고 제한하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키가 165센티미터쯤 되고 몸무게는 57정도 나가는 젊은이는 프로 아메리칸 풋볼팀에 들어가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젊은이 신체적인 현실에 부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잠재력을 갖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달란트와 관심 영역에 맞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은 보수를 보장하는 직업을 기를 쓰고 구하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일들이야말로 마침내는 우리를 억압하고 비인간화하는 속박입니다. 그렇다면 규율과 제한은 우리의 본성과 능력의 현실에 맞을 때만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물고기는 공기가 아니라 물에서 산소를 흡수하므로 만일 그것이 물로 제한되고 한정될 때만 자유롭습니다. 만일 우리가 물고기를 풀 위에 꺼내 놓으면 물고기의 자유는 물론 생존마저도 강화되는 게 아니라 파괴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본질적인 현실을 존중하지 않으면 물고기는 죽고 맙니다. 삶의 여러 영역에서 자유는 제약을 없애는 게 아니라 올바른 한계 다시 말해 자유를 불러오는 구속을 찾아내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 본성과 세상의 실상에 잘 부합되는 제한은 더 큰 힘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 그리고 더 깊은 기쁨과 만족을 낳습니다. 실험과 모험, 실수는 시간이 갈수록 능력뿐만 아니라 한계까지 명확히 드러내는 경우에만 성장을 불러옵니다. 그렇다면 규율과 제한은 우리의 본성과 능력의 현실에 맞을 때만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저마다 윤리적인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는 통념은 영적인 영역과 나머지 세계는 완전히 딴판이라는 전제를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4. 대단원.

사랑 그 궁극적인 자유는 생각보다 제한적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성장하고 번창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윤리적 영적 실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물고기에게 물이 그러하듯, 스스로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인간이 더없이 자유로울 환경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기쁨과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주성을 포기해야 합니다. C. S. 루이스의 친절한 설명을 들어 봅시다. 뭐든지 사랑해 보세요. 여러분의 마음은 틀림없이 상하게 되고 어쩌면 깨질 수도 있습니다. 조금도 다치지 않고 온전하게 지켜 내고 싶으면 아무한테도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다못해 짐승한테도 주지 마세요. 취미들이나 소소한 사치품들로 꽁꽁 싸매 두세요. 아무 데도 얽히지 않게 조심하세요. 이기심이라는 궤짝이나 관에 집어넣고 자물쇠를 채우세요. 하지만 안전하고, 어두침침하고, 움직임도 공기도 없는 그 궤짝 안에서도 마음은 변할 겁니다. 다치지는 않겠죠. 하지만 깨트릴 수도 없고, 뚫고 들어갈 수도 없고, 바로잡을 수도 없을 겁니다. 이런 비극, 또는 그런 비극의 위험을 최소화시킬 대안이 있다면, 그건 지옥살이뿐입니다. 이처럼 자유는 제약을 없애는 게 아니라 올바른 제한과 통제, 곧 인간의 본성과 잘 들어맞고 자유를 불러오는 제약과 제한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관계가 건강해지려면 서로 독립성을 잃어야 합니다. 어느 한 편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양쪽 다 서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그대에게 맞추겠습니다. 내가 달라질게요. 나를 희생해서라도 그대를 섬기겠어요." 한쪽은 철저하게 헌신하고 베푸는 반면, 다른 한쪽은 명령하고 받기만 한다면 착취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양쪽 모두를 억압하고 왜곡하게 될 것입니다. 언뜻 보면, 신과의 관계는 본질에서 비인간적입니다. 일방적, 그러니까 신 쪽의 일방통행이어야 합니다. 거룩한 존재인 신은 모든 권능을 거머쥐고 있습니다. 인간은 신에게 맞춰야 합니다. 신이 인간 편에 적용하고 섬긴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신앙 형태에서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기독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육신과 속죄 사역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맞췄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 고통을 겪고 죽임을 당할 만큼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인간의 한계 (죄인)를 받아들였으며 인류를 용서하기 위해 대신 죽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한없이 심오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에게 맞추마. 내가 달라지겠다. 나를 희생해서라도 너희들을 섬기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똑같이 고백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고후 5:14 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한 번은 어떤 친구가 C.S.C.S. 루이스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게 쉬운 일인가? 루이스는 대꾸했습니다. "사랑하고 있는 이들에겐 쉽지, ","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를 기쁘게 해 주고 싶게 마련입니다. 누가 나서서 부탁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든 다 해 주려 합니다. 상대를 즐겁게 해 줄 일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연구하고 공부합니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그 일을 합니다. 돈이 들고 큰 불편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말만 해요 바라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보고 어안이 벙벙해진 친구는 완전히 코가 꿰이었군'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랑에 빠진 당사자의 속마음은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크리스천과 예수 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크리스천을 구속합니다. 예수 님이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켜 자신을 주셨는지 알고 나면, 두려움 없이 자유를 포기하고 그분 안에서 참다운 자유를 찾아 누리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하여 자원하여 기쁨으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시킨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수록 감동으로 다가올수록, 그 사랑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나도 기꺼이 당신의 종이 되겠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고백 속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