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자녀의 특권
본문: 롬 8:14-25
2. 명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라. 명령적 명제
3. 제목: 하나님 자녀의 특권
갈등: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이며, 그것이 왜 특권인지 알려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14절 ”곧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친아들이자 친딸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창조의 절정이자 구속의 목적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듭니까? 로마서 8장 14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을 소유했다고 명확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우리가 성령과 함께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죄에 대해 온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를 제압하는 이 위대한 능력을 왜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13절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곧 우리는 성령이 미워하는 죄를 미워하고, 성령이 사랑하는 일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15절은 그리스도인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양자'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아들이 되다'라는 의미로, “입양"으로 정확히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자의 신분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잃어버려졌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우리는 영적인 고아요, 죄의 노예들이었습니다. 둘째, 입양의 비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하나님에 의한 법적인 행위에 전적으로 달린 것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얻거나 부모를 얻기 위해서 '흥정하지 못합니다.‘ 입양은 부모 편에서 일방적으로 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법적인 행위입니다. 자녀가 양자 지위를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녀의 신분은 다만 주어질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9절에서 바울은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소생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노스는 대게 후손을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속에 담긴 모든 풍성함을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분명하게 남겨 둡니다. 요 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자녀 됨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2. 갈등심화: 하나님의 아들이 누리는 특권들
로마서 8장 15-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일곱 가지의 엄청난 특권에 대해 선언합니다. 첫째는 안전입니다. 15절에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자녀 됨을 누립니다” 종업원이나 종은 기본적으로 직업을 잃거나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복종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는 그 관계를 잃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둘째는 권세입니다. 15절“우리의 신분은 종이 아닌 자녀입니다” 종은 집에서 어떤 권세도 갖지 못합니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죄와 사탄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자녀들은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하며 자신 있고 기품 있게 처신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놀랍고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습니다. 셋째는 친밀함입니다. 15절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나님을 아빠(Abba)라고(Abba) 부릅니다” ’아바'는 원래 아람어인데,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아빠'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마틴 로이드 존스가 '아빠'는 어린아이가 내는 혀 짧은 소리라고 표현했습니다. 15절"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에서 “부르짖는다"에 유의합시다. 그것은 큰소리를 내어 외치는 것으로 깊은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지적으로,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녀가 아닌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예배와 기도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아는 자녀의 자발성이자 확신입니다. 넷째는 확신입니다.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우리가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짖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성령은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참 가족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이러한 성령의 '증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어 왔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그래, 하나님은 나를 정말로 사랑하셔"라고 하는 내적인 증언이라고 보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증언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바로 영어의 '순교(martyr)'라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원래 이 말은 까다로운 사건을 의심의 여지없이 해결해 줄 권위 있는 증인을 의미했습니다.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재판이 진행 중이고 피고는 범죄 행위로 기소되었습니다. 피고에게 불리한 증거도 있고, 반대로 유리한 증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갑자기 결정적인 사실을 입증할 새로운 증인이 등장합니다! 증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그곳에 있었는데, 피고는 없었습니다. 피고는 무죄입니다!" 이 증인은 피고와 ”더불어 증언합니다." 피고와 똑같은 진술을 하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승소 판결을 이끌어 냅니다. 다섯 번째는 17절 “상속권,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우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장자가 상속자였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여럿 있다 해도, 상속자가 가문의 이름도 잇고 재산의 가장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부릅니다. 상속자는 부모의 재산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차지하기에 이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것이 너무나 크고 영광스러워서, 저마다 자신이 하나님께 가장 많은 상속을 받았다고 느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또한 상속자에게는 이런 특권이 있습니다. 17절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우리가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여섯번째는 아버지들은 항상 자신의 자녀들을 연단시킵니다. 부모는 자녀를 연단시킬 때, 나중에 훨씬 더 큰 고난을 초래하게 될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가벼운 고난을 먼저 허락합니다. 좋은 아버지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훈련시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는 연단을 통과하는 것은 우리에게 힘겹지만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일곱 번째는 가족과 닮아 갑니다. 17절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뿐만 아니라, 그들이 특별히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겪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폭로하시고, 심판을 경고하시고, 자신을 통한 구원을 선포하시는 메시아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가족인 우리도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에 대해 말할 때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9절"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했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고,” 비록 우리가 양자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심어 주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 갑니다. 즉 한 가족으로 같은 고난을 당하면서, 점점 더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성격과 태도를 닮아 갑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3. 전환: 어떤 영을 따라 살 것인가
이 모든 특권들은 15절"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라는 바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 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두 가지 다른 방식 곧 종으로서 살아가는지, 또는 아들로서 즉 자녀로서 살아가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힘을 받은 후에도 종의 영을 '다시' 가질 수 있습니다. 행위로 인정받으려는 태도로, 마치 자신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더 받거나 계속 받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가족을 버리고 멀리 떠나 방탕하게 살다가 아버지께 받은 유산을 모두 당진해 버렸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들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품꾼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기만을 바랐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둘째 아들과 같은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쉽습니다. 우리는 곧잘 이렇게 말합니다. "아, 나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만한 어떠한 가치도 없어!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품꾼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밖에 없어. 내가 일을 잘하면 하나님이 품삯을 주시겠지. 그분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나에게 호의를 베푸셔서 나를 보호해 주실 거야. 하지만 내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내쫓기고 말 거야."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육신의 부모조차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아이가 저지른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내 자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이렇듯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기준에 맞는 성과를 내었는가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양자의 영'은 우리가 고용주나 주인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본래 우리는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종의 영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이와 같은 모든 태도를 없애 줍니다. 즉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가장 깊은 영적이고 감정적인 안정감을 줍니다. 이 안정감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로서, 또한 한 가족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짖습니다. 종의 영과 아들의 영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종은 강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복종한다. 고통받거나 빼앗길까 두려워서 일한다. 실수하면 주인에게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눈에 보이는 행위에 집중하고 규정들에 따른다. 일을 해야 하지만 어떠한 명예도 얻지 못한다. 반면 자녀는 '아빠'에 대한 사랑과 기쁨으로 순종한다. 연단은 벌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훈육임을 안다. 실수해도 아버지께 용서받을 것이라는 안정감이 있다. 관계와 태도에 집중한다. 명예롭게 되었고 함께 일하도록 초대받았다. ”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얼마 동안은 애쓰지만, 이내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서 어떠한 가치도 찾지 못하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18절“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의 말을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당신이 장차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안다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고난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난은 자녀의 특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4. 대단원: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2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미 가진 것과 가지고 있지 않는 것 한 가지씩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습니다. 추수의 첫 번째 열매는 말 그대로 앞으로 올 것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죄와 죽음의 영향력으로부터 우리의 내면을 점진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어서, 29절 “우리가 서서히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장차 성령을 통해 우리의 몸과 영혼이 죄와 죽음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될 때를 미리 맛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장차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은, 23절"양자 될절"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간절히 기다릴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15절에서 우리가 이미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또다시 양자 될 것을 기다리라고 하는가요? 이는 우리가 법적으로는 입양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새로운 가족들과 완벽하게 닮지 않았고 자녀로서의 최종 축하 행사를 즐기지도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미 양자가 되었고, 결국에는 완전한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어떤 면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조금 성장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예전보다 성격상 약점이 줄어들고, 더 사랑스러워지고 보다 경건하게 사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거절과 허무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기 위한 고난과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한 고통이, 우리가 고대하는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갖게 될 모든 것들을 아직 가지지 못했고, 지금의 모습도 장차 얻게 될 온전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우리 앞에 있고 우리의 모든 고통들은 뒤에 남겨질 것입니다. 고난이 지나갈 것을 알기에, 지금의 삶이 끝은 아니기에, 25절 “우리는 간절히 그리고 오래 참으며 기다립니다.” 우리는 C. S. 루이스가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묘사한 그날을 고대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연약하고 추한 인간이라도,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과 기쁨과 지혜와 사랑으로 불멸의 존재로, 그분 자신의 다함없는 능력과 아름다움과 선함과 지혜로움을 완벽하게 반사하는, 티 없이 맑은 거울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 과정은 길며 부분적으로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겠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 이하는 없습니다. 그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이러한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에, 지금 어떤 고통이 오더라도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소망 가운데서 능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