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love 2024. 2. 11. 14:44

1. 본문: 8: 26-30

2. 명제: 그리스도인은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다. 가능성의 명제

3. 제목: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1. 갈등: 그리스도인의 확신의 토대

오늘 본문 26-3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가진 두 가지 확신의 토대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기도할 말이 없을 때 성령이 하시는 일을 가리키고, 두 번째는 우리 삶의 모든 상황 가운데 절대주권을 지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다 18절의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광을 포함하여 세 가지 확신의 토대, 장차 우리에게 니타날 영광 곧 미래의 소망, 성령의 도우심, 그리고 모든 것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31-39절에서 바울이 보여 주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 로 시작하는 뜨거운 질의응답의 기초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롬 817-18절에서 암시된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에 대한 바울의 결론입니다. 8:17-1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우리는 어떻게 모든 믿음의 싸움에서 항상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면서 삶의 고난과 유혹에 맞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첫 번째 답은 26절에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 때에 나옵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거나,, 일생일대의 문제와 씨름하기도 하고, 아니면 자신의 잘못이나 실패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기도할 수 없는 바로 그때 성령께서 우리 기도를 도우십니다. 26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동하기에, 곧 아버지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기에 우리 자신이 너무 약하다고 느껴질 때 성령이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도 기도를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속의 탄식을 들으시며 간구 뒤에 있는 우리의 감정과 진의를 알아내십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기도를 하도록 해주십니다. 이렇듯 우리의 기도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관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께 부르짖을 수 있을까요? 더글러스 무(Douglas Moo)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는 성자는 우리에 대한 모든 고발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나아가 심판의 날,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신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 마음속에서 중보 하시는 성령은 우리의 불확실하고 힘든 세상살이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성부께 설득력 있게 간구하신다 ““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십니다.

 

2. 갈등 심화: 좋은 일, 나쁜 일. 그리고 실패

두 번째 답은 28절에서 알 수 있는데 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좋은 일과 나쁜 일, 그리고 실패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약속입니다. 첫째로, 그것은 일상에서 겪는 좋은 일에 감사하고 기뻐하게 해 줍니다.. 바울은 일들이 스스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요소들을 우리에게 선한 방향으로 바꾸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멋진 곳이거나 인생이 그 자체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비극과 엄혹함을 경험한 후에야 충격을 받고 환상에서 깨어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저절로 선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일이 되어 갈 때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 뿐입니다. 일이 잘될 때 그리스도인은 절대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일로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달콤하고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관점으로 보지 않고서도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진리는 삶이 잘못되어 갈 때 찾아오는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 줍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들 속에서 일하신다면, 거기에는 그분의 계획 속에 우리가 보기에는 보잘것없거나 무의미한 일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16:33”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 이 진리에는 우리를 평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먼 우연이나 운명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지 않습니다. 우주는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 굴러가는 기계장치가 아니라, 한 분 우리 아버지에 의해 다스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면서 겪게 되는 문제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진리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게 돕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면, 우리 삶을 더욱 선하게 만들기 위해서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를 쓰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놀라운 본문을 읽은 후 존 뉴턴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분이 허락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그분이 만류하시는 것은 어떠한 것도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기에 필요한 어떤 좋은 일을 하나님이 만류하셨다면,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어떤 나쁜 일로 인해 우리 삶이 엉망이 되었다고 느낀다면, 실제로 그것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쁜 그 일은 우리를 가르치고, 인격을 다듬어 겸손하게 하고,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로마서 828절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어려움들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게 해 줍니다.. 물론 살면서 겪는 어려움에는 고난도 포함됩니다. 828절은 고난에 대해 사람들이 갖기 어려운 균형 잡힌 관점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겪으면 절망 가운데 빠져 “여기서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러한 태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고난을 껴안는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고 고상해진다고 여깁니다. 본문은 고난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들이 선을 되도록 역사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즐기거나 환영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 고난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결과들은 우리에게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셋째로, 828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우리가 훼손할 수는 없다는 확신을 줍니다. "모든"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는 우리의 퇴행과 죄까지도 포함됩니다. 물론 죄는 늘 나쁘고 끔찍한 것이어서, 우리는 죄의 고통스러운 결과를 받을 때 후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엮어 내어 결국에는 우리의 선을 이루실 만큼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살피고, 그리스도를 더 잘 알기 위해서, 우리의 죄와 실패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죄를 사용하셔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덧없음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죄를 통해 역사하기도 하십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에게 창 50:20절50: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전환: 모두가 선을 위한 것이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하나님이 선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는 아닙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약속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에게만“ 해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는 모두 그리스도인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대개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헌신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헌신이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그분을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14:21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성경에서 사랑은 단지 지적인 이론이나, 정서적인 감정, 혹은 의지로 수행하는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이란 마음을 정하고 어떠한 일을 하든지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바울이 ’’ 믿는 자' 대신에 '사랑하는 자라고 말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확신한다.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여부를 즉각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한 가지는 역경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시험이나 시련이 생기면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버림받았다고 느낍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분께 헌신하고 역경이 와도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받는 것 때문에 그분을 이용한다면 역경이 올 때 곧 손을 놓아 버릴 것입니다. 바울은 삶의 모든 상황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이 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하게 암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모두 뜻하신 대로 바꾸어 사용하시기 때문에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선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비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모두 그들에게 좋지 않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그럴까요? 바울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이 롬 1:24"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라고 단언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시는 가장 무거운 형벌 중 하나가 그들을 죄의 욕망대로 살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선한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맙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어쨌든 나쁜 상황에 직면하면 인간의 참모습, 곧 의존적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로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비 그리스도인이 일련의 성공과 쾌락을 경험하게 되면, 착각이 오히려 더 커져서 가장 큰 죄인 교만과 과도한 자신감, 자기 중심성이 자라 그 마음을 장악해 버립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좋은 상황은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교만하게 하거나 기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리석고 이기적으로 만들어 재앙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반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나쁜 상황에서도 오히려 겸손하게 교훈을 얻으며, 남을 배려하는 품성을 갖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이처럼 좋은 상황이 어떤 이에게 끔찍한 일이 될 수 있고, 반대로 나쁜 상황이 굉장히 좋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고후 12: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으니 바울 사도는 삼층천 즉 천국을 보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 사도가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인간의 힘으로 고치기 어려운 가시 즉 육체의 병을 자신에게 허락하셨다고 인정하면서 그 가시를 오히려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달리 말해 우리 삶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특정한 상황들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상황들을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28절을 믿고 묵상하며 그대로 살 때, 우리는 인생의 성공과 불행을 모두 같은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성공과 불행 모두를 사용하셔서 결국에는 우리의 삶을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확신은 미래에 대한 소망, 성령의 내적인 역사, 그리고 삶의 모든 상황에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분의 역사하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29-30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높은 것입니다. 성경 29절 헬라어 원문에는 호티 '왜냐하면(for)'라는 접속사가 28절과 29-30절을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29-30절은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시는지, 곧 하나님의 목적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왜 바울은 28절에서 끝내지 않고 29절과 30절을 더했을까요? 28절은 어떤 일반적인 의미에서 좋은 결과 즉 세상에서의 성공과 축복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는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성화와 거룩함, 그리고 구원을 가져온다고 강조합니다.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결국에는 29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시는 ''이 다름 아닌 우리의 인격이 새롭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처럼 사랑스럽고, 고귀하고, 참되고, 지혜롭고, 굳세고, 선하고, 기쁨을 주고, 겸손하시며, 관대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28절을 하나님이 비 그리스도인들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좋은 것이나 유리한 상황을 주시는 것으로 읽는데, 이것은 바울이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쉽고 편안한 삶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비 그리스도인들보다 나쁜 상황을 덜 맞이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우리 마음을 가르치시고, 겸손하게 하시고, 갈고닦으셔서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29"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했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 드러납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하십니다. 모형이자 원형이신 당신의 아들을 가지신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다듬고, 윤내고, 녹이고, 매끄럽게 하고, 조각하고, 짜 맞추고, 주조하고, 형상을 빚어서 원형에 가깝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완벽한 틀 속으로 우리를 부어 넣으십니다. 본받게 한다는 것은 겉모습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닮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면 깊은 곳, 즉 안에서부터 밖으로 새롭게 빚어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간다는 것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법적으로만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것이 아니라, 같은 가족으로서 그 모습에서도 닮아 가고 있습니다. 거듭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과 유전자를 받아서 벧후 3:18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상황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로 다듬어 가십니다.

 

4. 대단원; 어떤 선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이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히 2:10-12“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이 가르침을 듣고 나서 거룩하게 성화하고자 하는 가장 깊은 열망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당신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듣고도 거룩해지려는 간절함이 생기지 않는다면 당신의 믿음은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래, 나는 괜찮아. 내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어. 나는 구원받았으니까'라고 말한다면 잘못 이해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 닮기를 원합니다 라는 기도 제목이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여러분이 가장 사모하는 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