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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불신앙

wordlove 2024. 2. 25. 14:41

1. 롬 9:1-13

2. 명제: 택하심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유대인의 불신앙

 

갈등: 유대인의 불신앙

많은 사람들은 로마서 9-11 장이 앞의 1-8장이나 그 뒤의 12-16장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1-8장은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의롭게 하신 백성들을 위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12-16장은 우리가 의로운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8장 다음에 바로 12장이 와야 편지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데, 그 중간에 복잡하고 난해한 9-11 장이 끼어들면서 멀리 둘러 가는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9-11장은 왜 여기에 기록된 것일까요? 로마서 8장은 구원이 우리 자신의 의지나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보장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바울의 확신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마무리됩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여, 구원의 완성을 향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30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누군가 바울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선생, 잠깐만요!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시면 항상 천국에까지 인도하신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불러 그들에게 직접 오셨는데, 그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부르심의 목적이 좌절될 수도 있나 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 혹은 긍휼이 잘못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이처럼 유대인의 불신앙에 관한 문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했던 1세기 교회들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2. 갈등 심화: 그치지 않는 바울의 번민

로마서 9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울의 감정적인 번민입니다. 바울은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후 6:4-10절에서 그는 매질, 난파, 굶주림, 비웃음, 중상을 이겨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1-3절의 내용은 더욱더 놀랍습니다. 1-2절에는 바울이 말하는 바의 심각함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과연 진심이었다 ““ 왜일까요? 3"나의 형제 곧 내 골육 친척 이스라엘 사람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이다바울은 그리스도를 알았고 그분의 의를 누린다는 것과 그 구원을 거부할 때 받게 될 결과까지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의 말에 우리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든 나의 유대인 형제자매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앞서 로마서 1-8장에서 말했던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유익들을 기꺼이 포기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진면목을 엿보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최고 관심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족이 구세주를 버린 것을 보며 그치지 않는 고통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못 본 체하거나 무효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교리를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그것을 짊어집니다. 우리가 9-11장에서 나오는 진리들과 씨름하려면, 바울이 91-3절에서 자신의 구원을 포기하고서라도 유대인들이 구원받기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썼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었고, 또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그들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려 주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특권을 받았습니다. 4-5절에서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유대인이 누린 유익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주목한 것은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첫째, 양자 됨은 출애굽기 422절과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 받았음을 가리킵니다. 4: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따라서“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도록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영광은 히브리어로 쉐키나인데, 하나님이 성막과 성전 가운데 거하신다는 표시로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가 더 확실하게 드러난 사건이자 표시가 곧 예수님의 성육신이었습니다.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 셋째, 언약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윗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과 맺으신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들 각자와 새롭게 관계를 맺으셨고 모두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더불어 이들 모두에게 약속을 성취하실 메시아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율법을 세우신 것은 십계명과 다른 모든 율법들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우리 자신에게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고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소망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섯째, "예배"란 성전에서 드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식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91-5절에는 성전에서 예배하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곧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피의 제물, 정결 예식을 위한 씻음과 준비 과정, 그리고 사람들을 대신해서 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예법들을 살펴보면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속죄할 제물의 피와 우리를 대신할 제사장이 꼭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과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 그리고 우리를 위한 정결이자 빵이 되셨습니다. 여섯째, 약속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약속한 구약의 수많은 예언들과 약속들을 지칭합니다. 일곱째, 조상들은 아마도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뿐만 아니라 요셉,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그리고 다윗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물론 어느 민족이나 위대한 지도자들이 많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들 대부분은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고 또한 미리 보여 주었습니다. 여덟째, 5절에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예수님은 유대인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시려면 특정한 민족과 문화의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되심으로써 그들에게 큰 영광을 주셨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민족보다 더 쉽게 하나님의 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3. 전환: 이스라엘이라고 모두 이스라엘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수 없이 약속되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자신들의 왕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요? 우선 바울은 6절에“6절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라며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여지지 않았음을 단언합니다. 한가지 대답을 배제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약속들과 언약들을 족장들과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을 복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6절에서"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말하며 중요하고 근본적인 구분을 짓습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후손들 중에서 참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이 있고, 반대로 그 후손이 아닌 사람들 중에도 참된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롬 411-12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료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절에서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이것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된 의,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라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사례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그에게는 이삭과 이스마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7"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중 한 사람만을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에게 육신의 아들이었지만 영적인 후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서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이 약속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이어 바울은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인 야곱과 에서를 예로 들며 그 원리를 다시 보여 줍니다. 그들이 10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 되었기에 둘 다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그중 한 사람만이 영적인 후손이 되어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보다 더 깊이 논의합니다. 왜 아브라함의 자손 중 어떤이는 참된 이스라엘이고, 다른 이는 그렇지 않은지, 이 곤란한 질문에 대해 답합니다. 나아가 바울은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는가라는 더 포괄적인 질문까지 대답합니다. 첫 번째 답은, 하나님은 이미 에서가 아닌 야곱을 축복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두 번째 답은, 그 택하심은 두 아이의 삶이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식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가 당신의 길을 받아들이고 거부할지 미리 아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11절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단언하면서 택하심의 핵심을 재차 강조합니다. 세 번째, 야곱과 에서에게 있는 유일한 차이는 11"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택하심에 해당되는 헬라어 에클로게는 '뽑다' 혹은 '선택하다'는 의미입니다. 거기에 더해 13절에서 바울은 예언자 말라기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어 표현했습니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여기서 하나님의 미움을 우리가 일상에서 품는 감정적인 미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그들의 가족들을 눅 14:26“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부모를 미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이유가 에서보다 탁월한 도덕성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약속을 받은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택하심 덕분이었습니다. 바울의 이 대답 때문에 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 혼란스러워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로마서 9-11장을 건너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선 까다로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 번째, 이 말은 하나님이 자의적이라는 의미인가요? 그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것을 고를까, 알아맞혀 봐!"라는!" 식으로 사람을 선택하시는가요? 바울은 이에 대해 하나님이 아무런 이유 없이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선택의 이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더 유리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번째, 선택론은 풀기 어려운 많은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그것을 고집해야 하는가요? 사실 이것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수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모든 대안들이 더 많은 난제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것을 빼버리면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중심 진리가 위태롭게 됩니다. 더 겸손하거나 더 관대하다고 해서 구원받을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면, 결국 우리 인간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는 장본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행위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4. 대단원: 하나님이 실패하셨는가?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고 말았는가요?"라는 질문에 대해 답변을 줍니다. 첫째,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은 육신의 후손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이어받기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인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둘째, 바울은 약속을 물려받는 영적인 믿음이 결국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말미암는다고 확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모두를 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믿지도 않았습니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장차 수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기서 택하심의 가르침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유롭게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여러분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는지 어떻게 압니까? 아는 방법은 지금 여러분이 예수 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 선택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이제 죄짓고 살아도 되겠네요?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롬 6: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 은혜받았으니 막살아도 괞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 하나님의 은혜를 모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롬 7: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은혜의 힘은 나로 하여금 내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도구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은혜가 나를 변화시킵니다.. 감사함으로, 자원 함으로도, 기쁨으로 날 구원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은혜가 임하셨습니까? 그 사람이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