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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불의 하신가?

wordlove 2024. 3. 3. 14:41

1. 롬 9:14-29

2. 명제: 택하심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 하나님이 불의 하신가?

 

갈등: 하나님이 불의하신가?

로마서 914절의 첫 부분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물론 바울이 이 질문을 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처음 선택에 대해서 들었을 때 이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아니라 그중 일부만 선택받는다는 건 불공평하지 않나요?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건가요?"하지만 바울은 반박합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불공평하지 않으시다." 14-18절에서 바울은 논의의 초점을 족장들의 믿음에서 모세와 바로의 시대로 옮겨 갑니다. 여기서의 중심 논제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18-19절에서 모세는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더라도 계속해서 그들 중에 함께해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제발 당신이 누구시며, 왜 하나님인지 저에게 보여 주소서"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이랬습니다. 33:19"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915절에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성품 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변덕스러운 독재자의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긍휼히라는 말뜻에는 의무라는 의미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긍휼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긍휼은 분에 넘치는 것을 받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베푸는 사람의 전적인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에게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말은 모순이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누구에게도 구원을 빚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어느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았다면,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시든, 일부에게만 베푸시든, 아니면 아무에게도 베풀지 않으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입니다. 존 스토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선포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고 있다. 이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추론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질문 자체에 논리적인 오류가 있음을 알려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가 아니라 긍휼에 기초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 구원은 16"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기로 택하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으신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우리의 성과나 권리가 아닙니다. 도심 빈민가의 학생 스무 명을 택해 이들에게 학비 전액을 지원하기로 결심한 부자를 예로 들어 봅시다. 사실상 비슷한 자격을 갖춘 수천 명의 학생들이 있을 것이고, 그도 스무 명이 아니라 더 많은 학생들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스무 명만 도왔다고 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불공평하게 처신했다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부자에게는 특별히 어느 누구를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그가 베푼 것은 긍휼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을 요구하지 못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긍휼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긍휼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으신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베푼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을 노예로 만들고 자유를 억압한 이집트 왕 바로를 주목합니다. 바로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이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17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긍휼을 베풀기로 택하신 자들에게 기꺼이 긍휼을 베푸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18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도 하십니다 이 단락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17-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인간의 책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의 예로 바로를 듭니다. 출애굽기 4-14 장에 나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4:21"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가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출 8:15"네가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바로가 원래 좋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완고하고 차갑게 바꾸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출애굽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노예로 삼고 영아 살해를 통해 멸족시키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내용과 함께, 바로 스스로도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내용도 많습니다. 둘 다 맞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로마서 124절에서 이것에 관해 이미 말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 “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께 저항하기로 마음먹었고 하나님은 바로가 그렇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바로가 스스로 택한 것을 하나님이 그냥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실 때는 그 완악함을 직접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단지 자신이 택한 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하나님은 완악하게 되고 싶은 사람들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신 사람들은 완악하게 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죄에 빠져 들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제한하고 억제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혼돈과 지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더 이상 제어하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든지 완악해지고 말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시지 않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거절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3. 전환: 우리에겐 따질 권리가 없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풀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는 것이 왜 불공평한 일이 아닌지 더 자세히 논증합니다. 바울은 이미 스스로 완악해진 바로의 사례를 통해 질문에 답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 세 가지 정도 더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20-21절에서 우리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물이 있다고 나무라십니까"라며 하나님의 '공평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창조주께 의문을 제기할 지혜도 권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심판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가공하고 있지는 않는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21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다 ““ 둘째, 22절에서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우리를 멸망시키는 장본인은 우리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22하나님이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라는“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참아 주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들이 받아 마땅한 것으로 갚지 않으십니다. 그다음에 바울은 이 진노의 대상이 멸하기로 준비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누구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고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반면 23절은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라고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진노의 대상이 스스로 멸망받기로 준비되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택한 대로 그들을 삶과 죽음에 넘겨주십니다. 셋째, 92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내버려 두심으로써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비의 핵심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거나 아니면 모든 사람을 멸망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암시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제기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남겨두는 하나님의 택하시는 과정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계획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결국은 더 적합할 것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지도 못하고 무엇이 최선인지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우리를 선하게 만드십니다. 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리시면 사람들은 자신이 택한 대로 완악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누군가 구원에서 멀어지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지만, 누군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이 이율배반에는 지금 우리의 지식으로는 풀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과 역사, 경험과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제임스 케네디(D. James Kennedy)의 다음과 같은 비유는 우리의 이해를 도와줍니다. 다섯 사람이 은행을 털기로 모의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의 친구들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서 나는 그들에게 간청하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빌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나를 밀쳐내고 출발했습니다. 그때 나는 한 친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그와 뒤엉켜서 싸웠습니다. 한편 다른 친구들은 은행을 강탈했습니다. 은행 경비원 한 사람이 죽었고, 친구들은 체포된 후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가담하지 않은 그 친구는 사형을 면했습니다. 여기서 당신에게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네 사람의 친구가 죽은 것은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구형을 모면한 그 친구는 '나는 아주 착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요? 그가 자유로운 이유는 내가 그를 제재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지옥에 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는 어느 누구도 책망할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천국에 가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어느 누구도 찬양할 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할렐루야! 아멘!

 

4. 대단원: 하나님의 놀라운 반전

이제 바울은 유대인의 불신앙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24절에서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이 부르셨습니다. 족장들과, 출애굽기에 이어 바울은 예언자들의 시대로 옮겨 갑니다. 바울이 25-29절에서 인용하는 구약 성경의 네 가지 말씀은 하나님이 약속들을 이행하실 때, 가끔은 놀라운 반전을 통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의 한 때 역사는 하나님이 어떻게 내 백성"을 부르시는지, 그리고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어떻게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호세아서를 인용합니다. 이 바울은 지금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보여 주는 원형으로서 호세아서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복 받을 만한 자격도 없고 또한 복 받을 것이라고 예언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인데 항상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기 위해 몰려오는 것이야말로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구약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사야를 통해 27"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고 약속하셨습니다. 2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 있었다 ““ 이스라엘이 공의로운 심판을 면한 것은 29오직 하나님이 남은 자에게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제넘게 생각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늘 물리치셨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람들을 거부했다니 이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놀라운 반전을 통해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분에 넘치는 복을 하나님이 원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택한 바대로 그들을 생명과 죽음에 넘기십니다. 아브라함의 때와 모세의 때와 예언자들의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늘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는 이 복은 참으로 크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3:12-13”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히 3:13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 주님의 부르심의 은혜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겸손히 무릎 꿇고 두 손 들고 그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사랑받는 택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은혜받은 우리는 어떻게 이 은혜를 누리며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은혜의 선물을 거저 받았으니 감사함으로 거져 전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아낌없이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선택받은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믿게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 전해야 될까요? 그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상을 떠나도 믿지 않는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노년이 될수록 마음의 완악함으로 믿음이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믿으십시오. 일찍 예수님을 믿는 그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