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love 2024. 3. 24. 14:54

1. 본문:요일 5:2-3

2. 요약: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계명은 그에게 무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주제: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

4. 테마: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하는 길

5. 명제: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하는 길은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같이 가고 있는 여부에 달려있다. (평가적 명제)

6 목적: 참 신앙의 진실성의 잣대는 그리스도인 생명의 총체성에 비추어 보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7. 질문 제기: 이유가 무엇인가?

8. 전환 문장: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하는 길은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같이 가고 있는 여부에 달려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9. 대지

10. 제목: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총체성

 

설교 제목이 그리스도인 생명의 총체성입니다. 총체성이란 단어의 의미를 아십니까? 이 단어를 철학자 헤겔이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자신이 성장하면서 겪는 모든 국면과 단계들이 모든 영향을 미쳐 지금의 내가 되었듯이 나를 만든 모든 국면과 단계들이 총체적으로 나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믿을 때 오신 하나님의 생명이 총체적으로 나의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이 서신을 쓸 때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삶의 말년을 맞고 있었으며, 초대 그리스도인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남기기 원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점점 더 나아져 마침내 모든 것이 완전해질 것이라는 식으로 낙관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 벧전 1:18"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복음의 본질적인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가 계속 강조하는 주요 메시지가 나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기 원한다면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그러한 교제를 누리기 원한다면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이 메시지를 계속해 설명하되 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그러한 교제를 누릴 수 있음을 항상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교인들이 그러한 유익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언급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메시지와 믿음에 충실하고 착념하라. 그는 2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말했습니다. 혹자는 이 말이 요일 4: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내용과 반대된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방법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러분이 형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방법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일 4:20에서 요한이 형제를 먼저 사랑하고 그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한 것이 아님을 지적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하는 길은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같이 가고 있는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는 참 신앙의 진실성의 잣대는 그리스도인 생명의 총체성에 비추어 보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하는 길은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같이 가고 있는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인 생명의 총체성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항상 살아 있고 유기체적인 그 무엇입니다. 인간의 몸은 손가락과 팔과 팔뚝 등과 같은 모든 지체를 모아 함께 붙여 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몸이 아닙니다. 몸은 유기체입니다. 살아 있으며 본질에서 전체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각 지체는 단지 몸의 일부일 뿐입니다. 요한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내가 특정한 사항들을 믿을 뿐 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의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같은 것이 나타나기 전에 그것들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이를 부정적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이런 요소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생명이 있는지를 심각하게 의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자신을 진지하게 점검해야 하며 과연 생명이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활동이나 호흡 등이 있을 것입니다. 호흡이나 어떠한 활동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 있다고 말하기 전에 그에게는 생명과 관련된 본질적인 특정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영적 생명에 있어서도 꼭 그러합니다. 요한은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 이미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분의 계명들을 지킴, 형제를 사랑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님, 요한이 주장하는 이 모두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표현된 그것 중 일부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단지 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어떤 체험하는 것이나, 특정한 감정을 지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단지 특정한 유형의 윤리적 삶을 사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특정한 감정이나 느낌을 지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 생명이란 하나의 총체적인 생명이며, 항상 특정한 요소들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하는 길은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같이 가고 있는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번째 이유는 생명의 유기성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는 요한의 특별한 방식을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생명이란 총체적인 것이며 유기체적입니다. 이제 나는 한 가지 특정한 부분을 점검해 보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 생명의 표현 중 하나와 관련해 과연 그것이 실제로 내 생명 속에 있겠냐고 마음속으로 고민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발견하는 제일 나은 방법은 특정한 부분과 더불어 시작하기보다 다른 요소들이 거기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에게는 생명이 없으며, 여러분이 생명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를 일종의 순환 운동으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요한이 활용하는 원칙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는 때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해 형제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또 어떤 때는 형제 사랑으로부터 출발해 하나님 사랑에 도착합니다. 그런가 하면 계명들로부터 출발해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으로 나아가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고 있으며 우리를 형제 사랑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기서는 다른 방식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총체적이고 유기적입니다. 요한이 이처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 즉 초대 교회에 침투한 이단자들로 말미암은 무서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 점을 계속해 상기시켰습니다.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교사들에 대한 언급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다고 자신을 설득시키기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 전체가 단지 신비한 감정이거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 이를테면 친절하고 우호적인 태도일 뿐이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또한, 기독교 전체가 단지 생명과 삶의 특정한 윤리적 특성일 뿐이라고, 신학 서적을 읽고 그것에 관해 논하는 것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준다고 말하기는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말했습니다. 마귀가 너희가 그렇게 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그는 흥미를 끄는 어떤 것에 관심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나는 이런 총체성과 유기성을 지니지 않으면 현혹되고 있다는 사실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그릇 인도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과 적그리스도들이 너희를 타락하게 했습니다. 이 생명은 총체적인 그 무엇입니다. 그것 전부를 지니지 않으면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셈입니다. 여러분이 출발할 때부터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는 온전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성인이 되면 결국 온전해질 것에 관한 모든 약속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태아 속에서도 생명을 간파할 수 있으며, 그 생명은 완전히 성숙한 성년에게서 총체적이듯이 태아에게서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토록 무서운 자기기만의 가능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구원의 확신이 모자랐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불확실하다면,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과 동행한다." 말할 수 없다면, 과연 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자기 신앙의 진실성에 대해 점검을 해 봐야 합니다.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하는 길은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같이 가고 있는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지막 이유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열매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2" 사랑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 사도는 여러분 스스로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그 점을 분명히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형제 사랑을 단순한 호감과 혼동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잘생긴 얼굴로 태어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차분한 성품과 기질을 가지고 태어남으로써 거의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듯합니다. 세상의 소란과 번잡함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기질을 갖고서 태어났을 뿐입니다. 그들은 교회라는 공동체와 그 환경을 좋아합니다. 조용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합니다. 찬송가 부르기를 좋아하며 선한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또한, 예배 장소의 전체적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은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단지 자연적 호감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너희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시험하는 방법은 단지 여러분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고 해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2"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제껏 형제 사랑이라고 여겨왔던 것이 전혀 그렇지 않으며 단지 자연적 호감에 불과합니다. 형제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자연적 의미에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기 때문에 좋아한다. 형제 사랑이란 그리스도인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며, 그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들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 등이다. 내 속에 있는 것을 그들 속에서도 발견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이 자연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내 영혼 속에 받아들인 결과의 열매임을 확신한다." 그것이 첫 번째 시험 방법입니다. 다시 한번 요한은 이처럼 말합니다. “단지 제자리에 앉아 너희와 정서나 감정을 살펴보지만 말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떤 시인처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세상만사를 올바로 주관하신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는 "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감정이란 매우 기만적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 주님은 요한복음 14:21에서 그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여러분은 이것들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감상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분을 기뻐하기를 원하며 그분의 계명들을 지킵니다. 또한, 내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도록 이끌지 않는다면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이끌지 않는다면 그것은 순전히 착각일 뿐입니다.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요한은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달리 말해 계명들을 지키는 것에서 모든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마주할 때, 나는 그것들을 불쾌하게 여기는가? 하나님이 불가능한 짐을 내게 지우고 계신다고 느끼는가? 신음하고 불평하며 ", 이 엄하신 주인이 불가능한 일을 내게 요구하신다" 말하는가? 요한은 "만일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가 그러하다면, 여러분은 그것들을 지키고 있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형제들을 사랑하고 있지도 않은 셈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생명 밖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것들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옳다.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이 그러하다. 나는 그리스도와 같아지기를 원한다. 그분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분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총체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들을 지키며, 형제를 사랑하고, 믿음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 생명의 총체성과 유기성과 완전함과 균형 그리고 그 완벽한 형태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때, 그리스도인 생명의 증거는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님, 그분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면 등, 이 모든 부분이 항상 함께하고 있다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