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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라.

wordlove 2024. 7. 28. 15:55

1. 본문: 12:9-16

2. 명제: 복음은 이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라.

 

1. 갈등: 하나님의 자비

12장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전환점입니다. 12장에서 마지막 16장까지는 복음을 토대로 예수님을 믿어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즉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을 제시합니다. 그중에서도 121-2절은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 순종하는 동기부터 살피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1'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충분한 이유는 은혜에 대한 감사뿐입니다.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전부를 내맡기는 것입니다. 제물"은 원래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제물''살아 있는 죽임'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의 태도를 끊임없이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은 복음은 이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요구합니까?

 

2. 갈등 심화: 참된 사랑

그것은 사랑의 관계를 요구 합니다. 9절에는 세 가지 사랑에 대한 명령이 나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첫 번째,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위선적이지 않음의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속으로는 무시하면서 겉으로만 공손하게 도움을 주는 척, 따뜻한 척해서는 안 됩니다. 친절한 문화는 교회는 물론이고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모든 공동체 안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따라서 겉으로는 서로 상냥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중상과 비방,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위선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식 없는 직선적인 사랑' 즉 진실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우리의 사랑은 부정적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 긍정적으로는 "선에 속하여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덕적 질서에 근거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악이라고 하면 "미워해야" 하고,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시는 것에는 그 안에 "속해야" 즉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는 종종 누군가를 사랑할 때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자주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그 사람의 마음과 묶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민이 당신의 고민이 되고, 그 사람의 행복도 당신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슬프게 만들 기 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주고 싶은 감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양육하면서 이러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일관되게 벌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릴 때 훈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어른이 된 후 어김없이 불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같은 문장 안에서 사랑도 하고 동시에 미워도 하라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올바로 미워하지 않고서는 올바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된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가식 없이 직선적으로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분별한 행동이나 관계 때문에 피폐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떤 기분이 들지 생각해 보십시오. 참된 사랑은 속임수와 거짓말, 파괴시키는 죄와 맞섭니다. 참된 사랑은 진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죄와 맞서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받고 싶은 이기적인 욕망일 뿐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기적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을 잃을까 봐 두려워 올바른 것을 행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 사람이 나를 계속 사랑하게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이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서 얻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보다 당신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덕적인 원칙을 무시하거나 죄와 맞서지 못하는 사랑은 결코 진실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잠깐 동안 그 사람을 잃는다 해도 기꺼이 그 사람의 죄와 맞섭니다.

 

3. 전환: 사랑스럽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거짓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마음속으로는 무시하면서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식입니다. 하지만 사랑하기 전에 먼저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다음과 같은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2: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미워하는 마음을 회개할 수 있고 마음이 따뜻해져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복음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사랑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우리가 전혀 아름답지 않았을 때, 즉 죄인 되었을 때, 또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할 때, 우리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 주님! 저는 주님 앞에서 이 사람보다 훨씬 사랑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저를 위해 고통당하시고 죽으셔서 제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실 제가 할 일은 이 사람을 위해 작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일반적인 도덕성과 친절만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불충분한 대안 외에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거짓으로 사랑하는 척하든지 즉 싫어하는 사람에게 상냥함 아니면 선별적으로 사랑하든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친절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나의 죄를 회개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점점 더 따뜻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짓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도 더욱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4. 대단원: 사랑은 무엇과 같은가?

바울은 9절의 세 가지 권고에 이어 10-16절에서 사랑이 무엇과 같은 지에 대한 열두세 가지 권고를 합니다. 이 사랑을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참된 사랑은 끈끈한 가족애와 같습니다.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형제를 사랑하여"(philadelphia)"우애하고"(philostorge)는 가족 간의 혈연관계를 기독교 공동체에 적용한 말입니다. 바울은 마치 혈연관계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족 관계는 가장 기초적이고 본질적인 관계입니다. 형제와 자매, 부모와 자식은 서로가 완전히 다른 가치관과 삶의 양식들을 추구한다고 해도 가족으로서의 끈은 여전히 이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종종 "영원한 나의 형이야혹은 "그래도 여전히 나의 동생이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처럼 서로에게 깊이 헌신해야 합니다. 두 번째, 참된 사랑은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 10"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바울은 빌 2:3절에서도2:3 비슷하게 말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존경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귀하고 가치 있게 대우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신학적 뿌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인성, 창조성, 그리고 영혼 등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한없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이며 마땅히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존중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귀를 열고 그의 희망과 기쁨, 필요, 두려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볼 때는 그 사람 안에 창조주의 형상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로마서 123-4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4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여기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은사를 따라 이웃을 위해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16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 참된 사랑은 자기중심적이지 않습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사람마다 성장 배경이나 성격, 이웃들의 태도에 따라 '낮은 곳'을 다르게 정의하겠지만, "낮은 데 처하며"란 우리 주님처럼 낮고 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컨대 사랑의 본질은 우리 자신의 이미지나, 사회적 지위. 필요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참된 사랑은 인내합니다. 11-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2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이 말씀에서 인내하지 않고는 따를 수 없는 명령이 나옵니다. 얼핏 보면 이 두절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맺는 관계들에 대한 다양한 권고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들 앞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며 "기도"에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아마도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형제와 자매들에게 인내함으로써 본이 되라는 의미인 듯합니다. 또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부딪힐 때 인내와 기도로 맞서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찬송가 3673인내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고통당할 때에 위로하소서 주여 주여 주여 참는 맘을 주여 주여 주여 참는 맘을다른 사람들과 삶으로 깊이 엮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C.S. 루이스의 말대로 우리의 마음이 상처받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에 11""을 내며 12"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의 소망을 기억해야 하며 기도함으로 그것을 맞이해야 합니다. 14절은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인내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복음은 모든 것을 바르게 정리하실 신뢰할 만한 심판관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되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세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평하게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갚으실 것을 알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정확하게 심판하시는지 보여 줍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선한 일을 하다가 환난을 겪었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벧전 2:23"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 복음은 우리에게 공의를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집행하는 것은 우리가 아님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적극적으로 힘써야 합니다. 그때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가 참 사랑입니다. 네 번째, 참된 사랑은 감정과 행동이 동반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3절에서 말하는 핵심은 "당신이 믿는 것을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나의 소유를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함께 즐거워하고 울라고 말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멈추어 서서 다른 사람의 내면세계를 이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우리 자신의 기쁨과 슬픔에 연결함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슬픔을 기억하는 것은 힘들고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기쁨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없는 좋은 것을 친구가 가지게 된다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법니다.. 또 남의 슬픔을 보고 우리는 본성은 고소함을 느낍니다. 바울의 말처럼 사랑은 무엇보다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과 행위, 권리를 희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참된 사랑이란 누군가에게 즉 그 사람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 복음. 주예수 그리스도, 진리와 필요한 도움을 모두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은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요구합니다.. 사랑이란 무엇과 같습니까? 참된 사랑은 끈끈한 가족 애와 같습니다. 참된 사랑은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 참된 사랑은 인내합니다. 참된 사랑은 감정과 행동이 동반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 인간의 결심 의지로로는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비결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12: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비하심이 어느 때에 임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눈에 사랑스럽지 않으셨을 때에,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할 때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나의 미움을 회개할 때 성령님이 따뜻한 마음을 일으켜서 사랑하는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짓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도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