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없는 자들의 실상
1. 본문: 시 1: 3-4
2. 명제: 하나님 없는 자들의 실상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비교적 명제)
3. 제목: 하나님 없는 자들의 실상
1. 갈등: 보편적인 책
전 인류를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세상의 삶을 통과하면서 겪는 온갖 상태와 조건을 다루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관점에서, 즉 시편 1편의 관점에서 행복이라는 이 오래된 문제를 생각해 보길 권합니다. 성경은 결코 구식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지금도 가장 현실적이고 미래적인 책입니다. 다른 모든 인간의 가르침과 철학은 끊임없이 쓰레기 더미에 던져집니다.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묵상합니다. 시편 1편의 또 다른 주장은 사람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고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행복 자체를 추구하면 행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상황에 의해 좌우된다고 시종일관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행복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성경은 행복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와 영혼의 상태와 형편에 궁극적으로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 행복을 경험하지 못할까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너무나 무지합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남이나 다른 무엇에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렇듯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는 한 참된 행복에 이를 가능성이 없습니다. 성경 말고는 인간 자신에 관해 진실을 말해 주는 것이 하늘 아래 없습니다. 사람들이 뉴스를 듣고 신문을 읽습니다만, 언론은 인간에 관한 진실을 말하지만, 그 진실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서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날 언론을 통해서 사람은 누구나 끔찍한 죄의식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무슨 문제가 있기에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주어진 사실과 상황을 보고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언제나 남 탓을 할 뿐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임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죄를 아주 실제적으로 드러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에 관한 진실과 그리스도인에 관한 진실을 계속해서 제시합니다. 성경은 여러 역사를 제시합니다. "저 사람을 보아라. 그가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끝났는지 보아라. 이 가르침을 믿지 못하겠거든, 이 사람의 인생을 보아라. 너를 위한 진리는 인류 역사의 일부에도 나와 있다." 그 다음, 성경은 비유와 그림을 제시합니다. 시편 1편에서도 비유와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의 저자인 다윗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를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자,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한 사람이지. 행복은 내가 이 두 종류 중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어. 어떻게 하면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실감 나게 전할 수 있을까?" 다윗은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한 사람의 분명한 특징 몇 가지를 들려줍니다.
2 갈등심화: 나무인가 겨인가.
다윗은 경건한 자는 그리스도인이며, 불경건한 자는 비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의 차이가 나무와 겨의 차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무엇과 같습니까? 나무입니까, 겨입니까? 경건한 사람은 3절"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악인(불경건한 자)들은 나무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엇과 같습니까? 다윗은 말합니다. 4절“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한번만 살다 갑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여러분의 인생은 무엇과 같습니까? 나무를 닮았습니까, 아니면 겨를 닮았습니까? 이에 관해 첫 번째로 발견한 사실은 사람들이 자신에 관한 진실 또는 기독교에 관한 진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심오하고 본질적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어떤 일들을 하지 않습니다. 혹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어떤 일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술을 덜 마시거나 뭔가 다른 일을 하기로 다짐하고, 자기 개선을 어느 정도 이루고, 좀 더 선한 일을 하려고 마음먹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시편 1편이 제시하는 나무와 겨의 그림은 이 생각이 거짓임을 확실히 드러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나무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 대상은 나무와 겨 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깊고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차이임을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시편 기자에 따르면, 사실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것은 본질의 차이입니다. 많은 불경건한 사람도 윤리 도덕적으로 상당히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선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묻습니다. "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까?" 주된 이유는 그들의 본질이 그리스도인과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약의 이삭의 아들들 가운데서 에서가 야곱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 나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에서는 소위 '호감이 가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인품도 더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이 야곱이었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판단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무입니까? 아니면 겨입니까?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를 보여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먼저,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거듭나야 한다." 우리 주님을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던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당신을 지켜보고 당신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의 선생이긴 하지만, 당신은 저보다 훨씬 앞선 분이십니다. 제가 무슨 일을 더하면 될까요?"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3:3절"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용어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생, 즉 새롭게 만들어지는 일입니다.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진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살짝 다른 정도가 아닙니다.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신자 안에 이전에 없던 새로운 뭔가를 창조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것이 생사를 가르는 차이라고 말합니다. 엡 2:1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음과 생명, 이 두 가지는 대비됩니다. 이것이 시편 1편에서는 시냇가에서 자라는 나무와 그냥 겨의 대비로 제시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겨에 불과하다면 여러분은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그런 상태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영원히 후회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로 드러나는 차이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불경건한 자는 겨와 같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나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첫째, 겨가 무엇입니까? 알곡을 빼내고 남는 것입니다. 알곡은 낟알이고, 그것을 둘러싼 것이 껍데기, 곧 쭉정이입니다. 다윗은 불경건한 사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쭉정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에 빠진 인간의 실상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왜 복을 받지 못하는가? 왜 행복하지 못한가? 답은 인간이 타락했다는 데 있다. 타락한 인간은 영혼을 잃어버렸다. 생명을 잃어버렸다. 허물과 죄 가운데 죽었다. 쭉정이에 불과하고 낟알은 사라졌다. 외피, 바깥 껍질에 불과하다. 그 자체의 모든 가치가 사라졌다."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하신 인간의 가장 위대한 부분, 가장 고귀한 부분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의 모습이 하나님의 작품일까요? 저 가련하고 무력한 주정뱅이를 보십시오. 죄에 빠진 저 가엾은 사람을 보십시오. 구두쇠를 보십시오. 저 야심만만한 사람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그런 모습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쭉정이, 찌꺼기, 겨일뿐입니다. 필수적인 것이 그 안에 없습니다. 영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9:10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의 형상을 따라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즐거워했고 하나님과의 사귐과 교제를 기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기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 할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이제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3. 전환: 타락의 결과로 죄에 빠진 사람들
시편 1편의 이 구절에서 다윗이 말하는 내용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타락의 결과로 죄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볼 때 여러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껍질에 불과하고, 정신적 생명을 담은 육신, 곧 몸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정체입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이 동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죄에 빠진 사람을 보면 먹고 마시고 성에 탐닉하기 위해 사는 동물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는 진정한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위대한 것이 상실되었고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폐허뿐입니다. 죄와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모습입니다. 그는 잔재에 불과합니다. 알곡 없는, 낟알 없는, 근원 없는, 생명 없는 겨입니다. 하나님이 한때 인간 속에 사셨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원합니다.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폐허임을 알아보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와 겨의 또 다른 두드러진 차이점은 뿌리입니다. 나무에는 뿌리가 있고 겨에는 뿌리가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겨에 바람이 불면 사라져 버린다고 말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 나무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바람에 흩날리지 않습니다. 불경건한 사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의 비극은 뿌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피상적인 인생입니다. 모든 일이 상황에 달려있습니다. 그는 뿌리가 없습니다. 이 불경건한 인생은 불안정합니다. 늘 변합니다. 뿌리가 없고 삶에 어떤 기초도 없습니다. 겨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 밤낮으로 묵상합니다. 신약성경은 그들이 골 2:7절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섰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련의 교리를 믿습니다. 그들은 뿌리가 있는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는 뭔가에 붙들려 있습니다. 뿌리로 뭔가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에 쉽게 날아가지 않습니다. 나무는 뿌리가 있고 뿌리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4, 대단원: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분은 처녀에게서 나셨고, 그것은 기적적인 출생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임하셨고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분이 갈보리 십자가를 향해 일부러 가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 대신 죄를 지셨고 그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으며 우리 죄책을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그 죄책을 처리하셨고 우리 대신 예수님을 벌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 값없이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신자의 믿음이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선한 삶이나 선행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사람에게 입혀 주셨기 때문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믿습니다. 인격이신 성령을 믿고 하나님이 오순절에 교회에 성령을 보내셨음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뿌리는 이런 내용을 붙듭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뿌리가 있고 겨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겨는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리스도인은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벧전 3:15절"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나무와 같고 겨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러면 묻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 앞에 제시했던 것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고 여러분의 철학이 아무리 멋져도, 기독교 신앙의 필수불가결한 핵심,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겨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뿌리가 없으나 나무는 뿌리가 있습니다. 나무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나무에는 항상 성장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특징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엡 3:18-19절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 은혜에서 자랍니다. 나무와 겨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요. 그것은 생명과 죽음의 차이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꼭 언급해야 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겨에서는 어떤 열매도 나오지 않습니다. 겨는 언제나 쓸모없습니다. 불경건한 삶은 이런 겨와 같이 쓸모없습니다.. 롬 6:21절“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죄의 삶은 어떤 만족도 결코 주지 못합니다. 그런 삶이 만족을 줄 것이라고 잠깐 생각하기도 하고 만족을 얻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금세 사라집니다. 탐욕이나 야망이 무엇을 줍니까? 그런 것들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야심만만한 사람은 만족을 모릅니다. 언제나 더 원하고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덮쳐 지위를 빼앗길까 봐 늘 전전긍긍합니다. 평화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그것은 겨입니다. 여러분은 겨입니까. 아니면 나무입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여호와의 바람이 그 위에 부니 전 1:24절"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영광은 떨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상기시켜 드린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니 만약 여러분의 삶에 찌꺼기와 쭉정이 말고는 남은 것이 없음을 발견한다면,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사람의 모습이 전혀 없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 상태를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저를 새롭게 창조하소서"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의 찌꺼기, 폐허를 구원하시고자 그분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달리 나무가 되지 못하고 겨로 살아가는 우리 죄로 인한 죄책과 형벌을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고 33일 만에 부활하사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자이심을 능력으로 입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복된 성령을 통해 생명을 주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나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