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 17: 20-24
2. 명제: 우리를 위해 준비된 돌아갈 곳이 있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영원한 삶
갈등: 거룩한 춤
세상의 모든 종교들 가운데 유독 기독교만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가르칩니다. 삼위일체란 한 분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영원히 살아 계신다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요한은 성자를 설명하면서 요 1:18절"아버지 품속에 "영원토록 사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품"은 사랑과 친밀감을 그리는 고대의 표현 방식입니다. 요 16:14절에서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이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성자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성부는 다시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고 합니다. 이런 관계가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여기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상대를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누군가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또한 상대를 섬기고 따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희생해서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대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상대를 즐겁게 해 주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상대가 기뻐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한없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이 서로 영화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삼위일체의 삶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서로 자신을 베푸는 사랑이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나머지 두 위격을 사랑하고 흠모하며 따르고 즐거워합니다. 초기 그리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를 가리켜 '페리코레시스'라고 했습니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춤을 추다', 또는 '주위를 돌다'라는 의미입니다.' 성부 성자는 성령은 서로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세 위격들은 서로 찬양하고 교통 하며 존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으뜸 자리에 두지 않는 식의 창조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신에 영원토록 서로 사랑하는 세 위격의 하나님이 공동체를 이뤄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서로 자신을 내주는, 타인 지향적인 사랑을 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은 하나님이 만드신 기본 구조를 파괴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삼위일체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하나님은 무한정 행복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상대를 영화롭게 하고 환희가 가득한 사랑을 서로에게 쏟는 공동체가 신의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 이러한 패턴을 살펴보면 세상 누구보다 흠모하는 이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편에서도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되고 로맨틱한 교제와 결혼에 이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나라에 들어간 기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그런 관계는 하늘나라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끝없이 행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존재의 핵심에 ‘타인지향성'이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다른이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고 그분 중심의 삶을 살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분이 왜 그런 명령을 내리셨는지 제대로 알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이와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아니라 주님 중심으로 온전히 사느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어째서 이와 같이 사는 세상을 지으셨을까요? 우리는 함께 춤을 추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됨됨이 때문에,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위하여 섬긴다면, 춤 속에 들어가 그분이 누리는 즐거움과 사랑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그저 일반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도록 설계된 게 아닙니다. 도리어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도록, 그분을 알고 섬기고 즐거워하며 닮아 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열정을 쏟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질세계를 독특하리만치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 세상은 다른 창조 신화들이 주장하듯 허상도, 신들이 벌인 전투의 결과물도, 자연력의 우연한 산물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삼위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한 가운데 지어졌으므로 당연히 그 자체로 선합니다. 삼위일체 안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기록입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춤입니다.
2. 갈등 심화: 춤을 잃다.
성경의 이야기는 창조의 춤으로 시작하지만, 창세기 3장에 이르면 타락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다만 한 가지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면서 죽음의 형벌을 경고하십니다. 도대체 무슨 나무이기에 열매를 따 먹는 게 그토록 나쁜 짓이었던 것일까요? 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정한 목표와 관심을 위해 하나님을 끌어다 자신 주위를 돌게 하려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이 아니라 거기에 도달하는 수단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므로, 다만 나를 위해서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여라." 그러나 인간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중심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따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트러지자 다른 관계들도 하나같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자기중심은 심리적 소외를 빚어냅니다. 쌀쌀맞은 태도로 자신의 필요와 욕구, 대우, 자아, 성적 욕구 따위에 끝없이 집중하는 자기몰입만큼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아울러 자기중심은 사회 분열로 이어집니다. 국가와 인종, 계층과 개인 사이의 관계가 무너져 내리는 근본적인 원인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섬기길 거부하는 인간의 속성은 자연계에서도 인간을 소외시킵니다. 인간은 춤을 잃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인류는 무서운 자연재앙의 위협에 놓여 있습니다. 다들 멈춰 서서 세상만사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려 애쓰는 세상에서는 서로 자신을 내주는 행복한 관계가 성립된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새로운 인류, 그러니까 자기중심을 내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시작하며 다른 이들과 바른 관계를 세울 공동체를 출범시키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마지막 아담은 겟세마네동산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첫 아담은 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바울이 '나무'라고 불렀던 십자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면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렸셨습니까? 그분은 이미 기쁨과 영광, 사랑의 공동체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슨 영화를 보고자 하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를 중심에 두고 섬기셨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요 17:22절“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성부와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 전부터 해 오셨던 일을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롬 5:8절“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스스로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중심에 두고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우리에 대한 사랑이십니다.
3. 전환: 춤으로 돌아오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까? 마음에 감동이 된다면 자기중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그분과 신뢰 관계를 세우는 첫걸음을 내디딘 셈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면서 예수님은 말하자면 함께 춤을 추자고 초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내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삶의 모든 면에서 그분을 중심에 두기 시작하라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부름에 응하면 파괴된 관계들이 빠짐없이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죄란 무얼 하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그 중심에 놓는 마음가짐을 가리킵니다. 오로지 자아의 탑을 쌓아 올리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창조해 내는 노력에 힘을 쏟는 행위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똑같은 수준의 성취를 갖추지 못한 이들을 낮춰 보고 멸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자신을 내주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온전히 사랑의 토대 위에 삶을 세우라는 초대장을 받는 셈입니다. 이제 그분을 새로운 삶의 중심으로 삼고, 인간 자신이 직접 구원자요 주인 노릇을 하려는 짓을 집어치울 수 있습니다. 스스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삶을 통째로 바꾸는 하나님의 사랑을 새로운 정체성의 토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남들한테 자신을 입증해 보일 이유가 없어집니다. 다른 이들을 끌어다 자신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가오신 것처럼 이웃들을 향해 나가는 게 가능해집니다. 자신을 내어 줄 때, 모든 창조의 리듬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리듬에 접하게 됩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주님도 자신을 희생물로 드리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자아는 버려지기 위해 존재하며, 그런 포기를 통해 더 진실한 자아가 되고 그래서 도리어 더 내려 놓는 과정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을 모르는 것은 그저 ·자기 속에 철저하게 갇히는 지옥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사는 어떻게 마무리될까요?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 보면, 다른 종교들의 예측과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녹아내리거나 영혼이 물리적인 세계를 빠져나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장면 따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도리어 하늘 나라가 이 세상으로 내려와 하나가 되고 그 속에 있는 온갖 깨지고 불완전한 부분들을 깨끗이 씻어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인간과 자연이 다시 완비한 조화를 이루고, 인종간의 모든 적대감과 전쟁의 소멸과 함께, 상처와 질병, 죽음이 사라지는 '새로운 에덴동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이나, 종살이하는 이들, 범죄자들, 마음이 상해 슬피 우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춤과도 같은 사랑의 창조에 따른 결과입니다. 지금까지도 창조 세계는 창조주의 영광을 이야기하며 그분을 바라봅니다. 시 65:12-13절"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하나님은 깊은 관심과 사랑을 품고 세상에 다가오십니다. 헌신적으로 창조 세계 구석구석을 사랑하고 유지하는 데 전념하십니다. 죄와 악이 세상을 망쳐 놓았을지라도, 그래서 참다운 원형의 그림자에 불과하게 되었을지라도 마지막 때가 되면 자연은 그 영광을 완전히 회복하며 우리도 그리될 것입니다. 롬 8:21"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온 세상은 치유되어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것입니다. 악은 멸망하고 그 순간까지 숨었던 창조 세계의 잠재력은 활짝 피어나 더없는 온전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낼 것입니다. 인류는 마침내 서로 의지하면서 평화롭게 어울려 살아갈 것입니다.
4. 대단원: 하나님 백성의 삶
그렇다면, 여기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개인적으로 죄를 용서받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수준에 그치지 않음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중요한 도구이긴 하지만 최종 목표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이 땅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로 세우며,, 창조 세계를 갱신하고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개인적인 용서와 평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세상에 정의와 샬롬을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신과 영혼을 둘 다 창조하셨으며, 부활 사건은 몸과 영혼을 모두 구속하려 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성령의 사역은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세상, 곧 물질세계를 보살피고 가꾸는 일도 하십니다. 성경을 제외하고 나면, 모든 세상 종교는 물질세계에서 완전한 샬롬과 정의, 온전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일에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성경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성경의 비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제시하듯 세상의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삼위인체 하나님의 삶과 처음 세상이 창조되던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도 여기에 답하는 한 가지 방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끽하는 즐거움과 환희를 우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점점 더 깊이 공유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인간 공동체를 섬기고, 거룩하게 지음 받은 환경을 보살필 때 비로소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에 최종적인 회복이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세상과 인간의 마음은 깨지고 부서진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에게 정의를, 병들어 죽어 가는 이들에게 온전함 몸을, 궁핍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공동체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들에게는 영적인 기쁨과 관계를 회복시켜주기 위해 한없이 큰 희생을 감수하며 치른 구원 작전이었습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도덕적인 의무와 정의의 실재를 믿는 신념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기회가 닿는 대로 회복시키고 재분배하는 정의를 실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을 보여주며 복음을 전하기에 힘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뿌리 깊은 관계적인 속성을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 공동체, 곧 교회뿐만 아니라 주위의 인간 공동체들을 단단히 세우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또한 아름다운 것들을 기뻐하고 즐기는 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과학과 원예를 통해 자연 속의 피조물들을 잘 돌보는 이들에서부터 예술적인 작업에 온 힘을 기울이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물질세계의 청지기가 되며, 그런 일들이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함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크리스천의 삶이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권해서 기독교 공동체를 세울 뿐만 아니라 정의와 섬김을 실천해 인간 공동체를 굳세게 형성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의와 진리를 위해 일하는 참다운 '혁명가'들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세상 즉 천국이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품고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계 21:4절“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가 거기에 이르면 마침내 기쁨에 겨워 "드디어 집에 왔다! 그래, 여기가 진짜 고향이지. 본래부터 난 여기 사람이었어.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지만, 평생 이 땅을 그리워하며 살아왔거든."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거룩한 춤을 추며, 기쁨의 노래를 힘차게 부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