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향한 열정과 사랑의 권면
1. 본문: 고전 16:13-14
2. 명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명령적 명제
3. 제목: 교회를 향한 열정과 사랑의 권면
사도 바울
우리는 고전 16장 13, 14절을 대하면서 놀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16장은, 지금까지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어 왔던 이 서신에서 일종의 추신과 같은 대목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궁핍한 교회들을 위한 연보의 문제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시행해야 할지에 대한 세부적인 조언과 지시와 정보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드릴 수 있을 정도의 연보를 매주 첫날에 따로 떼어 놓으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과 일정에 대해 알려 줍니다. 또한 디모데나 아볼로와 같은 몇몇 동역자들에게 고린도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 주기도 합니다. 그런 다음에 계속해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 예컨대 스데바나를 비롯하여 그들과 함께 수고하는 일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일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가 나옵니다. 이것이 이 16장 전체의 성격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일반적이고도 실제적인 말을 하던 도중에, 13, 14절에서 갑자기 이 강력한 권고가 나타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우리가 이 말씀을 분석하기 이전에, 저는 이 메시지를 전체적으로 대하면서 이 위대한 사도 바울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서신의 본론에서 보다 때때로 이와 같은 추신에서 자신의 모습을 더욱 많이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에서 서론과 결론을 살펴보는 것이 언제나 중요합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위대한 사도로서뿐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의 그와 친숙해지기 시작하는 때는, 우리가 그의 서신의 서론과 결론 부분을 잘 살펴볼 때입니다.
영혼의 열정과 열심
바울 사도의 사람됨과 관련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한 가지는 그의 뜨겁고도 열렬하며 열정적인 성품입니다. 서신들 여러 곳에서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수고에 대해 들려줍니다. 여러 대륙에서의 여행과 바다를 건넌 것과 여러 지방의 여러 장소에서 모든 이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한 것을 들려줍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그의 뜨겁고도 열정적인 성품, 그의 정열과 힘찬 기질, 삶에 대한 그의 관점과 자세로 말미암아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두 구절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는 너무나 열정적이었으며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나 뜨거웠기에 편지의 모든 형식을 제쳐 둔 채 그러한 열정과 애정을 갑자기 교훈적인 말씀을 합니다. 그것이 그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문장가로서 그는 종종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갑자기 문장의 흐름을 깨뜨립니다. 큰 환상이나 큰 영감, 혹은 어떤 중대한 메시지가 그의 속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편지의 형식과 순서를 무시하고서라도 갑자기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서신들에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의 뜨겁고도 열성적이며 정열적인 면모를 보게 됩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여 설명하는 이유는, 이 위대한 사도의 특징이야말로 지금과 같은 시대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대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강력한 하나님의 종이 보여 주었던 열정을 강조하는 것은 더없이 유익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의 비극은, 교회의 차원에서나 국가의 차원에서나, 열정의 상실이라는 점에 크게 기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지쳐 보입니다. 우리는 이미 삶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에 젖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적 혹은 지적인 열정과 뜨거움과 정열을 진정한 위대함과는 양립할 수 없는 무언가로 간주해 왔습니다. 마치 지식과 교양에 반대되는 어떤 것처럼 간주해 온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의 표현을 교양 있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극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자신을 억눌렀습니다. 종교와 관련된 열정은 광신도로 경시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하는 표준은 감정이나 영적인 뜨거움의 표출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소 유교적인 침착함과 초연한 태도를 장려해 왔으며, 그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어떤 활동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서 몸이 마비된 듯한 느림보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만일 영혼의 열정과 감정의 표현을 의도적으로 억제하도록 조장한다면,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의식하는 데 매우 둔감하게 되리라는 것이며, 더 나아가 어떤 행동을 취함에 있어서도 느림보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열정을 찾아보기가 얼마나 힘든지요. 우리는 얼마나 무감각한지요.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격변의 사건들의 의의를 깨닫는 데에 얼마나 더딘지요. 우리 자신을 축구 경기의 선수들과 비교할 때, 혹은 다른 오락 분야의 연예인들과 비교할 때, 심지어 공산주의와 같은 거짓된 사상에 현혹된 사람들의 열정과 비교할 때도 분명히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스로를 꾸짖어야 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으로서 바울 사도의 열정, 열심, 영혼의 뜨거움보다 더 두드러진 것은 없습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바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들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것이 바로 사도가 이 추신에서 사무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도중에 갑자기 13, 14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 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와 같은 권면을 삽입한 이유입니다.
위대한 목회자
동시에 우리는 이 대목에서 훌륭한 목회자로서의 사도의 특징을 간접적으로 보게 됩니다. 바울은 위대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위대한 교사였으며, 위대한 목사였습니다. 그가 언제나 세 가지 직무를 수행한 사람이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위대한 목사로서의 모습이 빛나고 있음을 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고린도 성도들을 위한 그의 관심과 염려를 볼 수 있습니다. 서신을 끝마치려는 대목에서, 세부적인 문제들을 언급하던 추신에서 왜 그가 갑자기 이와 같은 말을 했습니까? 13, 14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 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그것에 대한 적절한 설명으로는 오직 한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거룩한 믿음 위에 굳게 세워지고,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에서 충분한 유익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도시의 사람들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열망했습니다. 그가 편히 쉴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큰 관심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심판대에서 창조주 앞에 서게 될 때, 우리가 받게 될 가장 중대한 책망은 우리의 무관심 즉 영혼에 대한 영적 게으름에 대한 책망일 것입니다. 우리는 문명의 토대가 흔들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가 흔들리고 있으며, 인류 역사상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일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정치적인 부패뿐만 아니라 영적, 도덕적 타락을 목격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감각하고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너무나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심리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심리학자는 이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 서신에서 그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9:19-23에서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말하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처럼 말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적응시키고, 사람들을 알고자 하는 수고를 감내하며, 다양한 방법을 써서 특정한 상황에 적합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방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과 문화와 그 외의 다양한 분야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이 위대한 사도로부터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즉, 우리의 과거 방식을 시대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지나간 한때에는 적절했을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접촉하는 데는 실패한 방식들을 고집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물론 진리는 하나이고 영원합니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적용은 다양하게 현시대에 맞추는 지혜가 요구 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언어에 적용시켜야만 합니다. 바울은 언제나 그렇게 하고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위대한 목회자로서의 바울에 대해 제가 주목하는 또 다른 요소는 영적인 것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강조입니다. 영적인 것은 바울이 행한 모든 일에서 언제나 최우선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어 이렇게 소리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앞으로의 계획과 일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방문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나는 아볼로와 스데바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이 최우선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런 업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확고하고도 분명한 영적인 토대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우스꽝스러운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상이 우리가 본문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사도와 관련하여 감명을 받게 되는 명백한 요소들입니다.
이 권면의 현재적인 적용
제가 여러분이 이 대목에 주의하기를 촉구하는 이유는, 오늘날의 교회와 이 서신을 받을 때의 고린도 교회 사이에 매우 유사한 점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왜 교회가 이토록 무기력한가? 왜 하나님의 교회가 이 현대 세계 속에서 작게만 여겨질까? 교회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위대한 권면을 살펴봄으로써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해답은, 고린도교회가 직면했던 문제들에 대해서뿐 아니라, 이 시대의 교회가 직면하는 고통과 문제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당되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 권면의 전투적인 특징을 주목합니다. 저는 주저 없이 이 본문을 지금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한 바울의 명령이라고 간주합니다. 그가 이 시대에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선 전체적인 전략으로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 시대와 관련하여 그가 교회에 내리는 명령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관한 신약성경의 위대한 가르침을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이 서신에서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교회론에 관한 가르침을 놓쳐 버린 것 입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런저런 분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고, 또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나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그들이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더 이상 진실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몸으로 결속된 교회 생활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종교에 관심을 가집니다. 또한 설교와 강연을 듣는 것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얼마나 믿는지는 의문입니다.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느슨한 조직체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그리고 이 땅에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몸의 지체로서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바 되었기에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인 것을 기억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써 구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실감하고 있습니까? 단지 우리가 지옥의 형벌에서 건짐을 받게 되었다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그분의 위대한 목적과 계획이 이 세상에서 성취되도록 하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계획과 목적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고 있습니까?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이루는 손과 발로서 우리 자신을 보고 있습니까? 진정 그것이 우리가 놓쳐 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강력한 원수가 우리를 대적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사탄과 악과 지옥의 모든 권세들이 우리를 향하여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악령의 화신 같은 존재가 나타나서 악한 권세와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현재 교회에서도 악한 권세들이 출현하는 것을 목도합니다. wcc의 종교 통합주의, 동성연애 합법화, 포괄적 차별 금지법, 여러 이단들의 준동 등, 우리는 원수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무산시키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고린도 교회와 같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싸움을 의식하지 못하다니요! 마귀와 그의 세력들이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에도, 고린도 교회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서 자기들의 주장과 사상을 내세우며 논쟁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은 당을 지어 여러 분파로 분열되었으며, 자신들의 영적 은사를 서로 비교하였습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다투는 동안 교회의 영향력은 약화되어 갔으며,, 악한 고린도의 도시에 끼칠 수 있는 영적인 힘은 점점 더 위축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발견하는 현상이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교회가 분열하고 다투며 논쟁하는 동안, 세계는 큰 전쟁의 혼란 속으로 빠져 들고 있으며, 이 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점점 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에 오늘날을 향한 명령이 있습니다. ”깨어라. 일어나라"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그것이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한 영적전략입니다. 앞으로 이 전체적인 전략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