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목: 깨어 있으라
1. 본문 고전 16:13-14
2. 명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명령적 명제
3. 제목: 깨어 있으라
고전16:13-14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이제 우리는 다음 두 단어를 숙고하고자 합니다. "너희는 깨어 있으라" 이 권면에는 분명한 논리적 연결이 있습니다. 바울은 본질적으로 논리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고나 이성의 차원에서만 논리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보다 더 높은 영적인 차원에서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그는 기초를 먼저 깔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다음에 부속 시설을 첨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권면의 말씀을 순서에 따라 고려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깨어 있으라." 이것이 고린도 교회와 오늘 우리 교회의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번째 단계입니다. '깨어 있으라' 대신에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일어나라', 잠들지 말아라', '정신을 차려라.' 혹은, 군사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차려(Attention)'라는차려(Attention)'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는 사람들을 깨우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깨어나 잠들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린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하자면 잘 알려진 구약성경의 표현을 빌어서 "나팔을 불라"라는 표현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가 지금 "깨어 있으라"라는 이 두 단어를 사용하여 누군가에게 기상나팔을 불도록 명령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군대의 취침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면서, 일어나서 군복을 입고 무장을 갖추고, 각 사람이 정해진 위치로 가도록 말입니다. 아침의 기상나팔! 주의하라는 외침! 각 사람에게 자신의 위치로 가라고 하는 위대한 장군의 명령입니다. 성경에 어느 정도 친숙한 사람이라면, 이 말이 성경의 아주 특징적인 단어로서,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전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읽다 보면, 그분이 끊임없이 "깨어 있으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지상의 삶과 사역을 마치실 무렵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3:37절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복음서의 마지막 여러 장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이 깨어 있으라는 권면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권면, 주목하고 정신을 차려서 경계를 서라는 이 권면이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주제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위험이 다가올 것을 의식할 때 외에는 이런 말씀을 결코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권면함으로써 제자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셨고, 그렇게 깨어 있을 때 미래를 내다보는 은사가 사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기독교회의 역사에서 지금 이 순간보다 이 말씀이 더 절실히 필요했던 때는 없었습니다. 예전에 교회가 혼수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으며, 교회 역사에서 암흑의 시기와 부패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서 있는 오늘날만큼 이 말씀이 절실히 필요했던 적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가지 질문들을 통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첫 단계의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까?
왜 이 강력한 그리스도인 장군이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깨어 있어야 할 한 가지 단순한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싸움과 전쟁이며 전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개념일지도 모르며, 또한 대개는 이런 개념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쟁이며 전투이며 싸움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자주 발견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성경의 중대한 진리, 곧 그리스도인의 삶은 싸움이며 전쟁이고, 또한 교회는 하나님이 지상에 배치하신 군대요 전투 부대임을 망각해 버렸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런 현상을 바로잡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진리를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다음의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잘못된 현상의 명백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신앙과 관련하여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지난 백 수십 년 동안 지속된 문제입니다.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려는 경향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긍정적인 면에서나 부정적인 면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대한 파괴적 비평주의의 주된 목적은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신약성경에서 기적적인 요소를 배제하려고 시도해 왔으며, 사탄의 능력이나 악의 권세에 대해서도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증대되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고,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이나 권세들에 대해서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이 활동하며 싸우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것이든 거룩하지 않은 것이든, 참된 것이든 신성모독적인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모든 개념이 점차 종교에서 배제되어 왔습니다. 일단 우리가 삶과 존재의 영적인 면에 대한 초자연적인 개념을 놓치게 되자 필연적으로 영적인 싸움에 대한 개념도 놓쳐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기독교를 단지 하나의 철학으로만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기독교를 그저 삶의 한 관점, 혹은 사고방식 정도로만 간주해 왔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저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삶의 한 철학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삶의 규범의 차원으로만 생각해 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오로지 실천적인 어떤 것으로, 혹은 삶에 적용해야 할 윤리적인 어떤 것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위 '복음의 사회적 적용' 이라는 것은 지난 백 수십 년 동안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해져 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복음과 메시지를 단지 실제적인 적용의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선과 악, 하나님과 사탄, 천국과 지옥 등 신약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인 영적 싸움에 대한 개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영적 싸움과 전쟁으로서의 신앙의 개념을 잃어버린 또 다른 이유 중에는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즉, 그들이 거룩함과 성화와 관련하여 그릇된 시각과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수동성(passivity)의 상태로 이끄는 모호한 신비주의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실제로, 영적 싸움의 개념을 정죄하고 그 대신 모든 종류의 갈등을 끝낸 상태, 즉 긴장을 풀고 수동적인 상태 속으로 몰입하는 것을 최고의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명백히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투쟁이며 싸움이고 전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깨어 있으라는 권면과 명령을 듣습니다. 사도 바울은 생을 마칠 즈음에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씨름이라고 말하면서 엡 6: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대적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우는 사자'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두드러진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강력한 싸움, 즉 세계와 인류를 두고서 맞선 영적 존재와 권세 간의 싸움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싸움이라는 인상은 위대한 기독교 문학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가장 위대한 기독교 문학, 특히 부흥과 각성의 시대의 문학을 조사해 본다면, 그것이 언제나 영적 싸움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존 번연의 ”천로역정” 이있습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면서 여행하는 순례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묘사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우리 새 찬송가 347-360장의 제목에도 우리들의 싸울 것은,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십자가 군병 되어서 등에도 나와 있습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길을 자를 찾나니 ““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중대한 이유입니다. 즉,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본질적으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신약성경에 나타난 우리가 싸워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만일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패배하며 정복당하고 원수의 희생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우리는 무엇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풋내기 초심자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기일 뿐입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우선, 사기가 저하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기가 저하될 위험이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는 교회와 기독교 메시지에 대해서 다소 실망하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까? 나는 어디든지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집에는 가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까? 무엇보다 시대의 풍조 속에서 도덕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까? 도덕적인 문제로 씨름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까? 비록 어떤 의무감으로 하나님의 집에 출석하고는 있지만, 이런 일을 계속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까? 전반적으로 나의 사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까? 한때 민감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지금도 여전히 깨어 있습니까?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할 한 가지 측면입니다. 또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낮아진 기준을 받아들이려는 경향과 위험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믿음 때문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내게는 분명한 도덕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나는 개인의 삶과 관련하여, 정직이나 순결이나 깨끗함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기준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예전처럼 여전히 죄에 대해 민감합니까? 혹은 나에게는 죄와 타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까? 나는 나의 행위를 변명하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 버렸습니까? 나는 자기 정당화를 하는 데에 전문가입니까? 나는 스스로의 양심을 타이르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냅니까? 우리는 우리의 기준이 낮아지는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유혹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쉽게 그것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유혹을 받을 때에, 미묘한 유혹을 받을 때에, 그것에 맞설 능력을 여전히 동일하게 유지하고 있습니까? 나의 영적인 근육은 예전처럼 여전히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나는 예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까? 기도와 묵상을 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잊고서 하루를 보내기가 너무나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활은 분주하고,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태만에 대해 변명할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경이 피로하고 몸이 지쳤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경건의 연습을 게을리 하는 사이에 영적인 힘은 저하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 깨어 있은 후에는, 원수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원수를 경계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만을 살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특별히 두 가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내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원수의 힘과 능력입니다. 저는 이미 베드로가 원수를 우는 사자로 묘사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영적인 싸움을 온통 육체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엡 6: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의 싸움은 강력한 영적인 세력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원수의 능력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원수의 간교함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했듯이, 원수는 때때로”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결함으로부터 미혹해 내려고 합니다. 만일 시대의 징조들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이러한 사탄의 간교가 오늘날 가장 긴급하고도 중대한 문제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때, 이 시대에 교회가 처한 가장 큰 위험은 바른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고린도교회에서도 가장 현저한 위험이었습니다. 여러 분파로 나뉘어 바울이나 아볼로나 혹은 그리스도에게나, 누구에게 속하였느냐의 문제로 분쟁하고 있는 사이에 원수는 그들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에 대한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부차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말다툼하고 있었으며, 다양한 영적 은사들을 서로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동안 원수는 교회를 파괴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곁길로 빠지는 위험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부차적인 문제들 즉 크고 화려한 교회 당 짓기를 강조하면서, 마음의 성전 짓기 즉 성화 구원을 소홀히 하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여러 교파가 하나로 뭉칠 수만 있다면 성경의 진리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온통 눈에 보이는 교회의 일치에만 몰두하고 있는 WCC 운동 이것이 이 시대의 큰 위험이 아닙니까? 성경을 읽으십시오. 거룩함과 성화에 대한 특별한 교훈을 이해하고, 기독교 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십시오. 이 모든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최우선으로 수행해야 할 일과 기능은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부르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교회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뿌리에 있는 죄와 악을 꾸짖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과 타락한 인생들과 접촉을 시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동성애 합법화 반대, 포괄적 차별 금지법 반대 운동은 옳은 길입니다. 곁길로 빗나갈 위험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은, 언제 깨어 있어야 하니까?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경계를 게을리 하다가 결국 무슨 일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의 원인입니다. 1948년 6.25 남침이 일어 나기전, 한국 장로교단는 예장과 기장으로 분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한 국가로서 깨어 있지 못했고, 결국 원수들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공휴일은 없습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국가공휴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영적 근육을 키우는 경건 훈련 기도, 말씀 읽기, 예배, 전도하는 일에 태만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이 위대한 사도의 말을 다시 한번 사용하자면, 딤후 4:2절‘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일어나십시오! 항상 정신을 차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