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love 2024. 11. 17. 15:05

1. 본문: 고전 16:13-14

2. 명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명령적 명제

3. 제목: 믿음에 굳게 서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권면의 말씀을 소극적인 차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깨어 있으라"라는 권면은 어떤 의미에서 소극적입니다. 제가 그것을 소극적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또한 진리와 개인의 도덕적 고결함과 올바른 삶의 기준을 낮추는 위험을 경계하고, 원수 마귀가 우리의 위치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라는 권면이었습니다. 이러한 권면은 너무나 중요하지만, 하나의 서론일 뿐입니다. 단지 깨어 경계하라는 권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마치 군대가 적군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살피면서도 전쟁에 필요한 장비를 전혀 갖추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본문에서 적극적인 권면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믿음에 굳게서라." 우리는 적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와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무기를 조달할 수 있는 커다란 공급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교회와 오늘 교회의 문제 해결책의 두 번째 단계인 믿음에 굳게 서라는 이 주제는 믿음의 절대적인 중심성, 참된 교리의 절대적인 중요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잘못이 교리를 바로 이해하고 붙들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여러 분파로 분열한 것은 교회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 악한 자를 용납한 것 역시 같은 문제입니다.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혼란은 그들이 믿음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그 문제를 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 믿음의 덕을 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방언에 대한 논쟁 역시, 바울은 깨닫지 못하는 일만 마디의 방언을 말하는 것보다 다섯 마디의 깨달은 말을 하는 것이 믿음의 덕을 세우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저 위대한 고전 15장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바울이 거기에서 부활의 교리를 다루면서, 그들이 만일 이 교리의 문제에서 잘못되면 모든 문제에서 잘못되고 완전히 파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대한 문제라고 여깁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영향력이 지난 몇 년간 그토록 눈에 띄게 약화되고 쇠퇴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진정으로 만족할 만한 설명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권위가 사라졌습니다. 성경의 권위, 설교 강단의 권위, 교회의 권위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의 기초 전체에 의문을 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사라지면, 필연적으로 그 상부구조 역시 붕괴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이 나라와 온 세계의 교회의 부흥을 원한다면, "믿음에 굳게 서야합니다."

 

먼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설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믿음' '믿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믿음은 구체적인 어떤 것이며 교리의 실체로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가 이 서신의 여러 곳에서 시사한 바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고전 11장에서 성만찬에 대해 가르치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23"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사도는 15장의 첫머리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1"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느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이것이 우리에게 '믿음' '믿음'이라는 것, 즉 진리와 교리의 실체가 있음을 상기시키는 사도의 방식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이런 개념은 너무나 인기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 기독교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 것' 이며, 모호한 영적 영향력 같은 것이고 감화를 받는 그 무엇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개념은 기독교가 객관적인 진리의 실체로서 구성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생각하고 분석하고 토론하고 연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사람이 빠져드는 어떤 영적인 분위기라고만 보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의 특징과 본질이 진리를 향한 탐구에 있다고 믿게 하려고 합니다. , 사람이 기독교에 접근하는 것은 명확하게 확립된 교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탐구를 시작하는 것, 알려지지 않은 영역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진리의 실체에 대한 수용이 아니라, 그저 진리에 대한 탐구로 묘사되어 온 것입니다. 기독교가 진리의 실체라고 하는 진술에 반박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선전하고 전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세계의 모든 종교와 철학과 사고방식 중에서 좋은 것을 취사선택해서, 그것을 모두 모으는 것이 참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모든 종교에는 약간의 선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호적인 정신으로 기독교와 힌두교와 불교와 유교와 이슬람교와 그 외의 세계의 모든 다양한 종교들에서 좋은 것을 뽑아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한 교회에서 드려진 예배에서는 세계의 모든 경전들에서 발췌한 내용이 낭독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저 즐겁게 살면서 교인으로서 교회에 출석만 하면 그만이라고 여깁니다. 누군가가 어지간히 교양 있는 삶을 살고자 애쓰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기독교가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은 착한 사람이 되고, 정당하게 행동하고, 어떤 도덕적인 개념들을 실천하려고 힘쓰는 것이 그들에게 필요한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취하는 입장의 완전한 모조품입니다. 신약성경은 믿음과 진리에 대해 말합니다. 유다서에서 우리는 3"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라는 권면을 듣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이 책에서 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라고 경고하며, 1:8절에서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믿음' '믿음'이라는 것이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출발합니다. 그러하기에 기독교는 모호하거나 불분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어떻게든 추구해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들에서 최선의 것을 모으고 뽑아낸 것도 아니며, 단지 착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진리의 실체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믿음' '믿음'이라는 것이 있음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결코 믿음에 굳게 설 수 없습니다.

 

둘째로, 믿음은 무엇입니까?

저는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똑같은 문제에 대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다양하고도 세부적인 면에서 똑같은 공식을 말해야만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더 이상 축소할 것이 없는 최소한의 것,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어떤 것이 있으며, 그것이 없이는 우리가 기독교라는 용어를 사용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전15장 서두에서 사도는 그것이 그 본질에 있어서 나사렛 예수에 관한 진리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논쟁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단지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단지 진리 추구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에 도달한 분도 아닙니다. 그분은 하늘로부터 기적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로 태어나셨으며, 자신의 독특한 신성을 자신의 사역과 가르침에서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자발적으로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고후 5:19"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후 5: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신약성경의 이런 기록들을 보면, 성경의 저자들이 오직 나사렛 예수만이 인류의 죄를 감당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전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분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용서를 얻었습니다. 계속해서 신약성경의 메시지는 그분이 무덤에 장사되셨지만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사망의 줄을 끊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분은 어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오순절 날에 초대 교회에 성령을 선물로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진정 신약성경의 본질적인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즉 이 복음이 사도들과 초창기 설교자들이 전했던 것이며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들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강조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진정으로 기독교회의 역사적 신앙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오직 '진정한’ '보편적인' 신앙으로서,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어 온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이 우리가 굳게 서야 할 믿음이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논쟁이나 다툼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느냐 거부하느냐, 즉 믿음이냐 거부냐, 오직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믿음에 굳게 서기 위해 끊임없이 그것을 상기하고 읽고 생각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에 관해 끊임없이 숙고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읽고, 배우고, 연구하고, 경건한 선진들의 책들을 열심히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에 굳게 서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은, 왜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까?

그 것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당연히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즉 복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한 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고전 15:1-2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의 구원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 즉 복음을 굳게 붙잡지 못하고 그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모든 지위는 사라지고 맙니다. 신약성경과 교회의 역사가 분명히 보여 주는 바에 따르면,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성령이 최종적으로 믿음 즉 복음만을 영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즉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면 참된 회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 외에는 어떤 것도 영예롭게 하지 않으십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야 할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언제나 가장 큰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 즉 복음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만큼 사람을 진실로 윤리적이고도 도덕적이며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격려하고 고무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때때로 이런 의문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왜 내가 선한 삶을 살아야 하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잖아. 불필요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내 행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헛된 일은 아닐까?" 그런 의문들이 찾아올 때, 계속해서 좁은 길을 따라 걷도록 해 주는 데에는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를 영원의 순례자로 보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그를 구원하실 수 있으며,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그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요일 3: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33"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부활의 믿음에 있어서 잘못된 자는 매일의 삶에서도 잘못되기 마련입니다. 교리가 흔들리는 사람은 그의 삶 전체가 흔들리는 법입니다. 또한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선교에도 언제나 큰 자극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은 내가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의 선교 사업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큰 자극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위대한 부흥 후에는 언제나 선교적 관심과 사역이 크게 대두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자들의 상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잃어버린 자들의 구원을 위한 갈망이 그들의 마음속에 불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더 실제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야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지 않고서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습니다. 틀림없이 의심이 찾아옵니다. 원수가 여러분을 공격하고 흔들려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은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특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6:16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우리가 의심으로 공격받을 때 반드시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흔들리는 느낌에 맞설 때에도 믿음은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느낌과 기분에 의존한다면, 우리가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피곤하고 맥이 빠진 것을 느끼면서 이런 의문을 품게 될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하지? 나는 이런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여러분이 그렇게 느낄 때 오직 한 가지 해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며, 진리 즉 복음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행복의 수단입니다. 그것은 삶의 고단한 현실들에 맞설 때에도 또한 필수적입니다. 질병이 찾아오고, 실망이 찾아옵니다. 어려운 환경이 대두되고, 전쟁이 발발합니다. 사업을 망치고, 직장을 잃어버립니다. 슬픔이 여러분의 가정의 문을 두드리고, 목숨보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 버립니다. 전쟁터에서나 바다에서나, 혹은 조용한 작은 방에서, 죽음이 찾아옵니다. 이 삶의 현실들을 내가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즉 복음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 모든 것을 직시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항하게 하며,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357”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 믿음은 삶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죽음을 위한 것이며, 영원을 위한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주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성령을 통해 믿음의 선물을 주신 삼위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돌리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