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love 2024. 12. 1. 15:18

1. 본문: 고전 16:13-14

2. 명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명령적 명제

3. 제목: 남자답게 강하라

 

앞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던 원리 중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권면에는 분명한 논리적, 영적 연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 속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었습니다. 우선,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남자답게 강건하여지라는 말씀은 그다음에 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문맥 속에서 살펴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말씀을 일반적인 노력의 차원에서 용기를 불러일으키려는 수단으로 사용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말씀이 고린도 교회에 필요한 말씀이기는 했지만, 사도는 이 말씀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깨어 믿음에 굳게 서라"라고 한 다음에 "남자답게 강건하라"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권면에 쓰인 단어들은 호소력 있고 강력하며 남성적인데, 우리가 문맥의 연관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그런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면, 본문의 진정한 의의와 취지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우리는 기독교를 일반적인 차원에서 삶의 어려움에 맞설 수 있게 하는 용기의 호소로 간주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그런 차원에서 제시하기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운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미국의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그저 삶의 어려움에 굳세게 맞서는 용기의 호소 정도로 묘사합니다. 휴 월폴(Hugh Walpole)"중요한 것은 삶이 아니라 삶에 맞서는 용기이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와 힘과 굳셈과 인내의 정신이라는 것이 그들의 철학입니다. 그 철학에 따르면, 만일 여러분이 그런 용기를 가진다면 어떤 문제가 닥쳐오더라도 모든 것이 잘 해결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호소에 반응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본질에 있어서 이교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교 사상에 있어서 최고의 덕목은 용기입니다. 헬라인들은 용기를 최고의 위치에 놓습니다. 헬라인들은 힘과 남자다움을 좋아했습니다.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용기와 인내심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이교도들에게 크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최고의 덕목은 용기가 아니라 겸손입니다. 거기에 당연히 기독교만의 본질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이교적인 가르침과 기독교의 가르침 사이에 나타나는 분명한 구분선이 있습니다. 사도는 이 서신에서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왜 그것이 미련한 것이었습니까?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가 너무나 약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고전 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메시아로 불렸던 예수님의 실패, 대적들에게 맞서서 자기를 보호하지 못한 그의 실패, 십자가의 말할 수 없는 그 연약함이 헬라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용기와 힘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신약성경에서 자주 강조됩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2: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의 특징을 알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의 징표를 스스로 벗어 버리고, 자기를 낮추며, 종의 형체를 취하여 죽음과 십자가의 수치에 이르기까지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그리스도인 안에 있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겸손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42-44"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용기를 최상의 덕목으로 내세우는 이교의 가르침과 겸손을 가르치는 기독교적 권면의 차이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맥 빠질 정도로 나약하고 감상적인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을 약하고 축 늘어지고 감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어떤 것에 대해서도 굳게 맞서지 못하며, 그저 모든 상황 속에서 나약하게 미소만 짓고, 활기와 사내다움과 끈기와 힘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려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 역시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 본문은 그것이 전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강하고 씩씩한 것을 요청합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요구하지만, 세상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기독교는 용기와 남자다움을 첫째로 꼽지 않습니다. 더 좋은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기독교에 있어서 용기와 남자다움과 힘은 언제나 신앙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기독교는 용기와 같은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남자다움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용기를 따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용기 자체를 덕목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강한 사람을 연약한 사람보다 더 높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용기에 관심을 가지는 때는 오직 그것이 진리와 관련되었을 때입니다. 우리는 먼저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씀을 듣고 난 후에야 "남자답게 강하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아무리 큰 힘과 용기와 씩씩함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과 관련되지 않았다면, 성경의 관점에서 그것은 쓸모없고 가치 없는 것일 뿐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자연인으로서의 우리의 덕목과 자질의 차이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3:28“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으며,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고, 자유인과 종의 구별도 없습니다또한 기독교 복음은 위대한 지적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에 관심을 두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모두 "남자답게 강하라"라고 요청을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믿음의 맥락 속에서 용기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사도 바울의 이 위대한 권면의 말씀에는 논리적, 영적 연결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어떻게 남자답게 강건할 수 있을까요?

첫째, 부정의 방식으로 답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음으로써 남자답게 강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일부 지적인 사람들은, 사도가 설교나 가르침에 있어서 깊은 사상을 전해 주지 않았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그는 오직 십자가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는 우리를 좀 더 높은 교리적 수준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지 않았다." 사도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육신 적이고, 여러 분파로 나뉘어서 나와 아볼로와 게바를 비교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교리를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우유 외에는 어떤 음식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어린아이입니다." 그들은 여러 분파로 분열하는 면에서 어린아이들처럼 행동했을 뿐 아니라,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어린아이 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 즉 믿음이 강한 자들은 그런 음식을 먹어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형제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문제로 혼란스러워하며 불평하였습니다. 또한, 지식이 있는 자들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였습니다. 지금 사도는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짓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영적인 은사에 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고, 다른 이들은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은사로 받고, 또 다른 이들은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온 교회가 그 문제로 분열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특정한 은사만이 유일한 은사라고 여기며 그것을 갖지 못하면 마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말했습니다. 반면에 또 다른 이들은 다른 은사들에 대해서 그와 같은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도는 "남자답게 강하시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치 서로 장난감을 가지려고 다투는 어린아이들처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뒤로 제쳐 두고 먼저 내가 여러분에게 전했던 믿음을 굳게 붙드십시오. 장성한 어른답게 행동하십시오!" 이 권면이 오늘날의 교회를 향한 직접적인 말씀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절박한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데도 교회는 무감각하게 잠들어 있는 지금, 이 말씀이 강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많은 교회가 다툼을 일삼으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잃어버리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십시오. 이런 사소한 일들이 교회의 생명력을 파괴하고, 특정 지역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저해하며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세계가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고 사람들이 삶의 가치관을 잃어버린 이때,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이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가지고서도 어린아이들처럼 사소한 다툼이나 일삼고 있으니 이 어찌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남자답게 강하라"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어린아이의 유치한 짓들을 이제는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권면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우리는 특별히 복음의 이해에 있어서 남자답게 강해야 합니다. 사도는 고전 14:20 절에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돼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돼라.” 우리는 복음의 이해에 있어서 남자답게 강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지난 세기 특히 복음주의 진영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한다면, 신학 연구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두려움은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난 세기말을 특징지었던 철학과, 성경과 관련된 파괴적인 고등 비평 운동이 대두된 결과,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신학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경건한 삶에 매진하자. 그러나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지는 말자. 무엇보다도 신학 책들을 보지도 말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무엇이 논쟁거리인지를 알지 못하면, 여러분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여러분은 믿음에 굳게 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신비하고도 경건한 측면에서만 발전시키지 않도록 합시다. "지식에 있어 장성한 어른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의 체험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처음의 체험에만 머무를 위험을 언제나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자라기를 열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당신은 주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에서 어떻게 성장했습니까? 당신은 믿음의 지혜에서 자랐습니까? 이 사람은 처음의 체험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과거를 되돌아보기만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식에 있어서 장성한 어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장성한 남자가 되고 지식에 있어서 강해져야 할 이유는 사도 바울이 엡 4:14절에서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우리가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사이비 종파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으려면, 장성한 남자답게 처신하여 신앙의 교리들과 영원한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쉽게 새로운 이단과 균형을 잃은 복음을 추종하면서, 믿음에 견고하게 서 있지를 못합니다. 이처럼 바다 물결의 거품처럼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진리를 연구하고 깨달음으로써 강해지는 것입니다. 성경 신학에 대한 지식을 키우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고대의 위대한 성자들의 글과 경건한 사람들의 경건 서를 읽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와 믿음의 지혜에 있어서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해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일관되고도 신뢰할 만하며 믿음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쉽게 열광하지만, 그것을 오래가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장난감 하나를 가지면 당분간은 그것이 전부인듯합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을 놓고 다른 것을 집어 듭니다. 또한, 어떤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를 따라 돌진합니다. 우리는 그런 어린아이에게서 믿음직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어른은 믿음직하며 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변덕스러운 열광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며,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또한, 언제나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박해받을 각오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남자답게 강해야 합니다. 디모데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박해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바울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만일 여러분이 믿음에 굳게 서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곧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며 구식이고 여러분의 신학은 아담 시대의 신학이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을 조롱하고 비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무실에서 놀림감이 되고, 사람들은 여러분을 비웃을 것입니다. 군대의 막사에서나 가게에서나 사무실에서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면, 사람들이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들은 조소와 풍자와 비웃음의 화살로 여러분을 공격할 것입니다. 굳게 선다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굴복하고 타협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강하여지기 바랍니다!

 

왜 우리는 남자답게 강해야 합니까?

우리의 대의가 위대하고도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에게 조국을 위해 싸우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보다 훨씬 큰 대의가 있습니다. 곧 복음의 진리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남자답게 강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남자답게 강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현재의 위험한 상황 때문입니다. 원수는 강력하고 힘이 셉니다. 그는 자기의 큰 군대에 명령합니다. 반면에 교회는 작고 약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인기가 없습니다. 군중들은 우리 편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편에 속한 사람들은 점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해야 합니다. 남자다워져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약함을 크게 의식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모든 제자가 도망치고 떠났을 때도 홀로 포도주 틀을 밟으셨던 그분을 바라보면서, 남자답게 강하여지기 바랍니다. 그분은 절대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얼굴을 굳게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만일 그분이 우리를 위해 그렇게 행하셨다면, 그분은 진정 그분을 위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남자답게 행하라. 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