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권능을 회복하라
본문: 롬 8: 1-11, 26-27
제목: 성령의 권능을 회복하라
명제: 성령의 권능으로만 육신(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다.
여기 한 사람의 탄식을 들어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오호 곤곤한 자로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 이 탄식은 불신자의 탄식이 아닙니다. 이 탄식은 위대한 바울 사도의 절규입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의 탄식입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들의 현실적인 안타까움 입니다. 우리는 잘 믿어 보려고 마음은 원하는데 실제로는 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우리는 이길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너무나 무기력 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 속에는 부패한 본성인 즉 육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이나 결심만 가지고는 결코 육신을 다스릴 수가 없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나약함이요 한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탄식하던 바울의 결론이 이러합니다. 육신에서 이기게 하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알고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육신을 이길 수가 있다는 것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성령만이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인 육신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육신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고 실제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회복하는 삶을 누리도록 돕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을 회복 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를 확인하십시오.
롬8:1-2“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 인생은 육신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육신이란 성령의 감화로부터 떨어져 있는 타락한 인간 본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육신의 정의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영어로 sinfulnature 입니다. 오늘 본문은 육신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육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들어 죽게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때 우리 속에 육신 외에 또 다른 법이 들어오셨는데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바로 성령님을 말씀합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리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도인이란 생명의 성령의 법인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롬8: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멘! 그런데 이미 내 마음에 텃주 대감처럼 굴림하고 있었던 타락한 본성인 육신을 이기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이 육신을 다스려야만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령에 사로 잡혀야합니다. 성령만이 육신을 이기고 나를 변화 시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원래 그 천성이 천둥처럼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별명이 우뢰의 아들이었습니다. 성깔이 아주 더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믿고 성령의 사람이 된 후 성령님이 그를 변화 시키셨습니다. 나중에 그의 별명이 사랑의 사도로 바뀝니다. 설교할 때 마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 하니까? 그의 제자들이 사도님 다른 주제의 설교를 좀 하시지요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들것에 실려 주일 강단에 옮기진 요한 사도는 이런 설교를 했답니다. 그래도 “서로 사로 사랑하라.” 우뢰의 사람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변화시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령이 내 육신을 사로잡으면 나타나는 여러 변화들이 많습니다. 마는 한 가지 특징은 자기의 약점에서 자유로워지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다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 즉 성령으로 사로잡히면 여러 변화 가운데 자신의 약점에서 자유로움을 얻습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 불평, 원망이 많습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과거에 매여 삽니다. 육신은 자기의 약점에 집중하도록 하여 인생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인생으로 하여금 아무 쓸모도 없는 것에 에너지를 다 소비하게 만듭니다. 실패하는 인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런 사람도 없습니다. 약점이 있지만 성령의 은혜로 그 약점을 극복한 사람을 쓰십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란 이미 결정 된 것에 고민하지 않고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에 생명 거는 사람입니다. 이미 결정 된 것, 어느 학교 출신인가?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가? 어는 지역 출신인가? 얼굴이 미모인가? 평범한가? 이런 것들은 이미 결정 되었습니다. 은혜 받는다는 의미는 성령에 다스림을 누리는 삶을 말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신의 약점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더 잘 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이것이 바로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내 인생이 영원한 것에 어떻게 쓰임 받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정말 집중해야 할 것은 은혜 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폭포수처럼 받아야 됩니다. 은혜 받는 것은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은혜 받으면 육체의 소욕에서 이기게 됩니다. 인생이 변화 됩니다. 오늘 이 질문 앞에 다시 한 번 답을 해 보십시오.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 구원 받은 사람인가와 동일한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을 영접할 때 성령님이 내안에 오십니다. 확신하십시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확신하십시오.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구원 받기 이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자였으나 구원 받은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왜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사람입니까?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을 회복 할 수 있을까?
둘째는 성령이 내 생각을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롬8:5-8“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살면 즉 성령의 통제를 받으면 육신을 이기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육신을 따라 갈 것인가 성령을 따라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내 생각입니다. 생각을 마음이라고 혼 또는 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내 생각이 육신을 좇아 생각하면 하나님과 원수 노릇을 하며 결국 그 인생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반면 성령의 일을 생각하면 생명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 가 아니라 이 질문을 뛰어넘어 나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인가? 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다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사는 사람인가는 다릅니다. 예수 믿어도 성령을 따라 생각하는 즉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 즉 육신을 따라 살수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을 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생각과 그 동기가 세상 적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에 자기 생각이 붙잡혀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 성령님이 강력하게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은 탄식하고 소멸할 뿐입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부패한 육체의 소욕에 끌려 삽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성령을 따라 생각하는 즉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생각을 성령의 통제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동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합니다. 그 결과는 생명이 넘치고 평강이 넘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와 역사를 경험하면서 사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이 문제입니다. 내 생각의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육신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성령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살펴보십시오. 갈5:17-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전쟁터와 같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 혹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 했는데 갈라디아서는 법이란 말 대신 소욕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소욕은 영어로 desire 인데 강력하게 원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원하듯이 우리 안에 있는 죄악 된 본성인 육신은 강력한 소욕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 배후는 마귀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성의 자랑을 통해서 인생을 강력하게 끌고 가서 죄 짓고 결국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코걸이에 코가 낀 큰 황소가 도살장으로 맥없이 끌려가듯이 이것은 안 되는데, 죄 짓는 일인데 알면서도 인생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강력한 힘으로 끌고 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대로 살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삼손은 참으로 큰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육신을 이기지 못하여 실패한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는 정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육체의 소욕에 몸을 내어 던졌습니다. 결국 이방 여인 들릴라의 유혹에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분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억 하십시오.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 성령님도 소욕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욕입니다. 하나님 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는 없습니다. 따라서 내 생각을 성령님께 의지하면 성령님은 내 생각을 사로잡아 육신의 소욕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패배하는 생활이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패배의식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인간인데 죄 짓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불신자에게는 맞는 말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틀립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육체의 소욕보다 더 강력한 성령의 소욕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성령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실 승리가 보장 되어 있는 것이 것입니다. 아멘! 내안에 강력한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망각하고 자기 생각, 힘, 자기 재주, 자가 정성, 자기 의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계란으로 바위 깨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의 선악과를 반납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아 인간 조상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은 선악과는 하나님의 뜻 대신 나의 뜻, 나의 생각, 나의 견해, 나의 독립된 의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우리 인생 되신 선악과를 반납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십자가는 나는 즉 나의 생각, 의견, 뜻은 죽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패배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장성한 어른이 초등학교 학생 한데 얻어맞아 찡찡 거리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어른이 아이한데 얻어맞아 울고 있는 처량한 모습이 상상이 됩니까?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현실은 이렇게 부끄럽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의 육신을 이기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숨쉬기 요법을 사용한답니다. 우리가 숨을 들어 마실 때는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입니다. 뱉을 때는 나쁜 공기를 또해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생각은 계속 들어 마시고 나쁜 생각을 자꾸 내 뱉는다고 합니다. 육체의 본성은 자꾸 내어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생각은 계속 들어 마시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순종과 회개의 삶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을 맞추어 순종하며 나쁜 육신의 생각은 내어 버리는 즉 회개하는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육신을 이기는 것은 성령뿐입니다. 순간 순간 내 생각을 성령에 따라 맞추어 순종하면 육신의 행실은 힘을 잃고 나는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의 연약함을 결코 외면하시지 아니하시고 도우십니다. 롬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서서 육신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실패의 연속의 삶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승리가 보장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의 도 우심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내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사 육신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도 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내 생각 즉 내 마음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학식, 내 주장, 내 의견, 내 의지에 맞추어져있나요? 아니며 내 생각과 그 동기가 성령 즉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있나요? 내 생각이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따라가고 있나요? 여러분의 생각이 어디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의 성공 여부가 결판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생각 즉 마음을 한번 정직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