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기름 부으심(수정본)
1,본문: 요일 2:20-21, 27
2; 명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3. 제목: 성령의 기름 부음
1. 갈등
우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진리로부터 빗나갈 위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교리로 빠뜨리려는 유혹을 받을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교회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요한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적그리스도들에게 꼬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왜 여기에 남아 있느냐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것과 떠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잘못된 가르침을 거절하고 든든히 설 수 있도록 해준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이 같은 질문에 오늘 본문이 답을 줍니다. 요한은 그것은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성령 사역으로 인해 교회 안에 남아 있는 그들을 위협하는 교묘한 것들을 식별하고 이해하고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21”요일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 2: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나서 27”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로 설명합니다.
2. 갈등 심화
그러면 기름 부음이란 용어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영향력을 매우 생생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사용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똑 같은 기름 부음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도 행해졌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그들은 구별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자주 기름으로 상징되는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생명 또는 빛을 위한 힘을 공급해 주는 의미의 기름은 성령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따로 세움을 받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선지지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벧전 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름 부음을 받으심으로 선지자 제사장 왕이 되셨던 것처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지지자요 제사장이요 왕들입니다. 주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그분에게 임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메시야 적 사명과 구원 사역 사역을 위해 기름 부음을 받으셨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거룩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거룩하신 주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합된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것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기름 부음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셨듯이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령을 받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사람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중에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성령을 받았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누구도 성령의 은사인 기름 부음을 받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 결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교회 안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의 사역으로 인해 참된 신자로 남아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선물이 그리스도인을 인도해 가는 방향을 어디입니까? 요한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서술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풀이하면 ”우리로부터 빠져 나간 자들은 알지 못했으나 너희는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7절”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라고 말함으로써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주어지는 주된 결과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논쟁이 지난 교회사에서 치열했습니다. 17세기 청교도들과 퀘이커 교도들 간의 논쟁이 있습니다. 청교도 운동 중 극단적인 계파가 결국 퀘이커 교단으로 나누어졌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기름 부음을 통한 내적 조명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직접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하지 않다고 했는데 직접 계시란 어떤 의미에서 사도들이 영감 받았던 것과 거의 동일한 차원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요한 사도는 우리가 거룩한 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으니 모든 것을 알 것이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우리에게 일일이 보여주고 지시해 주는 내적 조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꼭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지시받고 인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논쟁은 퀘이커 교도에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와 관련된 모든 가르침에 의해 문제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 안에서 내재하고 계신다고 믿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으며 참으로 영적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에게 주시는 환상과 자신을 인도하고 이끌어 주는 빛에 민감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날에도 어느 것보다 성령 사역에 비중을 두고 가르치는 집단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교리도 믿지만 주된 강조는 성령 사역에 있습니다. 성령 사역을 강조하다보면 요한 사도가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주장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경향은 지금도 변함없이 직접 계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항상 무엇인가 보았다거나 무슨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사도 시대에 성령이 계시하신 것과 같이 지금도 그들에게 진리를 직접 계시하고 계신다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17세기 퀘이커 교도들이 이런 주장을 했고 오늘 날에도 사도와 마찬가지로 영감 받았다라고 말하면서 직접 계시의 타당성을 주장합니다. 두 번째 경향은 자신들의 주관적 상태와 상황을 근거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임재 해 음성을 들려주시는 등의 역사가 있는가 없는 가를 기준으로 삼아 만일 있다면 진리로 받아들이지만 없다면 참 진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진리가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인 것으로 전락되어 자신에게 어떤 느낌으로 주어지느냐에 따라 판단합니다. 세 번째 경향은 성경 말씀의 가치와 중요성을 경시하려는 것입니다. 주관적 상태를 강조하면 할수록 객관적 말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주관적 경험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말씀이라는 것에 모든 것을 연결시켜 내면세계의 것보다는 외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합니다.“라고 성경을 중시하는 자들은 비판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성경을 경시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한 구절만 있어도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구절만이라고 깊이 생각하는 지경에 들어갈 수 있으면 그 구절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그에게 여러 가지 일이 생긴다. 라며 계시 받은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읽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성경을 경시합니다. 네 번째 경향은 무오 성을 주장합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자신들이 무오하다고 주장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틀린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왔습니다. 이상의 것들은 본문을 잘못 해석함으로 주어지는 위험스러운 경향입니다.
3. 전환
그러하다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사도가 인도하심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어떤 특별한 결정을 내리는데 하나님이 우리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기 원하시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 가르치려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교리가 진실”임을 말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이 사도들이 받은 것과 같은 직접적이고 새로운 진리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사도들의 복음 전도와 가르침을 통해 진리를 받고 믿었기 때문에 사실 믿음이 제 2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적 조명에 의해 직접 주어지는 진리를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엡 2: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 위에 세우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이 터이기 때문에 새로운 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가지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신약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사도들이야 말로 선별된 독특한 자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성령이 진리의 말씀을 계시하였으며 그들은 그 계시의 말씀을 성경책에 기록했고 이 말씀의 터 위에 우리는 건축을 해 나가며 또 이 말씀에 의해 살아가고 이 말씀에 우리의 모든 믿음의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은 우리와는 다른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가 사도들과 같은 직접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미 주어진 말씀 외에 또 다른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진리와 믿음은 이미 사도들에게 그리고 그들은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가톨릭도 이전의 선지자나 사도들과 같이 오늘 날에도 직접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신약 성경이 끝난 이후에도 새로운 진리를 받아왔다고 주장합니다. 퀘이커 교도들과 유사한 주장을 합니다. 그들은 이처럼 특별 계시의 타당성을 주장함으로써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전후 문맥을 볼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적 지식을 모두 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지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요한이 여기서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모든 영적 지식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은혜와 지식 가운데 성장할 것에 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요한이 모든 것이라고 말할 때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다루고 있는 특별한 주제를 염두 해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것을 알며 따라서 무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교리에 관한 견해서 필연적으로 동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간에는 여러 종류의 다양성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례와 예언에 대한 여러 가르침에 대해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은 무오성에 관한 가능성을 자연적으로 배제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선한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실수를 합니다. 결국 본문이 말하는 것은 무오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요한이 독자들에게 이 서신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가르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벧후 3: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라기 위해 젓을 필요로 하며 그 다음으로는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에게 전혀 가르침이 필요 없다면 우리는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요한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고전 2:13-14“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 같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일반인이 가지지 못하는 영적 이해력이 있다고 말하면서 영적인 것들은 영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요한도 역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이해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으며 요한 역시 “성령이 너희에게 이해력을 주셨으니 진리를 굳게 잡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무슨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요한은 본문에서 주님의 탄생에 대한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가 의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교리와 그분이 오셔서 행하신 사역에 대한 교리를 이해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 안에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교리들을 이해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교리와 이신 칭의 의 교리를 이해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사도 바울이 고전 2:16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한 것 같이 이런 것들은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령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영광스런 본질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비록 단순하고 무지하다 해도 성령의 조명하심이 주어지는 한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은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해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이해하고 진리를 왜곡되게 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인성과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등에 대해 올바르게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이 그와 같은 사실을 알기 때문이며 특별히 여러분의 신앙을 위협하는 교묘한 유혹을 지적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 대단원
마지막으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가 진리 안에서 그리고 믿음 안에서 보호함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순절 후에 몸 된 교회에 임한 이후 줄곧 교회 안에 머물러 계셨다는 것입니다. 배교자도 있지만 남은 자도 있습니다. 왜입니까? 바로 성령의 기름 부음이 그들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을 믿음 가운데 그리고 진리 가운데 보호해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배교의 길을 갈지라도 그들만은 참된 진리를 보고 또 보았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도록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분문에서 가르치는 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해 고전 2:16“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진리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