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시는 하나님
본문: 행 2:1-2
명제: 기독교(성경)의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3. 제목: 행동하시는 하나님
1. 갈등
사도행전은 교회의 기원에 관한 권위 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위대한 메시지는 주 옛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입니다. 행 1:1절 에서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한 모든 것 바로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행 2장에서 기독교의 기원을 접하게 됩니다. 이 기사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사명 그 사명이 어떻게 이루어 가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사실입니다. 행 4:13절“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던 사람들이 세상을 뒤집어엎었다는 것이 아니라 범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오늘 날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기독교는 죽은 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항상 종교였습니다. 기독교가 종교에 불과하다면 사람들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국가 종교가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특별한 의례적 행사에 비추어 생각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세례 받게 하거나, 결혼식, 장례식을 치루는 기관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위대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나도 교회는 그 한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일 뿐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는 국가적인 제도나 어떤 인간적인 제도라는 개념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그 중심에 주님이 계신 영혼들로 구성됩니다. 교회는 인간 행위의 결과이며 우리가 어떤 전통을 영구화하고 있다는 개념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저주 받은 저주였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종교주의 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예배에 참석합니까? 단지 전통이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합니까? 그것은 전통을 영구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의무감으로 교회에 갑니다. 예배는 생기가 없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에 등을 돌립니다. 참된 기독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러므로 밝은 예배와 흥겹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또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런 예배는 보다 생기가 있지만 그 생명은 성령의 생명이 아닙니다. 생기가 있던 없던 사람이 제어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둘째 기독교에서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하나님은 언제나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몰라 “알지 못하는 신” 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종교의 신은 언제나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 신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인종의 미신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부르는 신입니다. 폴틸릭은 하나님을”절대“ ”궁극“ 바르트는 ”타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우주 뒤의 어딘가에 있는 분명하지 않는 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경우 이 말의 실제 의미는 사랑이 하나님이므로 사랑을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발견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 교회에 갈 것이 아니라 세상의 술집에 가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낡고 미신적인 개념을 대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최신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거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한 인격체로 말하지 말라 고 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살아있는 진리이고 진정한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2. 갈등 심화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장이나 성경 어느 구절이든 누구든지 성경을 읽는 사람이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출발점은 인간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 창 1: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말합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으로 시작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문제는 세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이 많은 부분에서 잘못되는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그 영광이 하늘에 충만하며 만물 위에 계시는 분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분과 그분에 관한 메시지가 어떤 면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 복되신 삼위일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현대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하나님은 추상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단지 "절대" “타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생각하시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선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꿔 말하면, 그분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나중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전 1:9). 기독교는 죽은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제가 강조하고 싶은 요점입니다. 다시 한번 봅시다. 행 2:1-2절“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이들은 함께 모였으며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사람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더니.”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입니다. 다른 종교는 모두 죽은 신을 섬깁니다. 그 신도들에게는 찾아갈 살아계신 하나님, 행동하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이들은 열반을 말하고 무아지경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믿는 것이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한낮에도 어둠 속을 헤매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더듬거리고 비들거리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포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어졌다는 선포입니다. 이 세상은 진화된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세상을 소유하시며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멀리 계신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종교에서처럼 막연하고 모호한 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지으신 세상을 내려다보시며 세상에 관여하십니다. 초대교회의 직접적인 메시지이기도 했던 성경의 위대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큰일"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들 가운데 몇 가지를 강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이후로 지금까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세상을 구속하고 회복할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랜 세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왔고, 이것이 문명과 정치활동의 역사입니다. 이들은 무질서 가운데서 최대한 질서를 보존해야 하지만, 결코 이들이 이 세상을 구속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파하는 하나님은 저녁 서늘한 때에 동산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내려오셔서 남자와 여자에게 말씀하심으로 이들의 악함을 드러내시고 이들을 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일에 관심이 있으시며, 이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며 하나님 활동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타락 기사 이후를 보면, 인간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죄에 깊이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에 홍수로 인간을 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것은 한 면일 뿐입니다.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의 위대한 구약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이교도들 가운데 살고 있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간을 내려다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그를 불러내셨으며, 아브라함은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습니다.“(히 11:8).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며 참된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행동하는 하나님이십니다.
3. 전환
한편으로, 신약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3장에서 시작됩니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있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1-2).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는데 이제 세례 요한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광야에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행동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주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는 이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나사렛 예수는 이 땅에 보내어져 인간들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고 하나님이 행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이 일이 없었다면 제자들은 죽을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속에서 이들을 통해 계속해서 행동하고 계셨습니다. 우매하고 죄에 빠진 인간은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교회가 우리 인간의 작품이라면, 다른 많은 제도처럼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여전히 존재합니까? 이에 대한 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흥 가운데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령을 다시 보내십니다. 종교개혁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세례 요한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셨듯이, 마르틴 루터에게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시고 큰 능력을 주셨을 때, 그 사람은 1500년 역사의 큰 교회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메시지와 성령으로 충만한 마르틴 루터 한 사람만으로도, 그 가르침이 너무나 이교도적으로 변해 버린 교회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왜 이렇게 하십니까?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아무리 위대하고 뛰어나더라도, 모든 사람은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출생했고 죄 중에 잉태되었습니다.”(시 51:5).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우리 모두가 마침내 병들고 부패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구원을 베 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뿐입니다. 그분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요.3:16)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 그 몸이 찢기며 피를 흘리게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구원받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주셨다는 메시지입니다. 기독교는 모두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선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철학책을 읽으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쓸데없다는 것을 압니다. 저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 보사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눅 1:68). 우리는 정욕과 악한 욕망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처럼,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묻습니다.(행 2:12). 기독교는 능력입니다. 기독교는 급하고 강한 바람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기독교는 제자들을 변화시켰으며, 그 결과 약하고 겁 많고 소심하고 무기력하고 쓸모없던 그들이 하나님의 강한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이해를 완전히 초월합니다. 이들은 "이 어쩐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물은 것은 당연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그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은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체험을 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그런 다음에는 부정문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철학자들과 점쟁이들과 사상가들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이것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당신의 기적적이고 영원한 능력의 영광과 기사(奇事)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메시지, 이러한 복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전파한 것이며, 이 때문에 오순절에 교인이 3천 명이나 늘어났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4. 대단원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똑똑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6). 그렇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깨닫고 그분께 부르짖는 자는 누구든지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기독교관입니까?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 참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 개입하시고 오시는 하나님을 아십니까?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야곱이 브니엘에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그분을 만났듯이, 여러분은 어떤 형태로든 그분을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의 영혼에 닿는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지금의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십니까? “나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게 내게 무엇인가를 하셨다는 것뿐입니다” 라고 말합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여러분이 가진 것이라고는 여러분이 행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뿐이라면 제 생각에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오실 필요는 없지만,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며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통해 여러분의 삶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항상 알도록 해줍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