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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축복(수정본)

wordlove 2020. 12. 31. 08:36

1. 본문: 5:4

2. 명제: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제목: 두 번째 복/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

 

이 세상은 웃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억지라도 웃으라고 말합니다. 웃으면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건강에도 좋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애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즐거워하라. 모든 애통거리에서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산상설교에서 하신 두 번째 복입니다. 두 번째 복은 불행한 사람이 행복하니 라고 번역도 가능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축복에 대한 역설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하신대로 산상수훈은 천국 백성은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복도 첫 번째 복처럼 기독교인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보이게 하는 역설의 복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이 말씀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6장에는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웃음과 유쾌함과 행복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사야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통해서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셨습니다. 요11:35요 11:35에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주님에게는 쾌활함과 명랑함과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두 번째 복은 웃는 자가 아니고 기뻐하는 자가 아니고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다. 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위로의 뿌리가 중요합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지 않는 기쁨이나 행복은 안개처럼 지속성이 없습니다. 안개처럼 싶게 사라질 순간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뿌리를 박은 축복이야 말로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피상적인 웃음과 기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복은 애통하는 사람에게 있음을 알려 하나님의 복을 누리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복을 받는 애통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육신적인 애통을 하는 사람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살면서 죽음이나 좌절을 만날 때 우리는 슬픔을 겪습니다. 슬픔은 생활에 꼭 필요한 양념입니다. 슬픔은 때로 인간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습니다. 어떤 동기로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라는 통계에 의하면 개인적인 절망감,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믿음을 가지게 된 가장 보편적인 동기라고 합니다. 아랍의 격언에 모든 햇빛은 사막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웃음과 행복이 곧 슬픔과 불행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솔로몬은 지혜자의 마음은 잔치 집에 있지 아니하고 상가에 있다고 했습니다. 고통의 순간은 참 자신을 깨달은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슬픔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보배가 겸손입니다. 고통의 때에 믿음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축복이 이런 인간적인 슬픔을 가리킬 수는 있지만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이런 육신적인 애통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의 복을 받은 애통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2. 영적인 애통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두 번째 복은 영적인 애통입니다. 첫 번째 복이 영적인 가난을 의미한 것처럼 두 번째 복도 영적인 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는 부정적인 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성령 충만 하기 전에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구원의 기쁨을 갖기 전에 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억지로 기쁨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쁨을 얻기 전에 죄 의식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은 죄에 대한 설교를 반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설교하지 말라 사람들이 싫어한다. 축복만 말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사람들의 귀만 즐겁게 만드는 아부하는 소리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로 행복을 얻으려면 먼전 죄에 대해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애통이란 자기 죄에 대한 애통을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첫 번째 복의 약속은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어서 죄에 대한 애통이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은 죄의 폭정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두 번 우셨습니다. 한번은한 번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보시고 우셨고 다른 한 번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죄악과 강퍅함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죄가 문제였습니다. 애통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죄악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애통하기 위해서 먼저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함을 대면하고 나의 삶을 응시해 볼 때에 나의 철저한 무능과 절망을 보게 됩니다. 이런 나의 영의 상태를 볼 때 나는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통하기 위해 먼저 롬 7장의 경험을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롬 7장에서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내 속에서 나를 이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나는 화를 잘 내는가? 어째서 나는 성질이 못되었는가? 어째서 나는 나를 억제할 수 없을까? 왜 나는 시기심이 많고 욕심도 많은가? 내속에 무엇이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자신의 지체 속에 악함이 있음을 보고 그것을 미워하고 그것 때문에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만의 경험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인의 경험이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이런 죄악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진정한 기독교인은 자신의 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도 애통해 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 사람들의 죄 된 모습을 보고 애통합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애통해합니다.. 주님이 이런 애통을 가졌습니다.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가져오고 삶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죄 때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심령으로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하시려 오신 주님을 배척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받을 심판을 아시고 우셨습니다. 주님은 죄 그 자체의 성격 때문에 애통하며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애통하셨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마음 문을 열지 않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보고 설교자로서 참으로 탄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영적 애통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영과 정신과는 반대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마음 것 웃으라. 개그맨 전승 시대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의 실제 상태를 보지 못하고 억지로 행복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의 표현은 먹고 마시고 즐기자입니다.. 세상은 죄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표피적인 기쁨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암 환자에게 머큐로크롬을 발라놓고 이제 다 낳았으니 기뻐하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암 부위를 수술해야 진정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암수술의 고통이 싫다고 억지로 외면하면서 기뻐하라는 말은 거짓말로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과 다릅니다. 성경은 죄를 먼저 고치라고 말씀합니다. 7장에서 바울 사도는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는가? 바울은 자기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감을 가지고 바울 사도처럼 내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라는 체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자식이나 부모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의 슬픔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흘릴 눈물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의 죄와 그들의 심판과 죽음의 결과 그리고 그 자신을 구원하시려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슬퍼하며 우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웃의 불신앙을 보시고 우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의 나오는 경건한 사람은 세상의 악과 불신앙을 슬퍼하면 울었습니다. 119: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 때문에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나 먼저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해야 합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중히 여김으로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죄는 아무리 슬퍼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을 더욱 더 체험해야 합니다. 18세기 인디언 선교사님이었던 데이비드 브레이드는 17401018일자 일기에서 아침 기도 시간에 나의 영혼은 심히 녹아내려 나의 엄청난 사악함과 부도덕함 때문에 몹시 슬퍼했다 이와 같은 눈물은 하나님께서 그의 병에 담으신다고 하는 거룩한 눈물입니다. 죄 때문에 흘리는 거룩한 애통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복을 받은 애통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3. 하나님의 위로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 복은 곧 죄를 깨닫고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먼저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 안에 위로가 있습니다. 민감한 영혼은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하며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제공하신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우리의 의로 여겨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받으실 만한 존재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용납되었습니다예수님 안에서 애통하는 나의 모든 죄는 용서받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위로는 죄악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예수 믿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예수 믿어 의롭다 함을 얻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의 세력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의 도움으로 죄의 권세를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통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성령님의 도움으로 자기 죄를 애통하는 사람은 분명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화 구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위로는 그리스도께서 언젠가는 신자들의 죄와 죄의 결과를 영원히 제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의 현존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으로 가면 더 이상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습니다. 7:17“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기독교인은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심령으로 신음을 합니다. 하지만 위로를 받습니다. 곧 다가올 영광을 압니다. 주님이 오셔서 의가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애통하더라도 그 앞에 있는 영원한 소망 때문에 행복합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 영원한 상태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눈물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슬퍼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들입니다.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 구원을 얻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지은 죄 때문에 통곡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위로하사 사도로 쓰임 받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죄를 죄었을 때 회개함으로써 위로를 받았습니다. 반면 사울 왕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위로는커녕 더욱 강퍅하다가 망하고 맙니다. 가롯 유다는 죄를 짓고도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더욱 교만하고 강퍅하다가 자살로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탕자 어거스틴을 위해 우는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보고 자식을 위해 우는 어머니의 눈물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유명한 말은 브람스 목사가 했습니다. 그 후 정말 탕자 어거스틴은 주님 품으로 돌아와서 성자가 되었습니다. 회개는 보혈과 함께 역사하사 치료와 용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애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렌스키는 모든 위로 가운데 가장 큰 위로는 통회하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면 선고이다 라고 했습니다.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철저한 죄 성과 절망을 보고 주를 찾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주를 발견합니다. 애통의 의미를 알기 전에 예수님을 그의 구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 할 따름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위해 변호해 주실 주님이 계심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감사와 감격을 낳습니다. 그리고 애통이 변하여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회심 때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 가운데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슬픔이 없이는 기쁨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로 가는 순간 주님의 평화와 행복이 돌아오며 그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애통과 기쁨이 슬픔과 행복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눅 18:9-14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는 저 세리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는 토색,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한편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의롭다 함을 받고 자기 집으로 내려갔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셨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부터 손가락질을 당했지만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애통했던 세리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먼저 임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위로하십니다. 주님은 위로자이시며 성령님은 위로 자이십니다. 고후 1장에서 환난 중에 위로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우리의 위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애통을 통해서 위로를 받게 되고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복된 자인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와 건강한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의 웃음이 넘칠 뿐만 아니라 죄를 회개하는 애통의 눈물이 또한 많은 교회요. 신앙인입니다. 내 죄와 이웃의 죄와 이 민족의 죄와 한국 교회의 죄 때문에 흘리는 거룩한 눈물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의 복을 누리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