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네 번째 축복(수정본)

wordlove 2021. 1. 2. 08:15

1. 본문: 5:6

2. 명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배부름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3. 제목: 네 번째 축복/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임하는 복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복은 행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소유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품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 받을 마음씨를 가져야 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첫째 복은 빈 마음 가난한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스스로 자기를 심판하는 애통의 마음입니다. 셋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 즉 온유한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네 번째는 의를 위하여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행복을 원합니다. 만사를 행복하기 위해 행동 합니다. 그러나 행복을 갈구함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행복에 주리고 목 말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에 목말라있습니다. 역설적으로 행복에 목말라하기 때문에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행복은 직접 구해야 될 것은 못된다고 합니다. 세상은 근본적 오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돌파리 의사는 이 사람의 고통 자체를 해결하는데 만 몰두합니다. 그 결과는 그 병을 치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병의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명의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돌파리 의사의 처방을 선호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어리석음입니다. 세상은 나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합니다. 문제는 고통과 불행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어떤 체험을 통해 복을 얻어 구해 보려고 목말라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이 그 답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네 번째 복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배부름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부름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의에 목마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아래의 질문을 던집니다.

 

1. 의란 무엇입니까?

성경에 있어서의 의는 세 가지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면, 도덕적인 면, 사회적인 면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얻게 됨을 가르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하나님의 의 칭의 구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날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고자 하는 욕구요. 죄를 제거하려는 욕구입니다.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 존전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살았습니다. 이 의에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의는 성화 구원의 의미입니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심령의 가난이 무엇이며 자기 내부의 죄로 인한 애통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기를 소원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롬 7장에서 그의 지체 속의 다른 법 곧 자기도 모르게 그를 끌고 가는 악한 세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더 나아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죄를 지으려는 행동에서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제거하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이기적인 자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개인 간의 싸움 국가 간의 싸움은 다 이기적인 자기 주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적극적으로 성결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이 의는 인생의 최고 욕망이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 빛 가운데 동행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라고 했고 또 하나님은 빛이시오 그 안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 빛 안에서 성결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입니다. 최고의 욕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 구원이며 의의 도덕적인 면입니다. 이의에는 사회적인 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를 히브리어로 체다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의는 공의 또는 정의의 의미입니다. 압제당하는 자들을 구하시고 해방시키는 정의와 공동체 회복의 정의입니다. 즉 힘없는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언약 공동체 안의 올바른 장소로 돌아오게 하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은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듯 구제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돈을 축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뜻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라고 강조합니다. 인권, 공정한 재판, 정직한 상거래, 사회의 압제로부터의 해방등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의로우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루터는 " 당신에 대한 본분은 구석진 곳이나 사막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뛰어나와 당신의 손과 발과 온몸을 바치며 당신이 가지고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구겨진 이 세상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바로 사회적인 면에서의 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하나님 앞에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신앙의 보수는 의의 사회적인 면에 소극적입니다. 신앙의 개인화로 변절 되어 갔습니다. 반면 신앙의 진보는 이 의의 영적인 면을 소홀이 하고 사회적인 관심에만 치우친 것도 사실입니다. 균형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불행한 이유는 하나님의 치유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가 아닌 것을 찾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 명성 행운들을 통해 행복을 찾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찾아야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 의는 인간의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 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인간을 진정 행복하게 만드는 의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의인 것입니다. 이 의를 구하는 자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예수님을 닮기를 소원한다면 행복을 얻고 이 세상은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찾지만 얻지를 못하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의이신 예수님을 먼저 찾지 않고 다른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 고 하십니다. 배부름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의에 목마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아래의 질문을 던집니다.

 

2. 주리고 목마르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북한 땅에는 양식이 부족해서 굶주려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는 지금도 굶어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이 의미는 먹을 것이 없이 굶어 죽어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실 것이 없어 죽어가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의라고 한다면 그 의가 바로 예수님 안에 있다면 예수님을 얼마나 간절히 알기를 원합니까? 당신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음식을 원하듯이 또 가뭄에 허덕이는 사람이 물을 갈망하듯이 예수님을 진정 원하고 있습니까? 산상 수훈의 굶주림은 영적 굶주림입니다. 어거스틴은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는 안식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이 의이신 예수님에 대해 목마르다면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율법적인 생각은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온유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교만으로 끌고 갔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궁핍의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만족하기 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영적 주림과 영적 목마름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상태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을 목말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찾기에 목말랐습니다. 성경은 굶주린 자에게 약속을 제시합니다. 107:9“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 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목마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로 역정을 저술한 존 번연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 진리에 목말랐다고 합니다. 내가 진리를 알기 전까지 식음을 전폐하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바로 진리임을 발견하고 천로역정이라는 불멸의 책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거룩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욕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온유한 자로 만들어 주세요. 계속 소원해 보십시오.. 굶주림은 계속성입니다. 물론 이 땅 위에서는 결코 완전하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야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7:16-17”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 임 이러라 진정으로 복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알기에 닮기에 굶주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세워지도록 갈망해야 합니다. 목말라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죄악 된 모습에 계속 애통해야 합니다. 계속 온유한 심령을 소망하십시오. 그러면 의에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배부름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의에 목마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아래의 질문을 던집니다.

 

3. 배부르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났을 때 온전한 만족을 얻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얻기는 커녕 그는 넝마와 굶주림과 고독과 불안만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그는 배가 고팠을 때 비로소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한 후에야 그는 세상에서 찾으려고 했던 모든 것을 찾았습니다. 아버지가 옷을 입혀 주었고 음식을 먹여주었고 따뜻하게 받아 주었고 아들의 돌아옴을 기뻐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그들은 배부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은혜의 복음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코 의로 채워지지 못할 것이며 복을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사모한다면 여러분은 이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을 욕망하는 순간 그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하나님 사이의 죄와 죄책의 장벽은 제거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여러분은 이미 용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즉시 예수님의 의로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 속에서 죄를 보시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 받은 죄인으로 보십니다. 이제는 율법아래 있지 않으면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신은 용서받은 죄인임을 믿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즉각 발생함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죄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출할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 구원받기 위해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목마르고 주리면 성령께서 왕성하게 일하실 것입니다. 내주하는 성령과 함께 동행하면 여러분은 사탄을 물리치며 사탄은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은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존전에 험도 없고 점도 없이 서게 될 날이 오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완전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요 또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 라고 외칩니다. 바울은 완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예수님을 믿은 순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동시에 계속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음을 아십니까? 그는 가득 채워집니다. 그리고 채워질수록 그는 더욱 주리고 목마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복입니다. 성화 구원은 계속되며 영광에서 영광으로 계속 변화를 받아 하늘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하기까지마침내 영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충만이 만족을 얻었으나 우리 최고의 욕망은 여전히 계속해서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권능을 알고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 까지 이르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저희가 배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배부름의 복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입니다. 먼저 칭 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 구원을 통해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진실로 의인이 되고 의인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 는 말씀처럼 의로운 사람에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복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 어두운 이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배불러 자기 주변의 세상을 밟게 비추는 빛이요.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과 같은 의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