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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축복(수정본)

wordlove 2021. 1. 4. 08:08

1. 본문: 5:7

2. 명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3. 제목: 다섯 번째 축복/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

 

산상수훈의 팔복은 서로 논리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다는 것과 죄를 슬퍼하며 온유한 가운데 겸비해야 하는 인간입니다. 그런 마음 상태로 하나님 앞에 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의의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섯 번째부터 나오는 복(5:7-9)은 그리스도의 영의 감동을 받아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재창조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다른 사람과의 관련 속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팔복은 천국 백성의 성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행동보다 우리의 성품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즉 기독교인은 어떤 존재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존재를 먼저 말하고 그 다음 행동에 대해 말씀합니다. 기독교인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되면 이러한 행동을 결과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2:20“ 내게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기독교인은 내가 주님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나를 다스리십니다. 기독교인의 모든 행동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 성품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복은 하나님의 의를 맛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이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이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아래의 질문을 던집니다.

 

1. 긍휼이란 무엇인가요?

긍휼을 가장 쉽게 보여 주는 것이 부모가 어린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잘못을 했어도 그것은 실수이고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며 사랑으로 덮어 줍니다. 긍휼은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생각 감정 경험 속에 동참하면서 행동으로 사랑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과 비슷한 말이 용서입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말이 있다고 합니다. 딤 후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긍휼과 은혜가 어떻게 다릅니까? 은혜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그 행동화된 은혜가 곧 긍휼입니다. 긍휼은 무력 한자 구원을 요청하는 자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긍휼은 불행 속에 있는 불행한 자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긍휼을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 가운데 타락하고 죄악 된 인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죄악 되고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결단코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인간을 구원하기에 필요한 모든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긍휼의 전부입니다. 긍휼의 영은 여러분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여러분의 권세 하에 있을 때 나타나는 영입니다. 여러분이 긍휼이 있는가 없는가를 아는 길은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 나는 이 사람을 법대로 처리하겠다. 이 사람은 내게 죄를 범했으니 잘되었다. 법대로 하자. 이것은 긍휼의 반대입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복수의 영을 품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 중에 있는 여러분의 원수들에 대하여 측은하고 불쌍히 여깁니까?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여행 중인 그는 강도들의 손에 맞아 죽어 가던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 그가 누워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못 본체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동정이나 측은 감을 느꼈을지는 모르나 그것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긍휼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고 그 사람을 데려다 양식과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단지 느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그 사태를 제거하려는 노력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아래의 질문을 던집니다.

 

2. 왜 천국 백성은 긍휼을 베풀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답을 위해서는 먼저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어떤 성경구절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 해야만 하나님도 내게 긍휼 하실 것이며 내가 용서해야만 나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라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내가 용서 받는 받은 조건은 내가 용서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되는 구절도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구절도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용서하면 나도 용서받을 것이며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나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18장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어떤 잔인한 종이 주인으로부터 빚 청산을 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종은 갚을 돈이 없어 주인에게 빚 갚을 시간을 좀 연기 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주인이 그를 긍휼이 여겨서 그가 빚진 것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작은 빚을 지고 있는 친구에게 빚을 청산하라고 요구합니다. 그 친구도 사정하며 조그만 참아주면 꼭 빚을 모두 갚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종은 그 친구의 요청을 거절하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다른 종들이 이 사실을 주인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주인이 이이야기를 듣고 잔인한 그 종을 불러 좋아 너의 행동에 비추어 나는 네게 한 말을 취소하겠다. 하며 그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까지 감옥에 들어있으라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들어 이와 같이 너희도 진심으로 형제를 서로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 라고 만약 해석하면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은혜 론은 쓸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은 말씀은 쓸모가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성경 구절은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우리가 참으로 회개할 때를 한해서 참으로 용서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나는 심판 외에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내가 용서를 받는다면 그것은 전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로 돌려야 하며 다른 아무것에도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이 뜻은 내가 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서 내 위치를 인식하고 내가 주님의 은혜로 용서 받게 됨을 알게 되면 내게 죄를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다섯 번째 복도 앞의 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의에 직면할 때 나는 철저하게 무능함을 압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내속에 있는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압니다. 나야말로 참으로 가증한 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해주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시고 나에게 새 성품과 생명을 주실 이의에 목말라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 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의를 사모함으로 채움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 의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선물임을 보았습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보았고 체험했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도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웃을 속고 있는 희생물로 죄와 사탄의 종으로 봅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고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나는 그들을 한 때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세상 신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던들 나도 아직 그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으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을 보실 때 주님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다 그들은 사탄의 희생물로 보셨습니다. 그들은 죄의 통제를 받고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보십시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항해 하나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이 세상 신에 의해 눈이 멀었습니다. 저들은 주님을 모릅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했다면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도 이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긍휼을 행하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용서받는 것이면 긍휼을 베푸는 것은 긍휼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긍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속에 용서의 영이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 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 천국 백성은 긍휼해야합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긍휼을 행함으로 여러분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고 계십니까? 긍휼이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아래의 질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3.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받는 복이 무엇입니까?

11:17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지만 남에게 악하게 하는 사람은 우선 자기 영혼이 손해를 봅니다. 늘 불안하고 잠 조차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신경쇠약에 걸릴 것입니다. 14:21“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사람을 멸시하면 하나님도 그를 멸시할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뜻밖에 긍휼을 되돌려 받는 복을 얻게 됩니다. 인심 좋은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6.25 사변이 터져서 이북에서 피난을 오다가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잡은 그 인민군을 보니까 자기 제자였습니다. 그 제자가 선생님을 보고는 아 선생님 이 길을 빨리 떠나세요. 하며 보내 주더라는 것입니다. 잔인하게 구는 자는 언젠가는 그 잔인함을 거두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딤후 1: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멸시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십시오. 항상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 서서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들 긍휼히 여기듯이 긍휼을 베푸십시오. 누구의 실수를 봐도 나도 할 수 있는 실수다. 라고 생각하십시오.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자유함의 은혜가 베풀어질 것입니다. 이웃이 부르짖을 때 모른 체하고 도와주지 않으면 내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도 모른 체하십니다.. 어린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예수님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먹을 것을 얻게 됩니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데 왜 응답이 없을까? 긍휼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긍휼의 기도가 아닙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긍휼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내가 내 마음 속에 죄를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라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빨리 들어주십니다.. 사 58:7-8“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병도 빨리 치료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그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최후의 날에 긍휼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날 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 몸으로 행한 행실을 직고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13“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긍휼은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항상이라는 말을 절제하는 것이 긍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누군가 실수하면 당신은 항상 그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수 한 그것 하나로 한정시켜 보십시오. 항상 실수한다고 말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묵인하고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실수할 때마다 꼬집어서 들추어내는 곳에는 진정한 긍휼히 없을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이 이야기입니다. 어는 추운 겨울날 말을 타고 가는다 웬 거지가 추위에 떨며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스는 말에서 내려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거지가 너무 춥다고 하자 그는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대 그 거지는 계속 떨면서 프란시스에게 옷을 입어도 추우니 나를 꼭 안아 주실 수 없느냐고 다시 요구합니다. 이 거지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프란시스는 병을 옮으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진심으로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꼭 끌어안았던 그 거지가 뜻 밖에도 사라지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어서 네가 이처럼 나를 사랑하는 것을 이제 알았다 는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이후로 그는 부잣집 아들로서의 상속을 버리고 유명한 성 프란시스가 되었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받는 최고의 축복은 자신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과 자유 함을 누리면서 긍휼히 많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사는 것일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을 보니 예수님이 보이는 구나! 이렇게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긍휼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