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설교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wordlove 2009. 8. 10. 09:57

1, 본문: 마 7:1-5

2. 본문 중심 진리: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면 똑 같이 비판을 받게 된다. 어찌하여 형제의 작은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큰 잘못은 보지 못하느냐? 자신의 큰 잘못을 두고 형제의 작은 잘못을 비판하겠다는 외식하는 자여 자신의 큰 잘못을 해결하고 난후 형제의 작은 잘못을 비판하는 것이 온당하지 안 겠는가?

3. 주제: 비판

4. 테마: 비판의 순서

5. 명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먼저 비판의 칼을 대야만 한다.(설득적 명제)

6. 목적: 남의 결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세상 사람들의 자세를 버리고 자신의 결점에 대해 먼저 비판하여 고치는 자세를 취하도록 도전하기 위해서

7. 질문제기: 어떻게 비판을 해야 하는가?(How?)/ 어떤 순서로 비판해야 하는가?(What?)/비판을 할 때 기억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8. 중심단어: 말씀들

9. 전환 문장: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먼저 비판의 칼을 대야만 한다. 비판을 할 때 기억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10. 대지

1) 비판을 하면 비판 받는 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아야한다.

2) 형제의 작은 결점은 잘 보아도 자신의 큰 결점을 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 번째로 알아야한다.

3) 자신의 큰 결점을 두고 형제의 작은 결점을 비판하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임을 세 번째로 알아야한다.

4) 마지막으로 자신의 큰 결점을 고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한다.

11) 제목: 선으로 악을 이기 십시요./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12) 복음: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이웃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비판하기를 명령하신다. 


본문: 마 7:1-5

1. 서론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칼의 상처는 아물어도 말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는 몽골 속담도 있습니다. 성경은 “지혜로운 이들의 혀는 지식을 베풀지만 우둔한 자들의 입은 미련함을 내뱉는다”(잠언 15장 2절)고 합니다. 무심코 한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희망과 용기를 줄 수도 있습니다. ‘침묵은 금’이라는 옛말도 있습니다.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고언입니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 상대에게 희망을 주고 격려하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실패한 사람들은 비판적인 말, 질책하는 말, 원망하는 말, 포기하는 말, 핑계 대는 말,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말 때문에 오래 쌓아온 공든 탑이 한번에 우르르 무너지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실수와 잘못이 말에서 비롯된 것이 적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혀를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면 똑 같이 비판을 받게 된다. 어찌하여 형제의 작은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큰 잘못을 보지 못하느냐? 자신의 큰 문제를 두고 형제의 작은 문제를 비판하겠다니 외식하는 자여 자신의 큰 문제를 해결하고 난후 형제의 작은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 온당하지 안겠는가? 나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남을 헐뜯고 비판하며 다 네 탓이다 라며 저주의 화살을 쏘아 됩니다. 살기가 너무 살벌합니다. 작년에 무고죄로 구속된 사람이 1172명이었고 올해는 6월까지만 1467명이나 된다고 언론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일본에서 무고죄로 기소된 사람은 그해에 단 2명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와 큰  대조를 이룹니다. 무조건 고소부터 하고 보는 고소 남발도 심각하다고합니다. 2004년 고소 사건은 일본은 1만여 건인데 우리는 60만여 건이 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형제를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문제에 대해 비판의 칼을 대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비판이 난무한 .이런 상황 속에서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결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 세상 사람들의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결점에 대해 먼저 비판하여 고치는 자세를 취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도 비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을 하데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을 쫓아서 해보자는 것입니다. 비판을 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1) 비판을 하면 나도 비판 받는 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아야합니다.

1-2절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비판을 하면 비판하는 우리 자신도 반드시 똑 같이 비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비판을 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비판에는 공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누구를 비판하면 나도 그만한 대가를 각오해야만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인과 응보의 법칙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거짓 증인에 대해 분명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가 고자질을 합니다. 그러나 2-3 사람의 증인 없이는 그 고자질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고자질을 재판을 통해서 조사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고자질이 무고로 드러나면  고자질한 그 사람에게 그 처벌이 돌아가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에게 고자질한 사람에게 응분의 대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누구를 불쌍히 여기면 그 사람은 반드시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면 하나님은 나를 용서합니다. 여러분이여! 우리가 누구를 비판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날 때 기억하십시오. 내가 비판하면 나도 즉시 비판을 받게 된다는 이 인과 응보의 법칙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비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판을 하데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을 쫓아서 해보자는 것입니다. 비판을 할 때 기억해야 할 말씀 첫 번째는 비판을 하면 나도 비판 받는 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아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비판을 할 때 기억해야 두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2) 형제의 작은 결점은 잘 보아도 자신의 큰 결점을 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 번째로 알아야합니다. “마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부패한 본성을 가진 죄인들입니다. 자기 똥은 구린내가 안 나는 줄로 착각하며 삽니다. 그렇죠. 그런 우리 인간은 옆 형제의 결점이 티라면 자신의 결점은 대들보처럼 크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큰 결점은 바로 보지 못합니다. 성경은 옆 형제의 결점을 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티는 먼지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점은 들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들보는 대들보입니다. 대들보는 집을 세우는데 쓰는 큰 나무기둥입니다. 먼지와 대들보를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천지 차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씩씩거리면 비판하는 옆의 이웃의 결점이 먼지 크기라면 나의 결점은 대들보 크기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두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신 일종의 문학적인 수사법입니다. 이 예수님의 표현 속에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로 오염 되어 우리 자신과 남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신과 옆의 형제도 잘 모르는 영적 소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즉시 이 말씀을 기억해야만합니다. 나는 형제의 작은 결점은 잘 보아도 나 자신의 큰 결점을 잘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나의 결점은 무엇인가?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정직하게 먼저 돌아보는 자세가 요구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비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판을 하데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을 쫓아서 해보자는 것입니다. 비판을 할 때 기억해야 할 말씀 첫 번째는 비판을 하면 나도 비판 받는 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아야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형제의 작은 결점은 잘 보아도 자신의 큰 결점을 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렇다면 비판을 할 때 기억해야 세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3) 자신의 큰 결점을 두고 형제의 작은 결점을 비판하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임을 세 번째로 알아야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마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외식하는 자여! 예수님은 자신의 큰 결점을 두고 이웃의 작은 결점을 비판하는 행위를 외식 하는자 즉 위선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위선자 휘포크라이트! 여기 위선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가면을 쓴 배우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고대 그리이스 시대의 배우는 한 사람이 가면을 쓰고 여러 가지 성격이 다른 여러 인물 흉내를 내었습니다. 마치 다중 인격자과 같은 역할을 배우가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남을 비판 할 때 가면을 쓰고 자신을 숨기는 위선자가 되기 쉽다고 경고하십니다. 대부분 남을 비판 할 때 자신은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하지만 쓰고 있는 가면을 벗겨 보면 비판하는 자신이 비판받은 이웃 보다 더 냄새가 나고 더 구역질이 나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비판 잘하는 사람일수록 위선자일 수가 많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은혜로 귀신 들렸다가 고침 받은 마리아가 주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자신이 수년 동안 모은 귀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위에 부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런 풍속은 귀한 손님에게만 하는 최대의 예우였습니다. 여기 옥합이란 귀한 향수를 담은 작은 단지입니다. 예수님 당시 처녀들이 결혼 지찬 금으로 가져가기 위해 수년간 조금씩 모아 함에 넣어 두었던 값진 보물로 취급되었던 향수였습니다. 그 마리아의 모습을 본 가롯 유다가 버럭 화를 내면서 왜 그 귀한 옥합을 쓸데없이 허비하느냐 그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면 많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 할 수도 있을 것인데 너는 참 어리석은 짓을 했다면 마리아를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아낌없이 자신의 옥합을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시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아름다운 행위도 전파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그 마리아의 선한 행위를 어리석은 행위하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정말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예수님 일행의 회계 맡은 자로서 실상은 돈을 좋아하는 탐심이 가득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 버린 배신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가난한자를 도운 적이 없는 자였습니다. 결국 그는 죄책감으로 자살로  끝낸 참으로 불의한 인생이었습니다. 비판하는 자가 비판 받는 자 보다 사실 더 문제가 많은 경우가 허다 한 것입니다. 자신의 숨은 어두움을 가리기 위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남을 더 비판하는 것이 부패한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나를 보시고 예수님은 “너는 가면을 쓴 위선자”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 하십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비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판을 하데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을 쫓아서 해보자는 것입니다. 비판을 할 때 기억해야할 첫 번째 말씀은 비판을 하면 나도 비판 받는 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아야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웃의 작은 결점은 잘 보아도 자신의 큰 결점을 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세 번째는 자신의 큰 결점을 두고 이웃의 작은 결점을 비판하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임을 알아야한다. 그렇다면 비판을 할 때 기억해야 마지막 말씀은 무엇입니까?



4)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의 큰 결점을 고치는 일에 전념해야합니다.  “마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리스도인은 비판하고 싶은 형제를 발견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와는 전혀 달라야합니다. 불신자는 철저히 가면을 쓰고 남을 비판합니다. 양심이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거짓이 다 폭로되기 전까지 철저히 자신을 위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지옥 갈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신 공로로 힘입어 죄 용서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를 구원하신 주님처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이웃을 대해야합니다. 주님의 마음이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웃에 대해 항상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마음, 긍휼의 마음,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용서의 주님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다른 이웃을 볼 때 결점을 보려고 하지 마세요. 이웃의 결점이 자꾸 보이면 내 심령 속에 주님의 은혜가 부족한 증거라고 진단하면 옳습니다. 그렇다면 속히 엎드리십시오. 주님! 내 심령 속에 주님의 은혜가 부족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부어 주십시오. 주님의 은혜란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용서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충만하면 이웃의 결점이 희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용서란 무엇일까요? 용서란 이웃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잠 17:9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용서함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허물을 보려고 하지 마시고 대신 허물을 덮어 주십시오. 그리고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잠 17:9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주님은 우리의 죄를 잊어 버렸습니다.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웃의 잘못을 거듭 말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은 자입니다. 이간질하는 자라고 잠언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다른 이웃의 결점에 대해서는 용서의 태도를 가지면서 그러나 동시에 자기 자신의 결점을 고치는데 우선순위를 두어야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먼저 비판하라는 말입니다. 물론 나를 비판하라는 말은 나를 학대하라 자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동시에 나의 힘으로 나를 변화 시킬 수 있다는 말을 더더구나 아닙니다. 나를 변화 시켜 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부족한 점을 십자가 앞에 정직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가지고 나아가서 주님께 회개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이 바로 나를 비판하는 행동입니다. 주님! 나의 허물을 회갸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성령의 불로 십자가의 거룩하신 보혈의 피로 나를 변화 시켜 주옵소서! 나를 변화 시켜 달라고 몸부림을 쳐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형제를 고치겠다고 땀 흘리지 마시고 자기 자신을 고치는데 투쟁해야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고치는 것은 그 인생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몫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고칠 권세도 능력도  없음을 아십니까? 모든 갈등의 원인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 피조물이요 결점 투성인 인간 주제에 남을 고쳐 보겠다고 혈기를 부리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이웃을 고치겠다고 분기탱천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피조물 주제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인간이 원수를 갚을 권세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도리어 주님의 용서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원수를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나에게 악하게 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더 잘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옆의 다른 형제자매의 결점을 쳐다보지 말고 자기 자신의 결점을 먼저 쳐다보라는 말입니다. 변화 되어야 할 사람은 옆의 형제자매, 아내, 남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고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교회에서는 옆의 형제가 죄 짓는 일이 아니라면 전보 대를 가지고 이수시게를 하든 말든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변화에 우선순위를 두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변하면 형제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뜨입니다. 내가 변하면 나를 더 알게 됩니다. 내가 변하는 만큼 남을 치유하는 치유 자가 됩니다. 비판은 남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일입니다. 비판은 가장 쉬운 일입니다. 마귀가 전공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을 죽이려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려 오셨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치유하려 오셨습니다. 내 자신이 주의 은혜로 치유 받고 변화 되면 되는 만큼 우리는 이 땅에서 치유 자 되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치유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그리스도인은 비판자가 아니라 치유 자 살리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옆 형제자매에게는 항상 용서의 눈을 가지시고 자기 자신에게는 회개와 비판의 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비판하십시오. 나 자신을 먼저 주님 앞으로 들고 가서 회개하여 고침을 받으십시오. 나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자기 자신이 먼저 주님의 은혜로 변화 되어야합니다. 내가 변화면 이웃도 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를 만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