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의 정체성
1. 본문: 눅 18:9-14
2. 명제: 교만은 회개 1호의 죄악입니다.
3. 제목: 교만의 정체성
현대인들은 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라는 말 대신 정서 장애, 환경에 대한 부적응, 습관적인 집착증들이라는 말로 도피하려고합니다. 어느 집에 독이든 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특별한 경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관하고 있었는데 독약이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설탕이라고 써 붙어 놓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독약을 독약이라고 써놓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그 아래에 위험이라고 표시도 써 붙여 놓아야 합니다. 독약은 독약이라고 말하고 죄는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영적 각성 영적 부흥을 원한다면 우리 한 사람이 자기 죄에 대해 정직하고 거기에 진지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일곱 가지 중요한 죄악이라는 리스트가 있습니다. AD 4세기 경 그레고리 대제가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일곱 가지 죄악은 첫째가 교만, 둘째가 질투, 셋째가 분노, 넷째가 탐심, 다섯 번째가 탐식, 여섯 번째가 게으름, 일곱 번째가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 일곱 가지를 치명적인 죄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통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교만의 죄를 폭로하고 계십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이 죄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교만이 질투를 낳고 교만이 분노를 낳고 교만이 탐심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교만이라는 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1. 교만은 자기중심적인 죄악입니다.
본문 9절에 “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이 비유를 말씀하신 대상은 “ 자신은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 “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 믿고 자기를 존중하며 소중히 여긴다는 그 자체만으로는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존감이 필요합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정신 건강에 필수적입니다. 건강한 자존감과 병적인 자만과는 구별됩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 나머지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음모와 술수를 쓴다면 그것은 이미 자존감의 영역을 벗어난 범죄의 영역에 속합니다. 교만은 일종의 자기 숭배입니다. 누군가는 교만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할지는 모르나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숭배의 경향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병입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의 하와를 찾아와 어떤 유혹을 던졌습니까? 창 3:5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 네가 절대자가 된다는 유혹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절대화시킬 때 혹은 자기주장을 절대화시킬 때 교만이라는 질병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교만은 자기중심성에서 비롯되는 병입니다. 교만이라는 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2. 교만이란 이웃과 나 사이에 벽을 쌓고 담을 쌓는 죄악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 하나이다 ” 바리새인이 기도하던 자리는 세리와는 같이 기도하기가 싫어서 아예 자리를 따로 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두 번씩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 같지 아니하다 ’ ‘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세리란 유대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정부를 대신해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하는 유대인들입니다. 당연히 이들은 부정을 많이 저질렀고 일반 유대인들의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로마에 아부하는 사람 백성들의 피를 빨아 머고 사는 인간답지 않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세리를 멸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우월감 아니 교만의 뿌리를 보셨습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저들의 삶이 비록 못된 일을 하는 것이 사실이고 우리 민족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다. 저 사람 안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인격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그들에게 어떻게 대했을까요? 우리 모두가 타락했고 그 타락한 성품을 가진 나도 저 세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바리새인은 세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갔을까요? 우리가 교제할 때 특별한 사람끼리 파벌을 만들기 시작할 때 그 배후에는 우월감 교만의 뿌리가 도사리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웃을 지나치게 공격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남의 티를 보면서 자신의 들보를 보니 못하는 것 이것도 교만의 한 증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가 하는 일은 로맨서요 남이하는 일은 불륜이라고 비판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병은 교만이라는 병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정에 있으면 그 가정 전체가 고통을 당합니다. 이런 사람이 공동체에 있으면 그 공동체가 큰 고통을 당합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담을 쌓고 사람을 나눕니다. 반면 겸손한 사람은 다리를 놓습니다. 예수님은 다리를 놓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녀이요 제자들입니다.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어야 마탕한 것입니다. 나 때문에 가정이 화목한지 나 때문에 공동체가 화목한지 아니면 나 때문에 공동체가 몸 쌀을 앓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공동체는 교만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이웃과 나 사이에 단절의 벽을 쌓는 죄악입니다. 교만이라는 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3.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을 속이려는 죄악입니다.
11-12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이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며,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며, 나는 이 사람과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 자랑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가? 내 업적이 얼마나 화려한가를 하나님 앞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기도의 주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 주시고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당신의 뜻을 따라 살게 해 주세요. 이처럼 기도의 주어는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기도의 주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내밀한 정체성을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로 내어 놓고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그러나 교만한 기도는 이 변화를 거부합니다. 이 교만이 이 변화를 거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붙들고 있습니다. 또 오히려 자신을 포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만의 모습입니다. 어떤 자매가 결혼할 때 남편 될 사람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잠자기 전에 항상 기도하고 자자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술을 잔뜩 먹고 취해 돌아왔습니다.. 그날도 아내가 기도하자고 그러자 “ 오늘은 당신 혼자 기도해 ”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도 아내가 당신 약속했잖아요? 같이 기도해요. 하면서 남편을 잡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오늘 밤은 우리 남편이 이렇게 술에 만취되어 돌아왔습니다. 우리 남편을 용서해 주세요. 그랬더니 갑자기 남편이 여보 하나님한테 술 취했다고 하지 말고 아프다고 그래 하더랍니다. 교만은 자기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범죄를 인정할 수 없다면 이 사람이 치료될 가능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교만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감추고 자기를 속이는 죄악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4.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교만한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바로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구세주가 예수님이 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사람의 구원의 근거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 나는 이만큼 잘하고 있으니 예수님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죄를 보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자기 실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첫 번째 복을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하나님 나라가 내 것이 되려면 먼저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마음이 부요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아니고는 저는 살 수 없습니다. 제 부족함과 연약함과 죄와 병든 모습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의롭다고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예수를 믿는 순간 오히려 그가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믿은 성도들에게도 교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교만 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줄 여지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 3:17“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 온천이 유명한 지역에 살고 있었던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실제로 부자였고 마음도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았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실 때 그들은 결코 부유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련하고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아픔과 병듦과 부끄러움과 누추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는 것이 교만이 낳은 마지막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그 사람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14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심지어 대적하십니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교만은 마귀의 본질입니다. 본래 마귀는 천사 장 루시퍼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 마귀가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도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 사탄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는 그 파멸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함께 파멸할 동료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 우리 안에 계속 교만을 충동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교만의 죄를 극복해 갈 수 있을까요?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리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세리의 태도를 배워야합니다. 세리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세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들입니다. 또한 겸손한 사람은 이웃의 도움도 받아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리처럼 ”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 “라는 세리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여기 불쌍히 여기다 라는 말의 헬라 원어는 속죄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릴 때 법궤 앞에 서서 그 앞에 희생 제물을 죽여 피를 뿌리는데 그 법궤 앞에는 판이 하나 붙어있습니다. 그 판을 시은소 혹은 속죄 소라 부릅니다. 그곳에 피를 뿌리고 기도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고 기도가 응답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 피를 보시고 저를 용서해 주시며 저의 기도를 받아 주옵소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당장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피를 붙들고 서야 합니다.. 우리가 주 앞에 설 수 있게 하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피를 붙잡고 주 앞에 나와서 “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하고 그 예수님의 피 앞에 우리의 존재를 적시는 순간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주 앞에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겸손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이 사람 위에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 임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심령이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만을 무서워하며 교만을 회개 1호 죄악임을 항상 기억하고 경계하기에 열심을 품는 사람입니다. 교만은 회개 1호 죄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