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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에서 해방되는 길(수정본)

wordlove 2021. 2. 5. 07:46

1. 본문: 삼상 18; 6-16

2. 명제: 질투는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가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3. 제목: 질투에서 해방되는 길

 

수년 전에 서울 신정동에서 일어난 묻지 마 살인 용의자가 검거되었습니다. 그 용의자는 강도 강간 사건으로 14년 복역 후 출소 했다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맞은편 다가구 주택 옥탑 방에서 나는 웃음소리를 듣고서는 나는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는데 남의 행복은 싫었다며 그 집에 들어가 그 집의 안주인 장모 여인을 가지고 있던 망치로 내려쳤고 안방에서 뛰쳐나온 남편을 칼로 찔려 죽였다고 합니다. 범행 동기가 너무 황당하지 않습니까? 나는 불행한데 남의 행복이 싫었다는 것입니다. 사촌이 논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심보와 비슷합니다. 이것이 질투라는 것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질투라는 것은 이처럼 가장 강력한 감정이 동반된 범죄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불레셋의 장사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 개선 퍼레이드에 여인들이 나와서 환영을 했습니다.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7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비극의 시작입니다. 지금 백성들의 왕은 사울인데 왕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칭찬한 것입니다. 8절에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이 말은 다윗이 앞으로 왕의 보좌를 노리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사울의 일생이 변합니다. 다윗을 질투해서 눈이 먼 것 같은 질곡의 긴 역사가 시작됩니다.. 저는 오늘 이 사울의 생애를 통해서 질투의 정체를 바로 알려 질투에서 해방받는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서 이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질투는 어떤 죄일까요?

 

1. 질투는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제한 시켜 버리는 죄악입니다.

사람이 질투에 사로잡히면 더 이상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장점을 계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본래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본래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9: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사울은 미남이었고 또 키도 훤칠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9장을 읽어 보면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려 그 나귀를 찾다가 선견자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울은 그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 사울은 아주 예의가 바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히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뜻을 보이자 사울은 삼상 9:21“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아주 겸손하게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어 1년에도 몇 번씩이나 전쟁을 치르게 되자 그 전쟁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성을 발휘한 이스라엘의 일대 왕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부하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변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아주 귀한일을 할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이 쇠락해 갔습니다. 질투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아마데우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애나 궁중 악사였던 안토니아 살리에리는 훌륭한 음악가였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한 몸으로 다 받았습니다. 신앙심도 아주 깊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기의 재주를 가진 모차르트를 만나게 됩니다. 순간 그 마음속에는 강한 질투심의 감정이 솟아올랐고 그의 일생이 변절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가 질투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음악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질투가 이 사람을 망쳤습니다. 이처럼 질투는 우리가 가진 가능성 그 선한 가능성을 제한시키는 무서운 죄입니다. 질투는 어떤 죄일까요?

 

2. 질투는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다 빼앗아 버리는 죄악입니다.

질투는 아주 강력한 죄악입니다. 질투하는 대상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가 다 집중됩니다.. 그리고 주야로 질투하는 대상만 생각납니다. 주야로 그 사람만 묵상합니다. 밤에 자다가 깨서 생각날 정도입니다. 질투가 가져오는 시기, 미움, 증오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삶이 마비됩니다. 그 전형적인 모델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9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원문대로 표하면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는 눈으로 주목 하였더라입니다. 질투하는 눈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는 눈으로 계속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계속해서 사울은 다윗을 어떻게 처리할까?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거기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 후 사울 왕의 생애는 오로지 다윗에 대한 질투의 생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질투하는 생애 그러니 왕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었겠습니까? 삼상 24장을 보면 이스라엘 나라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사울 왕에게 보고를 합니다. 삼상 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은 지금 불레셋과 전쟁 중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디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전쟁을 하다 말고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니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질투라는 감정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백설 공주 이야기에 계모는 아침에 일어나면 요술 거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러면 요술 거울은 어김없이 대답합니다. 왕비님! 왕비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우아하고 가장 예쁩니다. 그러면 왕비는 그렇지 맞았어하고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왕비의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백설 공주가 자라 가며 여성으로서 성숙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비가 요술 거울을 향해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런데 요술 거울이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왕비님! 왕비님은 여전히 예쁘고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왕비님보다 더 예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백설 공주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왕비는 무서운 질투심이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백성 공주를 없애기 위해서 너무나도 추악한 짓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왕비는 허물어 져갑니다. 질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 정상적인 삶 생활을 다 빼앗아 갑니다. 그렇게 무서운 죄악입니다. 다윗을 질투한 사울 왕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울왕은 점점 능력을 잃어갔습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지혜 없는 포악한 왕으로 전락합니다. 그는 마침내 전쟁에서 패배한 후 수치심과 모멸감을 견지지 못하고 병사의 칼에 엎드러져 스스로 죽고 마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살리에르의 최후는 어떻습니까? 그는 미쳐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모차르트에게 주신 그런 재능을 왜 저에게는 주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말입니다. 질투는 어떤 죄일까요?

 

3. 질투의 배후에는 악령이 있습니다.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탄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0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 되는데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악신이 사울에게 내려서 다윗을 질투케 만들었고 오로지 다윗을 죽이기 위한 비참한 인생을 살게 한 것입니다. 질투는 인간 사회에서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 질투의 배후에는 질투의 영이 있고 악령이 있다는 것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신약에도 변함없이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3:14-15“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 지니라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데도 꾀가 있어야 합니다. 남을 끌어 내리고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이 이를 위해 얼마나 꾀를 냅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시기하는 지혜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적이요 마귀적인 지혜입니다. 질투는 악한 영의입니다. 이 악한 영은 궁극적으로 질투하는 상대방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질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파괴시켜서 내 속에 질투를 충동질합니다. 바로 내안에 부패성을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을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각자에게 원하시는 모습대로만 걸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질투는 자꾸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비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독특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나는 다른 누가 아니고 그냥 나 자신입니다. 1등만 위대한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2등도 쓰시고 꼴등도 쓰십니다. 미련한 자를 들어서 지혜롭게 쓰셔서 지혜로운 자를 놀랍게 만드십니다. 최고가 되어야 가장 위대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미국의 흑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는 틀림없이 마르터 루터 킹 목사일 것입니다. 그는 흑인들의 자유와 권익신장에 크게 기여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루터 킹 외에 다른 인물을 꼽으라면 말콤 엑스라는 지도자일 것입니다. 말콤 액스는 백인들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마음속에 백인들을 미워하면서도 나는 백인이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피부를 희게 하기 위해 크림으로 계속 피부를 닦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점점 더 비참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내 속에는 증오만 쌓여 갈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빛이 찾아왔습니다. 극적으로 나는 백인이 될 수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저는 그 순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백인이 되지 말자 나는 흑인이 되자. 나는 그 때 흑인이 나의 모습 그대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람이 흑인의 영웅으로 부상하면서 흑인 사회에 유명한 모토가 생겼습니다. black is beautiful. 즉 검은 색은 아름답다. 희색이 아름다운 것처럼 검은 색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의 아름다움과 개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가지고 그것을 부지런히 개발하면서 주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걸어가면 됩니다. 다른 사람은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럴 때 비로소 질투의 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4. 어떻게 질투의 영을 극복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이웃을 칭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질투의 반대 개념을 칭찬 혹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질투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마시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칭찬하고 축복하자는 것입니다. 살리에르가 그렇게도 모질게 모차르트를 질투한 반면 모차르트는 이 질투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어느 날 아주 탁월한 음악인을 만났습니다. 그 자신의 후배인 베토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을 보라 그는 세계 음악사에서 남을 놀라운 인물이 될 것이라고 베토벤을 세워 주었습니다. 얼마나 멋진 태도입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없을까요? 본문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과 함께 돌아올 때 위대한 장군 만세 다윗은 만만을 죽였고 우리 사울은 천천을 죽였다고 소리치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도 질투하지 않았다면 사울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사울 왕이 옳소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다윗과 같은 지도자를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다윗은 우리의 미래요 다윗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하면서 군중들 가운데서 다윗의 손을 들었더라면 국민들은 어떤 반응은 보였을까요? 지금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거의 다윗이라고 합니다. 사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울 왕이 그 당시에 다윗을 축복했더라면 건국의 시조요 다윗이라는 성군을 배출한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는 축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12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하나님이 사울을 떠나셨다는 이 말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하나님을 질투하는 사울을 버렸습니다. 그러데 대조적으로' “ 하나님이 사울을 떠났고 다윗과 함께 하셨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울과는 달리 다윗은 사울을 왕으로 깍듯이 모셨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인생을 통해서 감동받는 것은 다윗이 일관되게 자신의 태도를 잃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대적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사울을 버리시고 축복한 다윗을 인도하십니다. 14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다윗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지혜롭게 행했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이와 같습니다. 다윗은 사실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핍박을 받으셨고 또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시면서도 자기를 원망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수많은 인생들로부터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제자 되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우리 삶의 모습도 예수님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질투를 영을 다스리지 못하고 패망의 길을 간 사울의 삶을 선택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좀더 핍박을 받고 좀 더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끝까지 삶의 의무와 소명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살을 사시겠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더 지혜로워지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취를 남긴 다윗과 같은 인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질투는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가는 무서운 죄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