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가하는 죄의식(수정본)
1. 본문: 롬 8:15
2. 명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양자의 영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된 경험들이다.
3. 제목: 증가하는 죄의식
사도는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에서 성령께서 ‘다시’ 종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양자의 영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종의 영은 양자의 영에 앞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시라는 말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의 입장에서 가치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분명한 표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제 일차적인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아들 됨을 지시하는 하나의 암시입니다. 어떤 불신자가 영화를 보고 또는 세상의 어떤 사건을 보고 깜짝 놀랄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은 아닙니다. 모든 두려움이 ‘ 두려워하는 종의 영 ’은 아닙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양자의 영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된 경험들입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무엇입니까?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먼저 진정한 죄 의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내적 부패를 의식함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진정으로 알았던 사람들만이 사실상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았던 사람이며 그들만이 율법의 영성을 깨닫고 따라올 하나님의 심판을 알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안일과 행복을 느끼게 하여 육신적 평안에 우리를 빠뜨리게 하려고 합니다. 육신적 평안은 더 이상 구원에 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들을 시험해봐야 합니다. 모든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주 사람들을 설득시켜 자신들만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확신을 하게끔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주신 양자의 영과 마귀의 기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려워하는 종의 영은 언제나 양자의 영에 앞서서 옵니다. 위대한 청교도인인 죤 프리스톤은 “ 만일 종의 영을 가진 적이 없으면 분명히 양자의 영을 받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사도는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시 종의 영을 받지 않는다. 한번 받은 적이 있지만 이제는 양자의 영을 받는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 종의 영을 받아야 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율법이 아니하고서는 그리스도에게로 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종의 영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이 무엇인지 양심의 가책에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어떻게 고 난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에 의해서 받은 구원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째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오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까? 그가 이 종의 영 두려움의 영 불안의 영을 알았다면 왜 그리스도에게 오지 않겠습니까? 사도는 다시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먼저 종의 영을 받고 그다음 양자의 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종의 영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그 깊이에 있어서 다양합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 이것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느끼는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누구나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이 두려움의 영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반대하는 주장은 물론 그들도 그 주장을 보편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그들도 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자란 사람들 즉 무의식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큰 죄를 짓지 않았고 또 포악한 죄인도 아니였습니다.. 이들에게까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회심할 때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심은 반드시 갑작스럽고 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 ’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대답은 이 두려움의 종의 영이 있고 없고 가 죄를 지은 양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심각한 오류요 위험한 기만입니다. 눅 7:36-50절“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 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눅 7: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7: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 이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한 큰 빛을 던져줍니다. 주님께서 “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거짓 해석은 이러합니다. 이 여인은 매우 악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시몬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장하기를 그 여자가 그만큼 많은 죄를 짓고 그만큼 많은 용서를 받았으니 그 여자는 더 사랑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죄를 짓는 것이 좋다는 논리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많이 지을수록 그 만큼 용서를 더 많이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많이 받으며 받을수록 더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어긋납니다. 주님의 교훈은 우리의 지은 죄의 양이 아니라 우리의 죄 됨을 깨닫는 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주님은 많이 사랑한 사람은 죄의 정도를 더 깊이 깨닫고 또 그 용서의 정도를 아울러 더 깊이 깨닫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뿐만 아니라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던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여성이 술 주정뱅이였던 어떤 사람이 극적으로 회심하여 기쁨으로 사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저런 기쁨을 가져오는 놀라운 회심을 가질 수 있기 위해 자신도 한번 큰 술주정뱅이로 살아봤으며 하는 바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속임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결코 죄에 대한 촉진제가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를 짓자 라고 인도하지 않습니다. 롬 6장에서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훈은 사도의 가르침과 정반대입니다.
두 번째 대답은 신앙주의에 대한 우려입니다. 신앙주의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습니다. 당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단순히 지적이고 관념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심한 병중에 믿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갑자기 자신이 지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고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만하면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책감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것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의 특징과는 일치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후 13: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 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 자신을 시험해보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성경이 말하는 시험에 설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심을 얻기 위해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불안해하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확신하기 위해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아닌 ‘ 안일한 신앙주의 ’보다 우리에게 위험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세 번째 대답은 진리의 영이요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는 언제나 죄의식과 죄책감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 일을 하도록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밝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 주시며 동시에 율법 속에 언제나 영성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은 우리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고백하게 합니다. “ 나는 불의하나 주는 의롭고 거룩해 나 죄와 더러움 가득 찼으나 주님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 성령께서는 언제나 이 일을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임을 밝혀 보여줍니다. 어째서 우리는 구세주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거룩 때문이요 그의 율법에 의해서 밝혀진 거룩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죄와 불완전함 때문입니다.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실 때 “ 종의 영 ”과 “ 두려움의 영 ”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과 엄위와 의와 공의에 대한 어떤 인상도 주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는 예외 없이 이 종과 두려움의 의식을 불러일으킵니다.
네 번째 대답은 모든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클수록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그들의 이해가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죄 됨과 무가치에 대한 이해가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고백은 그들이 은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랄수록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분량의 깊이를 알게 된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하나님께 나아갈수록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의지해야 함을 더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빛이시라 그에게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기독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과의 교제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할수록 그의 거룩을 더 많이 보게 되고 그만큼 자신의 무가치와 자신의 죄스러움을 더욱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밤이 지나면 낮이 오는 것과 같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질수록 하나님의 거룩함을 알게 되며 자신의 죄인 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자랄수록 자신의 죄 됨과 무가치성을 더욱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자신들의 죄인 됨을 더 깊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기 속에 있는 죄의 깊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해 더 깊이 깨닫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부흥의 특징입니다. 이사야 6장의 이사야의 경험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선지자였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환상을 통해서 그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렇게 간증합니다. 사 6:5“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 무엇이 이사야로 하여금 자신이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했을까요? 그가 어떤 특별한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죄의 수량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오는 것입니다.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라났던 사람들에게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적용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속임수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거룩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 죄의식과 종의 의식과 무능함과 나약함의 의식을 일으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울부짖게 만드는 죄의 권능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심은 언제나 죄의 무서움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되며 자신은 죄에 대한 노예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회심에는 그 죄에서 구원받고 싶은 욕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자신의 구원이 부족하다 라고 느끼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부족하다고 느끼는 염려는 그 자체로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 대한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생치 못한 사람은 결코 그런 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고전 2: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사람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시험해 봐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임무입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요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는 예외 없이 우리 속의 이러한 자신의 무가치성에 대한 의식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의 무가치 성과 자신에 대한 절망감을 알지 못하며 우리 속에 죄에 대한 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졌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불러일으킵니다. 주님을 본 요한은 계 1: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고 말합니다. 이 두려움의 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여러분이 자란 환경이 아니요 여러분이 지은 죄의 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관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죄의식과 용서에 대한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영적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여러분 속에 있는 죄의 깊이에 대해 아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특별히 십자가 위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으로서만이 구원의 문제가 해결될 것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성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