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흐름의 원인들(수정본)
1. 본문: 롬 12:11
2. 명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은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3. 제목: 게으름의 원인들
거듭 말하지만 롬 12:1-2절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기반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기들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이 교리에 대한 적용의 말씀들입니다. 12장 이하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은 1-2절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 그러므로’와 ‘ 하나님의 자비 ’라는 말씀에 비추어서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결코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11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소명에 대한 태도 즉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 어떤 정신으로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예수 믿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지체로서 어떻게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까요?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항상 살아있어야 합니다. 항상 활력이 넘쳐야 합니다. 단순히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행동주의자가 되어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게으름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일을 건성으로 하는 것이요. 힘을 들어서 열심히 하는 것의 반대입니다. 게으름을 가지는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 모두는 기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에는 다양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때로 게으름의 주요한 원인이 기질적이고 체질적인 경우도 있을 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활력이 넘치는 능동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느리거나 무기력해 보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담즙 질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어 성미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그들도 그러한 성향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아주 광범위합니다. 마귀의 최고의 관심은 하나님의 일을 망가뜨리거나 훼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몸 안의 소리로 공격할 수 있고 정신과 마음속에서도 우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침체시킬 수도 있고 우리로 하여금 게으른 느낌을 가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마귀가 나태하고 게으른 그리스도들을 보면 마귀는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마귀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게으름과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거나 침울한 정신을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 나는 오늘 마무 것도 할 수 없다.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내일이면 나아지겠지. 그러나 내일도 느낌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계속 그런 식으로 전행됩니다. 결과적으로 항상 그러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이것이 게으름입니다. 좌절감은 게으름을 산출합니다. 딤 후 1장에 예가 나옵니다. 아마 디모데는 체질적으로 기질적으로 쉽게 침체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매우 낙담하게 되었음 알고 있었습니다. 낙담하게 되는 사람은 쉽게 게으름에 빠지고 일에 온전하게 쏟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낙담과 시련과 환난이 게으름을 낳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울의 답은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이 한 구절에 세 가지 답이 있습니다.
첫째는 권면입니다. 사도는 이런 방식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제자 디모데를 분발시킵니다. 딤후 2:8 “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이런 권면들은 디모데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우리의 나태함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 너 자신을 깨우치라 “ 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그렇게 말할 때 본성적으로 그 사람 속에 없는 어떤 것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본성이나 기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본성적으로 약간 능동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하여금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도록 애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을 일깨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을 질책하고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자신에게 해야 합니다. 태생이 힘이 넘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자신을 깨우쳐서 자신답게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해왔던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충분한 운동을 하지 않으면 금방 힘이 빠지게 되고 그것은 게으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고 또 성경 읽을 맛도 없고 기도할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 자 물론 나는 오늘은 느낌이 좋지 않으니 그것을 할 수 없다 “라고 말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나는 자신을 일깨워야 한다. 내가 이런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은 내가 너무 게을렀기 때문이다. 나는 충분히 운동을 하지 않아서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 논증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우리 몸의 경우와 같이 우리의 정신과 인격의 어느 부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심령도 연습을 하고 사용할 때 최선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사용하지 않으면 손놀림이 둔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수록 손을 놀리기가 더 싫어집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큰 질병인 것입니다. TV는 사람의 이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좌절시킵니다. TV는 바보상자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몰아갑니다. 이런 TV에 익숙하다 보면 항상 재미있는 것만 듣고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설교 말씀이 재미가 없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지성의 나태합니다. 몸의 여러 기관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기관을 무력하게 됩니다. 많은 질병들은 무기력함의 결과들입니다. 영적인 영역에도 이 모든 것을 적용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 이와 같은 식으로 더 나아간다면 영적인 질병에 걸리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병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한 몸의 지체임을 기억하십시오. “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한 부분이 잘못되면 다른 부분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태하고 게으르고 무기력한 체 있다면 여러분이 이웃에 대해서 영향을 미쳐서 급기야 전체가 그러한 상태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며 “ 둔한 게으름과 우울증이여 떠나가라 ”라고 말해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자신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첫 번째 의무에 해당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는 “열심을 품고” 영적인 열심을 품으라고 합니다.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롬 8:9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사도는 “ 성령 안에서 열심을 품으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열심히란 뜻은 “ 물이 끓다”는 뜻입니다. 뜨거워진다. 흥분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디모데는 두려움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그런 심령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기력하고 나태하고 게으르고 소극적인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절제와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마음입니다. 성령은 능력과 힘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권능의 성령이십니다. 신약 성경은 성령에 관해 그런 차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활력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태어날 때 무기력하게 태어났습니다. 바울은 “ 본성적으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간에 너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속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 그 성령께서는 능력의 성령이시다. 그 성령께서는 힘의 성령이시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말할 충분한 권한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기질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 속에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은 힘의 능력이요 근원입니다. 성령에 충만하십시오. 성령 안에서 사는 여러분의 삶이 활력이 넘치는 것이 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울에 디모데에게 말한 것에 답이 있습니다. 딤후 1:6 “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 “ 그 불길에 부채질하라 ”너 속에 계신 성령의 불길을 향하여 부채를 부쳐 바람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은사를 받았다. 성령의 불길이 성령의 바람이 디모데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그 불길에 바람을 부치라는 것입니다. 그 불길을 계속 살아있게 하고 불길이 계속 일어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살 전 5:19에서 사도는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합니다. 성령을 불 또는 불의 세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이 해낼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증기기관차는 화력으로 움직입니다. 바울은 불을 사그라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불길에 바람을 부쳐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은사를 어떻게 하면 불일 듯하게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소극적인 면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재를 헤치는 것입니다. 재가 그냥 모여 있게 내버려 두면 그 불기가 약해지고 불길보다는 재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빨간 불기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그 사이에 있는 재를 뒤적이는 것입니다. 재를 치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나의 죄를 먼저 처리하는 생활입니다. 숨어 있는 죄를 회개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불을 산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불을 산출하려고 애를 쓸 때 혼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불은 거짓된 불입니다. 그 불은 육신적인 열심으로 나타나고 있기도 합니다. 사도는 그 정 반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 즉 성령은 거듭날 때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재 즉 죄를 회개하고 버림으로써 제거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다 공기를 공급해야 합니다. 일종의 바람을 부쳐 넣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그런 다음에 땔감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과거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십시오. 이런 것들이 여러분의 속에 성령의 불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과거 부흥의 시대 때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피곤과 나태함이 사라질 것입니다. 여기에다 내 안에 있는 은사를 상기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자연적인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생각하고 본성적인 능력의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생각합니다. 그 모든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뇨? 바울 사도는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능령의 영이시오. 힘의 영이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러한 일을 하리라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을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연약하고 게으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분발시켜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매우 분주하게 만들어 이러한 사실들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 네 속에 계신 성령을 잊었느냐? 성령의 불길 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영의 활력이 네 속에 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여러분이 열심을 품고 섬기게 되는 여러 방식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속에 계신 성령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이 열기를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부단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골 1장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것을 위해서 두 방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능력 그 능력을 따라 또는 그 능력의 열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길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활력을 입은 방법은 여러분 속에 성령께서 계신다는 것을 늘 상기하는 것이고. 여러분 자신 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능력의 영이시오, 사랑과 절제의 영이시오. 근신하는 마음을 주시는 영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본성의 기질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아볼로처럼 인간적인 열심히 충만한 사람도 육신적인 열심을 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과 자신의 본성적인 능력을 혼돈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육신의 열심은 성령의 절제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또 열심을 품은 채로 있는 탁월한 방식은 여러분 자신이 어떤 일에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입니다. 고후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느슨하고 게으르고 활력이 없고 성경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 기도할 것인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미할 것인지 의문이 들 때 여러분을 깨우치는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와 같이 느낄 때 여러분이 어떤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식을 하는 사람은 게으름과 나태함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일깨워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을 쌓은 일을 할 때 어떤 사람이 와서 “ 이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그러니 중단하고 성전에 숨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을 당할 것이다. ”이런 제안은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한 가지 답이 있을 뿐입니다. 느 6:11“6:11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성령이 여러분 속에 계심을 상기시키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일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머레이 맥췌인의 전기에 보면 그는 동료 사역자들을 향해 “ 형제여 우리는 서둘러야 하네 ”그는 시간이 짧다는 것을 늘 인식했습니다.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이 권면은 자신을 본성적인 차원에서 일깨우라고 말합니다. 서두를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