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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수정본)

wordlove 2021. 3. 26. 08:05

1. 본문: 12:19-20

2. 명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3. 제목: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

 

 

1. 갈등

그리스도인이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평강의 분위기를 만들라고 권면하면서 이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수심을 가지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싸우는 교회 분쟁하는 교회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바울의 호소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라는 말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먼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악을 행했습니다. 또한 손해를 끼쳤습니다. 즉각적인 반응은 그에게 앙갚음하고 복수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어린 아이들 속에서도 이것을 봅니다. 인간 사회 어떤 곳에서도 이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선한 것을 도모하라 ””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멈추어 서서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인들처럼 즉각적으로 본능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동물처럼 즉각 복수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극적인 면입니다. 여기까지만 와도 역사는 훨씬 달라졌을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그러나 사도는 이제 적극적으로 진노하심에 맡겨라 원수를 갚는 대신 다른 극단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갚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고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 맡기다는 의미는 자리를 내주라는 뜻입니다. 격노한 상태에서 스스로 앙갚음을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시간을 지체함으로써 진노하심에 자리를 내주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크게 흥분하고 열을 내는 자리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혈기를 내어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 스스로 원수 갚지 말고 오히려 그 일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 사람이 노를 퍼붓도록 가만 두어라는 뜻 즉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지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맡기라는 뜻은 숙고하다는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4:27 “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마귀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맡기다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진노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여러분이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 신 32:35“ 그들이 실족할 그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 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복수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갚으리라 는 돌려주다. 되갚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상수훈에서 마 7장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그것이 바로 되갚는다는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결단코 복수를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의 일은 아닌가요? 답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불의한 죄인들입니다. 우리의 판단은 부정확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에 적합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부족한 죄인입니다. 죄의 결과로 우리는 다 자기 중심적이 되었고 언제나 방어적이고 자신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발견하면 그것을 모두 나쁜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우리는 전체 입장을 못 봅니다. 우리는 참된 판단을 할 수 없는 편협한 재판관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심판을 우리 자신의 손으로 시행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재판장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재판장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진노는 항상 거룩합니다. 그 하나님의 판단은 항상 의롭습니다. 항상 공정합니다. 항상 균형을 잃지 않고 조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진노하심이라는 말이 여기서 하나님에 관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성냄은 혈기 적이고 언제나 조절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흥분하시거나 자신을 잃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판단은 항상 의롭고 공정하며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 때문에 여러분이 스스로 갚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옆으로 비껴나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의미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상처를 낸 사람이 잘못되기를 원해서는 결코 안 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그 사람의 문제를 맡겨놓은 것이 그 사람이 더 큰 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그 사람을 맡긴 것은 하나님께서만이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시도록 맡기라. 주님은 친히 이 원리를 따라 사셨습니다. 벧 전 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우리 주님께서는 판단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아니하셨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경우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 갚으심과 진노하심에 맡길 때 바른 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해야 합니다.

 

3. 전환

그러나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공의의 교리를 부인하는 데까지 이 권면을 밀고 나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가르침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것은 결코 심판이나 보응이나 진노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모든 영역에서 모든 일을 참아 내는 것이다. 심판과 진노라는 개념에 대해 관심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첫째로 개인적인 복수는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전제는 절대적입니다. 어떤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복수는 안 됩니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둘째는 우리는 그 원수가 개인적으로 해를 당하기를 소원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러분이 원수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원수가 잘못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내가 개인적으로 그 원수에게 악으로 되갚아 주는 복수를 하지 않고 마음으로도 그 원수가 해 받기를 결코 소원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진리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의와 공의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왕 노릇이 입증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은 옳은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다섯째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대적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시면 궁극적으로 자신의 옳으심을 나타내시며 그 통치와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 권위를 보여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모든 것을 자기 수하에 두고 권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통치하신다. “는 것을 아는 지식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함은 옳고 선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끝내 당신 자신의 옳으심을 드러내고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으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옳으심을 나타내시는 방식의 한 부분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심으로써 나타내실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 악을 갚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에 손해를 끼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릇된 개인적인 방식으로 악을 갚아 주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딤 후 4:14-16” 딤후 4: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딤후 4: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딤후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사도는 구리 장색 알렉산더와 자신이 시련을 만났을 때 사라져 버린 동료들에게 어떻게 대응했는지 보십시오. 사도는 시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동료들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홀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이런 일은 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날씨가 좋을 때만 친구죠. 그러나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다 달아나 버립니다. 사도는 그들을 어떻게 대응합니까?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을 심하게 해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들을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친히 그 자신이 원수 갚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께서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판단하시고 심판을 결정하실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버렸던 신자들은 연약한 신자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겁이 많은 연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사도는 나신을 해롭게 한 알렉산더와 달리 그들에게는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강조하는 점은 무엇입니까? 이 교리를 바르게 이해할 때 시편의 저주하는 시편 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시편에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69:22-23” 69:22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 서시시 69:23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시편 때문에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이해를 따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개인적인 앙갚음을 가지고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의 차원에서 이 시편을 쓰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슬펐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고 거만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근심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들로 하여금 이런 시편을 쓰게 한 것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 주님의 이름을 위한 열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소위 저주하는 시편 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지옥에서 악인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즐겁다고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앙갚음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관심을 그 거룩한 이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구약 성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약성경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4. 대단원

이 가르침은 평화주의자들에 대한 답입니다. 평화주의자들은 어떠한 처지 속에서도 항상 살인은 그릇되다. 어떤 전쟁도 죄를 짓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살인하지 말라 라는 십계명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경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다시 이런 경우는 개인적인 경우와 보편적인 경우의 차이를 알아야 풀리는 문제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계명은 국가와 사회를 향해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원수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일을 보여 줌으로써 그 점이 입증된 것입니다. 13장에 가면 더 알게 될 것입니다. 13;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여기 그는 세상의 권세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권세 자를 세우십니다. 성경은 행정 관리들이 칼을 가진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악을 제지하기 위해서 권세들에게 잠시 칼 즉 공권력을 맡긴 것입니다. 그래서 적이 나라를 침범하면 정부는 칼을 사용해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 왕이 마치 사냥개처럼 다윗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왔습니다. 이에 대해 다윗의 대응 방식을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다윗은 개인적인 복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원수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정반대로 그는 슬픔에 압도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복수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실천한 사람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바로 이 원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 13장에서 가리지 비유를 통해서도 이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 내버려 두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사람은 구약 성경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에 대한 위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수들과 하나님의 복음을 배척한 자들과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 한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원수 갚고 싶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심판을 믿지 못하고 복수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입니다. 개인적인 복수심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하심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한 이 성경적인 원리를 잘 이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