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천국을 침노하는 사람들

wordlove 2021. 3. 29. 05:57

1. 본문: 마태복음 11:12

2. 명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3. 제목: 천국을 침노하는 사람들

 

1. 갈등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형편을 들여다볼 때에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됐길래 자기들의 세상을 이렇게 파괴시킵니까? 왜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그토록 잔인합니까? 이것들이 우리들의 당면 과제이며 또한 성경 자체에서 제기하는 큰 질문들입니다. 성경은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한 책입니다. 우리 세상의 문제는 성경이 죄라고 부르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거역과 불순종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훌륭한 처방까지 제공해 줍니다. 그 처방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죄인들을 세상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처해 있는 혼란과 실패의 제반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온 세상이 복음을 믿지 않을까요? 이 주제가 곧 마태복음 11장의 본문이 다루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를 주저하였고 인간들을 혼란케 하는 것들이 세상에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어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때로부터 복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음에 전혀 관심이 없고 복음을 비웃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의 말씀이 처음에 선포된 때부터 이 메시지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의미에서 두 개의 역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사입니다. 본문은 매우 이상하고 가장 특이한 구절입니다. 본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12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에 세례 요한은 그의 두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라고?" 여쭈었습니다. 요한은 잠시 확신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의 증거를 주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을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요한이 아주 바보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 전혀 그렇지 않다! 세례 요한은 아주 탁월한 인물이다. 너희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고 광야로 몰려 갔을 때 무엇을 보았느냐? 그는 대중의 입맛을 맞추는 설교자가 아니고 불 같은 여호와의 선지자가 아니었느냐? 요한은 분명 왕궁에서 사는 자가 아니다. 그는 무거운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갇혀 있다. 요한은 궁중 인물도 아니고 인기에 연합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왕의 방탕한 삶을 면전에서 정죄하고 죄를 지적했기 때문에 옥살이를 한다. 요한은 선지자이다.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하도록 내 앞에 먼저 나타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전파한 사람이다. 그러나 요한이 그처럼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였고 나도 이런 사역을 해왔지만 너희들의 대다수는 전혀 복음에 관심도 없고 반응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로 몰려드는 자들이 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온 자들을 침노하는 자란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중생한 자들은 모두 격렬한 죄인들로 부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교회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인생의 진흙 바닥에서 들어온 자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은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고서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들도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이름을 많이 열거할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와 그의 형제 찰스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 두 사람은 난폭한 죄를 저지른 적이 없었으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해서 들어간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이렇게 옮길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메시지의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몸부림친다. 이 일의 긴급성을 그들이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긴급성에 대한 의미를 침노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불난 집에 갇힌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시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불난 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속히 집에서 빠져 나가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을 자각합니다. 그는 갑자기 격렬해지면서 자기 생명을 구하기 위한 탈출구를 맹렬히 찾습니다. 그는 더 이상 조용하게 가만히 앉아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불에 타 죽게 되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화급해지고 격렬한 몸짓으로 살길을 찾습니다. 그는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인식한 자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과격한 성격이 나타나고 황급하게 탈출을 시도합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긴급성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은 자들은 누구나 이러한 긴급성을 지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본문에서 지적하시는 것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긴급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절급한 상태를 깨달았더라면 침노하는 자처럼 사력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그럼 왜 그들이 자신들의 절박한 상황을 깨닫지 못하였을까요? 모든 죄중에서 이 죄가 오늘날 이 세대의 두드러진 죄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왜 이 세상 사람들이 그처럼 영광스럽고 훌륭한 복음의 메시지에 등을 돌리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 원인을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우리 속에서 냉담과 무관심을 일으킵니다. 성경에 의하면, 죄만큼 우리들을 마비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사실상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와 악의 결과인 우리 인간들의 냉담과 무관심을 흔들어 깨우는 일을 합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홍수 이전의 인간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노아라는 한 사람을 불러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 "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인간들의 죄가 차고 넘쳤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같은 메시지를 계속 전하였습니다. 그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말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겨우 8명만이 방주 속에 들어갔고, 나머지 인간들은 모두 익사당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죄에 대해서 감각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 전체에 차고 넘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메시지를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셨습니다. "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심판하시고 원수들이 여러분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도시는 파괴되고 여러분의 성전은 무너지며 여러분 자신들도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늦기 전에 구원을 받도록 권유하고 호소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죄에 대한 무감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지상에 계실 때에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매우 특이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꿀을 먹었습니다. 그는 오실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나머지 절대 다수는 냉담하였고 무관심했으며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21세기 현대인들의 두드러진 죄가 곧 이 무관심과 냉담의 죄가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의 무서운 죄악입니다. 현대인들은 지식이 있다는 자부심 때문에 하나님을 제쳐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현 세상을 위해서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물질적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사실상 다른 세상이 있는지에 대해서 확신이 없습니다. 죽음과 무덤 이후의 다른 세상에 대한 신앙은 무식한 고개 원시인들에게나 어울린다고 여깁니다. 사람들은 영적 영역과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는 문을 닫고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세상은 온갖 문제들에 눌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복음을 외치면서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지만 이상스럽게도 절대다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히려 선지자들을 핍박합니다. 우리들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문제들이 산적해도 대다수 사람들의 인생관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합니다. 이것은 죄로인해 생긴 무관심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3. 전환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침노하는 자로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례 요한의 설교입니다. 둘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입니다. 요한의 설교 방식은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 다가올 진노에서 피하시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단순히 가지를 쳐주는 정도가 아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오실 자에 대해 외쳤습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죄를 풀어놓고 용서를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문제들이 하나님과의 그릇된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요한의 설교는 어떤 이들을 침노하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메시지를 깨닫고 그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실체적인 근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그냥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 압니다. 이 세상에는 생명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내가 잊고 싶어하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죽을 인간으로 산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나는 잊기 위해서 별짓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네가 너의 마음을 많은 쾌락으로 채우면서 죽음의 사실은 잊으려 하여도 매 순간마다 죽음에 가까워진다. 죽음은 지금 오는 중이다. 성경은 죽음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죽을 때에 그냥 존재가 없어지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심판관이십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날마다 우리 자신들을 이렇게 상기시키면서 삽니까? 나는 죽어 가고 있다. 너는 죽음과 무덤을 넘어 심판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심판하실까요? 십계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선지자들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온 마음과 정신과 혼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례입니다. 우리 전체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에 직면하고 그 절박성을 깨닫는 자는 침노하는 자가 됩니다. 감사하게도 이 영광스런 침노를 위해 권유의 말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우리들이 지키지 못한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지닌 뜻입니다.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새 생명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의 삶을 제공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라는 일을 행하고 그분을 믿으면, 비록 이 세상이 당신을 괴롭혀도, 비록 전쟁과 기근이 닥쳐도, 비록 이 세상이 당신을 저버리고 당신을 죽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학살을 당하여도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죽음과 무덤을 넘어 영광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 메시지를 깨달은 자들은 침노하는 자들입니다. 절대 다수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 속으로 몰려드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 우리는 이 구원을 가져야 한다. 구원을 받기 전에는 결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침노하게 합니다. 여기에 회개의 부름이 있습니다. 여기에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침노하는 자입니까?

 

4. 대단원

어떤 이는 " 어떻게 내가 침노하는 사람의 하나인지를 알 수 있느냐? ” 고 질문합니다.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이 침노하는 자들에게는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자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침노하는 자들의 우선권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들은 그 이외의 문제는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믿는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을 첫째로 삼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우선 순위입니까? 당신의 영혼과 당신의 영원한 운명과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가 다른 어떤 문제보다 제일 먼저입니까? 침노하는 자들의 두 번째 특징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사력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화급한 처지를 깨닫고서 말합니다. 침노하는 자들의 세번째 특징은 그들이 받은 말씀과 지식과 권면을 아주 즐겁게 받고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불난 집에 갇혀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를 압니다. 그들에게는 비상 출구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때 이것이 비상구다! ”라고 말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침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들은 이 구원의 선물을 모두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만 있는 그대로 주께 나아갑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다. 침노하는 자들의 마지막 특징은 그들이 불로부터 탈출했다는 것을 확신할 때까지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불난 집 안에 있는 자는 빠져나가지 못하면 타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었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행하였습니다. 그것이 침노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럼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것을 아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우리들은 잠시 동안만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당신은 현재있는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니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를 희망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당신과 당신의 죄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이제 이 복음에 의존해서 하나님이 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들을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주님의 능력으로 살려고 한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이렇게 하면 당신은 당신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어떤 것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속으로 밀고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하셨습니까? 지금 당장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