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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의 삶

wordlove 2021. 4. 5. 05:52

1. 본문: 12:1-4

2. 명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불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영생의 길을 여셨습니다.

3. 제목: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

 

1. 갈등

성경의 관심은 관념적인 믿음이 아닌 실제 삶과 생활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성경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시고 우리의 실상을 보여 주시며 우리 문제의 원인을 보여 주시고 모든 불행의 유일한 치료책을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실제로 세상의 삶에 개입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입장이 확연하게 갈라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믿는 입장과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전체가 순전히 우연으로 생겨났다고 가정하는 현대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소위 과학적인 이 가르침은 인간의 비범한 자질과 성향 및 놀라운 재능이 순전히 우연으로 어쩌다가 생긴 것이라고 선언하며 우주에는 아무런 이유나 까닭이나 목적이나 의도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으며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고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존재 법칙에 맞게 살아야 충만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대적하신다는 거짓말을 믿고 자기 권리를 내세우며 하나님과 같아지려 하다가 타락했습니다. 그 후 죄 때문에 즉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살고자 했기 때문에 세상이 이지경이 된 것입니다. 물론 두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식을 얻으려면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질병과 역병도 생겨났습니다. 노아 때는 죄가 어찌나 만연했는지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하실 정도였습니다. 그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방주 안에 있던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세상은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이 있는 큰 성을 쌓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을 내세우는 이른바 문명을 이룩하려 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세웠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인간을 벌하셨습니다. 그가 내려와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시자 탑 짓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은 벌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2. 갈등 심화

12장에서 일어난 일은 여러 모로 볼 때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밝히신 에덴동산 복귀 계획의 일환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세 차례나 거듭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을 처음 창조했을 때 보여 주셨고, 타락 이후 홍수 때 보여 주셨으며, 홍수 이후에 또 한 번 보여주셨습니다. 세 차례나 거듭해서 인간을 대면하여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어겼을 때는 벌을 주시면서 인간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이 인간은 악한 길로 가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새롭고 특별한 행동을 취하십니다. 이전과는 아주 다르게 하나님은 자신을 위한 백성 자신에게 속한 백성을 만들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불러 그 일을 진행시키셨습니다. 이 메시지의 핵심은 마귀가 세상의 삶을 다스리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그 세상에 개입하여 다른 후손 다른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큰 계획과 목적을 펼쳐 나갈 구별된 백성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요점은 하나님이 바로 이런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인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자손이고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요컨대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이 했던 일을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중대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오늘날의 세상과 똑같은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사는 일은 아브라함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아브라함 때나 지금이나 하는 일의 정도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습니다. 아브라함 때 한 일이 무엇입니까? 먹고 마신 것입니다. 사랑하고 전쟁한 것입니다. 그들은 걸어 다니거나 낙타를 타고 다녔고 우리는 차나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겪는 어려움 모두 아브라함 때와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우리와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의 벗으로 고상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3. 전환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이방 땅에서 이방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여러 신을 섬기는 사람들 틈에서 그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이것이 첫 단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방법으로 부르십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식대로 살면서 이 정도면 흥미진진하고 멋진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사는게 예전 같은 재미나 흥분이 느끼 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가 다른 생각을 우리 속에 불어넣으십니다. 그 밖에 환경을 통해 부르시기도 하고 사고를 통해 부르시기도 하며 병을 통해 부르시기도 합니다. 좌절이나 사업상의 손해나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부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현대에는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성경이 있기 때문에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무의식에 말씀하시기도 하고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환경과 사건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환경이나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과 부르심을 들은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부르심을 듣는 이들도 많습니다. 또 설교를 듣거나 찬송을 하다가 부르심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걸음을 멈추게 되며 부르심을 듣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보십시오. 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무슨 뜻일까요?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방의 환경을 버리고 떠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성을 건설하고자 했던 창세기 11장 이야기와 바로 이어지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흥미로운 연관성을 살펴봅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힘으로 성을 건설하고 이른바 문명을 이룩하고자 했던 사람들 틈에서 성장했습니다. 11:4우리 이름을 내고 라는 말이 특히 강조하는 바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터를 잡고 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창대케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삶을 완전히 버리고 떠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은 바로 회개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회개로 부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문명의 실상이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삶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등을 돌려야 하며 그 삶에서 벗어나 정반대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과 존재 방식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이 영광을 받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신이 되었습니다. 우리 업적을 칭송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를 다루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이것이 토대 없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시적이고 덧없는 삶이라는 것 영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면서 모든 실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삶의 토대를 하나님께 두지 않은 탓에 모든 문제가 생겨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인간 스스로 신이 되었다는 것 그 신들이 서로 싸우면서 삶이 혼돈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 모든 죄를 고백합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인정합니다. 우리의 교만과 반역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내려와 이런 삶에서 떠나라 하시고 이런 삶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죽기까지 하셨는데도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며 그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깨워 주신 것 자신을 불러 깨우쳐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다음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어디로 가라고 하십니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우리는 여기에서 바벨탑 사건을 고찰하며 언급했던 사실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성경은 그 사건과 이 사건을 대조해서 보여 줍니다. 한편에는 자신들의 이름을 창대케 하려고 스스로 짓는 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제안이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제안하시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복과 번영을 주시겠다고 사람들이 탐했던 바로 그 성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성을 구하든지 하나님의 성을 구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스스로 창대해지려고 노력하느냐 아니면 오직 하나님만 우리를 입양하여 창대케 해 주실 수 있음을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안하시는 쪽은 후자입니다. 이에 대해 어느 날 오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8: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 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장차 있을 일을 내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뱀과 뱀의 후손에게 치명타를 가할 구원자이자 궁극적인 메시아가 그의 자손 중에서 나올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아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22장에서 하나님이 언약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셨던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손을 들어 아들을 치려 하는 순간 하나님이 그를 막으시며 제물로 쓸 양을 이미 준비해 놓았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령하셨다가 막으신 이 일을 자신의 후손으로 육신을 입고 올 또 다른 아들에게 친히 행하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실 것을 희미하게나마 내다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 제안에는 복음의 제안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찾아와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시고 죄를 깨우치십니다. 세상의 삶과 다른 삶 하나님과 친밀한 삶 죄와 어리석음을 용서받는 삶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삶을 살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새 이름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 "라는 이름,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는이름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온 세상에 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힘과 세상에 토대를 두는 불확실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토대를 두는 보이지 않는 삶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신과도 화평한 삶 자기 죄가 사함 받았음을 아는 삶 새로운 힘과 능력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사는 삶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4. 대단원

그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 하나님을 믿었다 '라는 것입니다.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경하셨다 "그는 고향을 떠났고 모든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했을까요? 순전히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근거로 그렇게 했습니다. 들은 말씀 외에는 다른 근거가 없었습니다. 아마 친척들은 반대하며 말렸을 것입니다. 대체 어딜 가겠다고 그래? 미쳤어? 대체 왜 그래? 무슨 근거로 이러는 거야? "아마도 그때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말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근거입니다. 저는 기꺼이 그 말씀대로 할 생각입니다 라는 것뿐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인생관은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신문으로 형성되었습니까? 성경으로 형성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에 대해 하나님이 해 주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장막에서 자식들과 함께 거류민으로 살겠지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복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밖에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믿는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물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론을 증명하거나 기하학 문제를 증명하듯이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며 그에게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민겠다 "라고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이른바 과학적인 이의를 제기합니다. 기적이 이해되기 않는다고 반발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고 나면 불합리할것이 없습니다. 믿고 나면 이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대로 했습니다. 믿음 신앙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당연히 믿음의 핵심 요소입니다.. 창 12: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11:8"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도 갔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300년 전에 한 청교도가 한 말이 있는데, "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누구와 가는지는 분명히 알았다. ” 이것이 믿음의 핵심 본질입니다.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걸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신이 갈 땅을 바라보며 고향을 떠났습니다. 영원한 삶이 따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기간은 기껏해야 70년 간혹 조금 더 사는 사람도 있지만입니다.. 세상의 삶은 덧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장차 올 삶은 영원한 삶입니다. 우리는 그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언약의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하면서 시험하셨을 때에도 기꺼이 그 명령을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면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다시 살리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계속적인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이 땅의 삶은 여러분을 만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거쳐 영원히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삶에서 떠나십시오. 그 삶에서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그가 여러분의 죄와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미 여러분 대신 그 벌을 담당했다고 하시면서 값없이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새 이름 아들의 이름을 주실 것입니다. 삶의 길과 죽음의 길에서 여러분을 인도하여 무궁한 복과 기쁨이 기다리는 영원한 성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