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신학/교리사

신약 역사 첫째 강의안

wordlove 2009. 9. 7. 09:12

신학의 역사


첫째 강의 시간(pp41-79)
1장 교부 시대(약 100-451)

1) 교부 시대 개관

교부 시대는 기독교 사상사 중 가장 자극적이고 창의적인 시대였다. 기독교의 본류는(성공회, 동방 정교회, 루터 교회, 개신교 및 가톨릭교회) 교부 시대를 기독교 교리의 발전상 결정적 이정표로 삼고 있다. 17세기  성공회 저술가 란스로트 앤드류스(1555-1626)는 정통 기독교는 신구약 성경, 삼대 신경, 사복음서, 첫 다섯 세기 기독교 역사위에 설립되었다고 선언했다. 교부 시대의 최초의 과제는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관계를 명시하는 것이었다. 이방인(비유대인) 기독교도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구약은 어떻게 바르게 해석 되어야 하는가? 또 다른 현안은 2 세기 어간 비판자들 앞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방어하고 합리와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역사 초기는 국가의 핍박을 당했다. 문제는 교회의 생존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신학적 논란은 제한적이었다. 순교자 유스티뉴스 등과 같은 변증가(apologetics)들에 의해 적대적 이방 대중 앞에서 기독교의 믿음과 실천을 옹호 설명하는데 관심을 집중한 이유를 알게 된다.


탁월한 신학자들로 서방에서는 리용의 이레니누스(130-200), 동방에서는 오리게네스(185-254) 가 배출 되었다. 신학적 논쟁은 교회가 핍박 받지 않았을 때 비로소 시작 되었다. 처음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시작 되었다. 1세기 말엽까지 동부 지중해 연안을 따라 구축.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 도성 안에서도 주목할 만한 숫자를 확보했다. 이 제국의 강역에서는 아람어와 헬라어가 행정상으로는 라틴어가 사용 되었다. 로마에 기독교가 출현한 것은 AD 40년경으로 보고 있다. 57년을 전후하여 바울의 로마서에는 라틴 이름이 등장한다.(우르바누스, 아퀼라, 루푸스, 율리아)등장한다. 이것은 로마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음을 암시한다. 마가복음서는 64년경 네로의 박해 직전에 로마에서 기록한 증거가 있다. 막 12:42절의“콰드란(고드란트)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 사용 되지 않았다. 40년 대 로마에 설립된 기독교의 법적 지위는 모호했다. 합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숫자가 증가하자 박해가 시작 되었다. 지역적으로 또는 전로마적으로 핍박이 시행 되었다. 특별히 AD 240년 데시우스 황제 즉위 이후에 적대 행위가 거행되어 250년 로마 주교 파비안이 처형 되었다. 데시우스는 지방 총독 및 행정 장관들에게 로마 신들과 황제를 위한 희생제의 집행을 요구했다. 희생 제의를 실행한 사람들에게 확인서가 발급되었다. 이 시대 수천 명의 기독교인이 순교했다. 이 박해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타락하거나 박해를 피해 신앙을 잃었다. 이들의 처리를 둘러싸고 분규가 일어났다. 서로 다른 견해가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와 노바티아누수에 의해 제기 되었다. 두 사람 다 발레리아누수 황제 때 순교했다. 가장 가혹한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303년 2월에 일어났다. 모든 기도교의 예배 장소는 파괴 되었고 책은 몰수 되었다. 기독교 고관들은 정통적 로마 관습에 따라 희생 제의를 강요당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인과 딸이 이 명령에 따를 것을 강요당했다는 것은 기독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311년 갈레리우스에 의해 박해 금지령이 내렸다. 박해는 실패로 끝났다. 갈레리우는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종교 집회를 유지하도록“ 허락했다. 교회는 더 이상 강박 관념 속에 있지 않게 되었다.


이제 기독교가 합법적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은 기독교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285년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후에 믿게 됨. 로마 북쪽의 밀비안 다리에서 312년 10월 28일 벌어진 운명의 전쟁에서 콘스탄티는 서유럽으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와 북 아프리카를 장악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얼마 후 자신이 기도교도임을 선언했다. 유세비우스 같은 역사가는 개종이 운명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콘스탄티는 자기 병사들에게 방패에 십자가 표시를 하도록 명령하는 신령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로마는 점차 기독교화 되었다. 321년 일요일을 공휴일로 선포했다. 기독 상징이 로마 주화에 등장했다. 이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로 치닫게 되었다.


그 결과 건설적 신학 논쟁이 공적 업무가 되었다. 이제 신학은 로마 제국의의 공적 관심사가 되었다. 점차 교리 논쟁이 정치적 신학적으로 중요 안건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제국 안에 하나의 교회가 존재하길 바랐고 교리적 차이가 우선적으로 논의 정립되기를 바랐다. 로마의 교회가 점차 강력해지자 로마와 콘스탄티노풀의 기독교 지도자 간의 갈등이 고조 되었다. 훗날 서방, 동방 교회의 분열을 야기했다.  이 두지역과 몇몇 지역이 신학적 논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1. 알렉산드리아: 신학 교육의 중심지로 부상. 플라톤 전통과 관계를 맺으면서 특유의 신학적 풍조를 구축했다. 2. 안디옥: 현재 터키의 갑바도기아 지역과 고대 수리아의 안디옥 시. 사도행전에 기록한 안디옥 시는 기독교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안디옥 학파를 창출했다. 4세기경의 삼위일체 교리에 기여한 “갑바도기아 교부” 들이 두각. 3. 카르타고: 이곳 출신을 저술가로 테르툴레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힙포의 어거스틴 등이 있다.


기독교가 지중해 전 지역에 확고하게 자리 잡자 진지한 신학적 논의가 전개 되었다. 그 결과 교부시대 (310-451)는 기독교 신학 사상 최고 수준으로 평가 되었다. 1. 교부시대와 종교개혁 시대를 대비시킨다. 2. 교부 시대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철학을 이해해야만 한다. 3. 교부시대의 특징은 방대한 교리적 다양성이다. 4. 그 시대는 정치적 언어적 이유로 헬라어 권 동방 교회와 라틴어 권 서방 교회간의 대 분리를 겪었다. 동방 교회가 더 철학적 성향이 있어 신학적 사변에 몰두한 반면 서방 교회는 신학에 철학을 도입하는 것에 적대적이었다. 신학을 경전 안에 비치된 교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2) 주요 신학자

(1) 순교자 유스티아누스 Juatin Martyr(약100-165)

최대의 변증가. 변증가라함은 이교도 문서로 된 수 많은 비판에 직면하여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2세기의 기독교 저술가를 말한다. 그의 첫 변증에서 “기독교 진리의 흔적이 위대한 이교도 저술 안에서 등장한다고 주장” 그의 “종자론/말씀을 간직한 씨앗”에서 하나님께서 고전 철학이라는 암시적 진리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최후의 계시를 예비하였다고 주장. 저스틴은 복음을 헬라 철학이라는 외양에 연계하려는 신학자들의 초기 모범을 보였다.


(2) 이용의 이레내우스 Irenaeus of Lyons(약 130-200)

서마나 출신, 178년 로마의 주교가 됨. 영지주의에 직면해서 기독교 정통을 옹호했다. “모든 이단에 대항에서” 는 구원에 대한 기독교 이해를 옹호한 것이며 비기독교적 해석에 직면해 사도적 증언에 충실한 전통의 역할을 옹호했다.


(3) 오리게네스 Origen(약 185-254)

3세기 기독교의 수호자. 동방 교회 사상 발전에 크게 기여. 성경 해석 부분에서 우의적 해석을 발전시킴. 경전의 표면적 의미는 그 내재적 영적 의미와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 성부의 완전 신성과 이에 못 미치는 성자의 신성간의 구별이라는 전통을 확립. 보편 구원설을 주장 즉 인간 사탄 모든 피조물의 구원 되리라는 사상을 채택했다.


(4) 테르툴리아누스 Tertullian(약 160-225)

서방 신학의 아버지로 불림. 그는 마르시온에 대항해 구약 신약 성경의 통일성을 주장. 마르시온은 신구약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 그는 삼위일체 교리의 초석을 놓음. 그는 기독교 신학과 변증론을 경전 외적 자료에 의존하는 것을 반대했다. 경전의 자족성 원리를 주장한 사람.


(5) 아타나시우스 Athnasius(약 296-373)

기독론에 크게 기여함. 20세 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격에서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는 사상을 옹호했다. 이 주장은 아리우스 논쟁의 핵심이었다. 그는 아리우스가 주장하듯이 그리스도가 완전히 하나님이 아니라면 큰 문제가 일어 날 것이라고 주장. 우선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구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어떤 피조물도 다른 피조물을 구원 할 수 없기에 그러하다. 둘째 기독교회는 우상 숭배의 죄를 저지르게 된다. 정기적으로 모여 그리스도께 경배하고 기도하기에 우상 숭배가 인간의 구성물 혹은 피조물을 경배하는 것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이 경배는 우상 숭배적인 것이라 귀결된다. 결국 이 논증은 당대를 평정했고 아리우수를 배격했다.


(6)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 of Hippo(354-430)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 밀라노의 주교 암부르스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회심을 경험했다. 32살의 나이에 진리에 대한 불타는 욕구를 만족 시키지 못한 체 밀라노 정원에서 번민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이 “들어라, 읽으라(tolle, lege)"라는 노래를 듣고 하나님의 인도라고 느끼고 성경을 펼쳤는데 롬 13:14절이었다.”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그는 ”확신의 빛은 그의 가슴에 비쳤고 모든 의심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그 순간 그는 가슴과 머리를 모두 설득하는 열정적이며 지성적인 문체로 기독교 신앙의 옹호와 구축에 그의 모든 지적 능력을 모두 바쳤다. 천식으로 고통당하다가 힙포 현재 알제리의 주교가 되었다.(395) 그는 세심한 신약 주해 특히 바울 서신 주해는 ”기독교 신앙의 두 번째 수립자“라는 명성을 안겨 주었다. 그의 공헌 중 중요한 것은 신학의 발전에 있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본 성론과 삼위일체 교리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이 중요 작품은 ”신의  도성“ 이다. 변증적이다. 그는 로마의 몰락이 기독교 때문 이라는 비난에 대해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 썼다. 그의 삼대 영역에 있어서의 신학적 공헌은 도나투스 논쟁에서 유래한 교회와 성례전 교리, 펠라기우스 논쟁애서 유래한 은총 교리, 삼위일체 교리이다.


3) 주요 신학적 발전


(1) 신약 정경 범위

정경(canon)이란 의미는 "규준“ 혹은 ”고정된 참고 점“을 뜻하는 ”카논(Kanon)에서 유래했다. 신약 기자에게 경전이라는 용어는 본래 구약의 문서를 의미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에게 구약에 대비되는 신약을 의미했고 양자를 동등한 권위로 취급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레내우스 시대에 사복음서가 인정 되었고 2세기 말에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들이 영감 받은 경전이라는 동의가 성립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의 열네 서신, 계시록을 승인했다. 테르툴레아누스는 “율법과 예언자” 옆에 복음서와 사도서신이 나란히 존재함을 선언했다. 이는 양자가 교회 안에서 같은 권위를 누림을 의미한다. 367년 아타나시우는 신약의 27권이 정경 적이라고 확인했다. 서방 교회는 히브리서를 포함시키기를 주저했다. 초기에는 베드로 후서, 요한 2. 3서, 유다서사 누락되기도 했다. 계시록은 동방 교회에서 한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정경구성에 사용된 기준은 무엇인가? 기본적인 것은 권위의 부여라는 원칙이 아니라 권위의 인정이라는 원칙인 것으로 보인다. 환언하면 문제의 작품의 정경성은 내적 권위에 의거해야지 그 작품위에 자의적으로 부여된 외적 권위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레내우스는 교회는 정경을 창조하지 않으면 교회는 이미 경전에 내재한 권위에 근거한 정경을 수용 보존하는 것이라고 했다. 5세기 초엽에 서방 교회에 정경 판이 이미 종료 되었다. 정경의 문제는 종교 개혁 때까지 거론 되지는 않았다.


(2) 전통의 역할

현대의 뉴에이지 운동처럼 초대 교회는 영지주의 운동에 큰 도전을 받았다. 영지주의는 여러 면에서 기독교와 유사했다. 교회를 당혹하게 하는 방식으로 신약 구절을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영향을 경전의 올바른 해석 방식에 관한 질문을 야기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통에 호소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전통은 문자적으로 “건네받는 것” “전달하는 행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레내우스는 “신앙의 규준”이 사도적 교회에 충실하게 보존되어 있고 정경 안에 표현 되어있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사도의 시대에서 당대까지 동일한 복음을 충실하게 선포해왔다. 영지주의자에겐 초대 교회의 연속성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단지 새로운 사상을 창출한 것이며 이 사상이 “기독교 사상”이라고 그릇 되이 제안한다. 전통은 "경전의 전통적 해석“이거나 ”기독 신앙의 전통적 진술“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는 교회의 신경과 교회의 공공연한 교리의 선언 안에 반영 되어있다고 주장.


테르툴리아누스도 전통은 교회 안에서 경전을 승인하고 해석한 방식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경 해석은 참된 기독교 신앙과 훈육을 보존하는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도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 아리우스의 기독론적 오류는 교회의 경전에 충실했던들 결코 발생하지 않았으리라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전통은 사도들에게 받은 유산으로 간주 되었고 이로서 교회는 경전의 올바른 해석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전통은 경전에 추가된 "계시의 은밀한 자원“ 이라 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이레내우스는 영지주의적 것을 배척했다. 오히려 전통은 경전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보장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3) 범 교회적 신경의 확립

신경(creed)은 라틴아 “credo(나는 믿는다)”에서 유래 되었다. 사도 신경의 첫머리가 credo 로 시작한다. “나는 믿나이다. 하나님을....” 그것은 신앙적 진실 곧 모든 기독교도에게 공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골자를 요약한 것이다. 교파에게 “고백(confession)” 이란 용어를 사용. 개신 교회의 웨스트민스트 신앙 고백. 신경은 기독교도라면 누구나 수용하는 것.


교부시대에 전교회가 인정하는 두개의 신경이 탄생했다. 첫째가 세례이다. 초대 교회는 부활절에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둘째가 사도신경이다. 그것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교회, 심판, 부활에 관한 것도 있다.  니케아 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성령의 사역에 관련된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이 신경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통일성을 강력하게 주장.


(4) 예수그리스도의 두 본성

325년 까지 초대 교회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 ousios)" 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homo ousios는 ”존재성 하나“ ”동일 본질“로 번역 할 수 있다. 이 기독론 진술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는 기독교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중요성을 공고히 하며 둘째는 단순한 신 개념에 대해 강력히 대응한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과 같이 ”동일 본질적 존재“ 로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전체 교리는 이 신앙의 견지 하에 재고 되어야한다. 이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 안에서 기독론적 동의가 성립된 후에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견해가 일치된 후에야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신학적 사색을 할 수 이었다. 초대 교회의 기독론 논쟁은 헬라어로 수행 되었고 주요한 헬라 철학파의 전제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해야한다.


a,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 요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 성육 사상을 강조하며 성탄 절이 부각 되었다.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 그리스도의 모범을 부각 시켰다.


b. 논쟁

4세기 아리우스(250-336)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한 지위에 있음을 가리키는 칭호는 공경하는 칭호에 불과하다고 주장. 그리스도는 피조물로 간주 되어야 한다고 주장.(피조물 가운데 탁월한 존재) 아타나시우스가 크게 반발.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기독교의 구원 이해에 핵심 요소라고 주장. 아리우스이 기독론이 구속 론으로는 부적합하다고 주장. 아리우수의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성을 구원 할 수 없다. 아리우수는 이단으로 파문당했다.


뒤이어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대략 310-390)를 중심으로 아폴리나리스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그리스도은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 그리스도의 경우 인간의 영은 신적 로고스로 대취 되었다고 주장. 그 결과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을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는 인간 본성을 완전히 구원 할 수 없으리라는 이유로 비판 받았다.


3.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는(325)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소집 되었는데 자기 제국 안의 기독론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최초의 초교파적 교의회였다. 현재 터키의 도시 이즈니크인 에서 예수는 아버지와 ‘동일본질(호모우시아)’ 임을 확증함으로서 아리우수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 칼케돈 공의회(451)는 니케아 결정을 확증했다. 그 후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새로운 논쟁이 시작 되었다.


(5) 삼위일체교리

기독론이 종식되자 삼위일체 교리가 등장. “한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 아버지, 아들, 성령이 있으며 이들은 같이 신성하며 지위 또한 같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립되었다. 성령의 신성은 아타나시우스와 바실리우스의 저작을 통해 정립되었다. 삼위일체의 주요 논쟁 관점은 그 교리의 타당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뚜렷이 구별되는 두 방식이 점차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대립하게 되었다. 현재 그리스. 러시아 정교회에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동방 교회의 입장은 갑바도기아의 교부로 알려진 바실리우스(330-379) 그레고리우스(329-389) 니사의 그레고리들에 의해 성부. 성자. 성령이 경험되는 상이한 방식에 유의하면서 삼위일체를 성찰했다. 어거스틴과 연관 서방 교회는 하나님의 통일성에서 시작했고 신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로 나아갔다.


(6) 교회에 관한 교리

서방 교회의 논쟁의 초점은 교회의 거룩성 문제에 집중 되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아프리카 토호 기독교도들이었다. 이들은 교회는 성자들의 모임이요 죄인들의 설자리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박해로 인해 대두 되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까지 계속 되었다. 박해 중에 경전 소유는 불법이었기에 다수의 기독교도들이 소유한 경전 사본을 당국에 넘겨주었다. 이들은 즉시 핍박 하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정죄 당했다. 박해가 끝나자 ‘변절자(문자적으로 자기 경정을 넘겨준 자)’ 중 다수가 교회에 합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는 달리 교회는 죄인의 혼합체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면서 이런 이유로 죄를 짓게 된 자들을 제거하는 것을 거부했다. 교회의 사역과 설교의 유효성은 교회 사역자의 거룩 성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거한다. 사역자의 개인적 무가치성은 성례전의 가치를 손상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이 것이 곧 규범이 되었다. 도나티우스 논쟁은 교회 론에 관한 최초의 문제들 다룬 것이었다.  이 논쟁의 현안 중 다수가 종교 개혁 시대 때에 다시 대두 되었다.


(7) 은총의 교리

420년 경 펠라기우스에 의해 논쟁이 붙었다. 그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로마교회의 도덕적 해이에 경악한 그는 지속적인 자기 향상 즉 구약 율법과 그리스도의 모범 아래 자기 향상을 강조했다. 그는 자율적 인간의 종교로 간주 되는바 인간은 자기 구원의 주도권을 스스로 질 수 있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경렬하게 반박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인의 삶 모든 단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은 구원을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기는 데 필요한 자유를 소유하지 못했다. ‘의지의 자유‘를 소유하기는커녕 인간은 죄로 인한 타락한 의지 악으로 치닫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만드는 의지나 소유 할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이 죄를 향해 삐뚤어진 것을 고칠 수 있다. 그는 은총을 강조하여 “은총의 박사”로 불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적 주제는 인간 본성의 타락성(fallenness)이다. 이 타락은 창 3장에서 유래한바 인간 본성이 최초의 상태에서 “떨어져 내린 것” 인간 본성의 현재 모습은 처음 하나님의 의도하는 일치하지 않다. 지금의 질서는 더 이상 본래의 ’선한‘ 전일성과 일치하지 않다. 그것은 퇴락이다. 그것은 구겨지고 훼손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죄는 인간본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본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우리 존재의 전체적 측면이다. 만민이 죄인이므로 구원이 필요하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인간성을 그대로 두면 결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에로인과 코카인 중독자와도 같다. 인간 내부에 해결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딜레마에 개입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인간 세상에 오셨다. 그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주장. 구원은 신의 선물로서만 가능하다. 그는 구원이 인간 외부 곧 하나님 자신 안에 있음을 강조했다. 구원의 여정을 주도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전혀 달랐다. 그는 구원의 근원이 인간 내부에 있음을 가르쳤다. 개별 인간은 모두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 인간은 죄에 빠지지 않았고 구원에 필요한 것을 모두 행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구원은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며 이 선행으로 인해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책임을 느끼게 된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의 개념을 밀어 놓았고 그것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간에 부여한 요구 즉 십계명이나 그리스도의 윤리적 모범 요구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펠라기우스는 “공로로 인한 구원”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으로 인한 구원”으로 요약 할 수 있다.


두 학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가 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본성은 약하고 타락하고 무능한 것인 데 반해 펠라기우스는 인간 본성은 자율적이며 자족적인 것이다. 전자에게 구원은 공로 없는 선물이며 후자에게 구원이란 정당하게 획득한 상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은총의 선물은 모두가 아니라 몇몇에게 베푼다면 하나님은 구원 받을 사람을 “미리 선택”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서 예정 교리가 나온다. 예정이란 어떤 자를  구원하기로 혹은 버리기로 한 하나님의 고유의 영원한 결론이다. 카르타고 공의회(418)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과 죄에 대한 견해에 찬성 했고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다양한 형태로 후세대에 쟁점으로 지속되었다. 중세 시대에 재론 대다가 종교 개혁 시대에 따라 불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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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 노훈 교수의 강의안(조직 신학)은 정 목사의 개인 블로그 인 로고서 아가페 주소:http://blog.daum.net/jnhok 의 좌측 하단부분에 있는 기타 자료 중 신학교 강의안에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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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010-3559-9079


2. 첫 번째 독서 보고서

1) 사례연구 1.1 성경과 전통(pp 70-79)

2) 사례연구 1.5 삼위일체(pp 104-118)

3) 사례연구 1.6 도나투스 논쟁(pp 119-128)

4) 사례연구 펠라기우스 논쟁(pp 129-138)


3. 각 사례별로 읽고 핵심 요약하기

4. 점수 최고 1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