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에 대한 판단 근거"수정판"
1. 본문: 롬 14:1-12
2. 명제: 비판에 대한 판단 근거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나와야 한다.
3. 제목: 비판에 대한 판단 근거
성경은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니 비판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판이 다 나쁜 것입니까?라고? 이이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비판은 삼가되 분별은 용인하고 있습니다. 비판과 분별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비판은 파괴적인 의미라면 분별은 생산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신학자는 우리가 어떤 행동에 대해서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연구해 보는 것이 분별이라고 했습니다. 이 분별의 결과는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비판은 어떤 한 두가지의 행동에 근거하여 그 사람의 인간됨에 관하여 쉽게 결론을 내리고 속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항상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정죄로 나아갑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약한 자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시기 때문이며 모든 의견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냐에 따라 판단할 것이며 하나님만이 판단의 최종 주권자이심을 명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에 대한 판단 근거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비판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비판의 판단 근거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비판하는 자가 아니라 진정 분별하는 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회에 유익과 이웃을 세우는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비판에 대한 판단 근거는 무엇입니까?
1. 나와 의견이 다른 그 사람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 ”여기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믿음이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구약 율법 중 의식에 관한 율법을 보면 예를 들어 비늘 없는 음식을 먹지 말라, 돼지는 먹지 말라 등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믿은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은 법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반면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율법에 여전히 매여 음식을 가리면서 먹고 그러다 보니 채소만 먹기를 고집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오늘 날 채식주의 자를 두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아직 유대인의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는 이런 음식 문제로 교인들 간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때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믿음이 강한 사람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로 싸우다 보니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실족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의견이 다르다고 서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와 의견이 다른 형제를 하나님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절 “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하나님이 나와 의견이 다른 그 사람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 형제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내 의견일 옳다고 하더라도 내 의견의 옳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와 의견이 다른 그 형제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의견을 주장하는 자리에 서기 이전에 나와 의견이 다른 저분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리가 사랑의 원리입니다. 의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의견이 다른 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문제는 우리는 나의 의견만이 중요하다고 고집합니다. 아닙니다. 나의 의견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어거스틴은 “ 의견이 충돌할 때 진리는 고수하되 비 진리는 타협하며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 ”고 하셨습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나의 의견이 성경에 근거한 진리가 아니라면 겸손하십시오. 절대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마십시오. 의견을 내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견을 절대화하여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비판하면 여기에서 갈등이 폭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의견을 중요시하지 말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중요시하십시오. 하나님이 저 사람도 사랑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십시오. 사람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 한 번쯤 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이해입니다. 이해란 영어로 understanding입니다. 상대방의 밑에 서본다는 뜻입니다. 왜 저렇게 말할까?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하십시오. 비판이란 이해를 생략한 체 업신여기고 일방적으로 판단하여 정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깊은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의 의견과 주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와 의견이 다른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비판하기보다 분별하는 것입니다. 비판에 대한 판단 근거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에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어느 날에 예배를 드릴 것인가 라는 날짜 문제가 큰 이슈였습니다. 5-6절“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아시다시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초기에는 유대교를 믿다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일날 즉 오늘날 일요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여 예배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주로 유대인 출신교인 가운데 생겼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었으니 토요일 날 예배로 모이십시다 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토요일파와 일요 일파로 의견이 갈라진 것입니다. 서로 자기 주장을 하며 다른 의견을 가진 형제를 서로 비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에 큰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일어난 또 다른 문제는 제사 음식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입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고기 장사꾼들이 고기를 팔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믿는 여 신전에 고기를 가지고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상에게 제사 드린 그 고기를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았습니다. 예수 믿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고기는 우상에게 제사드린 음식이므로 우리는 그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교인들은 인간이 만든 우상이 어찌 음식을 줄 수가 있느냐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먹어도 괜찮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의견을 달리하는 두 파가 이 문제로 서로 갈라져서 누가 옳으니 그러니 하고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주장하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에 드린 제사 음식을 어떻게 먹어요 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약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 사도는 그 날도, 그 음식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항상 본질은 보지 못하고 비 본질에만 몰입하기 시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토요일에 예배드려야 합니다. 우상에게 드린 더러운 음식을 어떻게 먹을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서로 자기 의견에만 몰입하여 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어떤 날짜 어떤 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즉 정말 본질적인 것은 주를 위하는 것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6-7“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나의 의견을 주장할 때 나의 의견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마시고 먼저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주장이 교회에 덕을 세우고 다른 지체들을 세우는데 덕이 되느냐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피아노를 처음 교회에서 사용할 때 반대자가 많았습니다. 원래 피아노는 술집에서 먼저 사용된 악기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반대자들은 더러운 술집에서 사용되는 그런 악기를 거룩한 교회에 들어오다니 하며 반발한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피아노라는 악기가 누구를 위하느냐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피아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가 되면 그 피아노는 거룩한 악기가 됩니다. 그러나 똑 같은 피아노가 술집에서 사람을 타락시키는 데 사용되면 그 피아노는 마귀의 도구가 됩니다. 수년 전만 해고 교회에 기타를 치거나 드럼을 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악기 자체는 더럽고 선한 것이 아닙니다. 중립입니다. 그 악기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골 2:16-19“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니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육신을 따라 헛되이 가장하지 말고 머리를 붙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모든 것 즉 음식, 날짜, 등등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림자만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입니까? 예수님만이 본질입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를 비판할 때 그 일이 과연 예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을 높이고 교회에 덕이 되고 다른 지체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지를 먼저 살피십시오. 바울 사도는 고전 8장에서 나는 우상에게 드린 음식도 사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 킴 없이 먹을 수가 있지만 내 자유가 아직 믿음이 어린 신자에게 거리 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 자유를 잠시 유보하고 그 믿음이 약한 이웃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자기주장을 포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전 8:13 “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이런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먼저 살핀 결과인 분별인 것입니다. 비판에 대한 판단 근거는 무엇입니까?
3. 최종 판단 자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왜 우리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까? 나의 의견이 절대 옳다고 스스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기 우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 되는 것인 냥 무의식적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 서야 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10-12절“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내가 한 모든 말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 앞에 가서 다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의견을 주장할 때 나는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은 내 의견과 주장은 많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니 자기 고집과 아집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나도 틀릴 수도 있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 외에는 절대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됩니다. 내 의견은 절대 옳다 라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우리 인생은 사소한 것에 매달리기가 싶습니다. 미국에 어떤 갈등이 심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갈등이 심했든지 나중에는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서로 말도 안 하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들이 마음이 괴로워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실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보니까 아버지께서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아래층에 내려와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용서를 구하게 되었고 그날 밤 부자 사이에는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다정하게 옛일을 더듬었습니다. 네가 어려서는 여행도 함께 하고 운동도 함께 하는 좋은 사이었단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들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함께 집 근처의 호숫가에서 초록색 보트를 타고 놀던 것이 생각나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니야 그 보트는 하늘 색이었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초록색이었다고 우기게 되었고 그날 밤 부자는 화해 속에 잘 나가다가 아무것도 아닌 보트 색깔 때문에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오늘 말씀에 비판에 대한 판단 근거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그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 의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의견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 마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교회에 덕이 되면 다른 이웃의 믿음을 세우는 것이 되느냐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최종 판단 자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내 의견도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모든 말도 하나님 앞에 언젠가는 심판 받을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그래서 비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분별을 잘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