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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의 실례들"수정본"

wordlove 2021. 4. 20. 05:50

1. 본문: 14:1-4

2. 명제: 중립적인 문제에 대하여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것은 율법적으로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3. 제목: 율법주의의 실례들

 

1. 갈등

우리는 믿음의 이해에 있어서 강한 형제이든 약한 형제이든 간에 기독교 신앙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넘어지기 쉬운 위험성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진리를 믿기는 하지만 그것을 적용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믿는 것을 부인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 때문에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은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셨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또한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는 1세기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중립적인 문제들 ““ 진리가 아닌 문제들 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여전히 남아 있고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신자가 예수 믿자마자 제일 먼저 구입해야 하는 것을 알람시계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제부터 몇 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또 몇 시에 성경 읽기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Qt(경건의 시간) 시간을 가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인지 의심스럽다는 식입니다. 이것도 작은 율법주의입니다. 물론 이런 시간은 주님과 규칙적인 동행의 시간을 가지고자 하는 선한 동기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그가 그리스도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 채소를 먹느냐 안 먹느냐는 식으로 그리스도인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넘어가서 규칙과 규례를 만들어내고 성경을 통해 입증할 수 없는 여러 시금석들을 고안하는 위험성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율법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그 결과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어떤 잘 믿는 신학교 학장님이 자신은 한 때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일에는 토요일이나 월요일에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신앙생활의 철칙이었다는 것입니다. 주의 날을 지키기 위해서 토요일 밤에 미리 구두끈을 매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그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토요일에 미리 해둔 것입니다. 한동안 이런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자기 이런 행동은 율법주의라는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주위에서 해방받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실로 그 사람은 바리새인이 저지른 그 잘못을 자신도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주님께서 자기들이 정한 규칙을 어긴다고 비난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도 일이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비난했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비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세운 표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에 빠질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9;49-50“ 눅 9:49 요한이 여쭈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눅 9: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의 그룹에 들지 않고 모든 방면에서 자기들을 닮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제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권리가 없다고 느껴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2. 갈등 심화

교회 역사는 사람들이 자주 그릇된 이유로 분열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2차적인 중요성을 가진 교훈을 중심 위치(진리 혹은 구원의 본질)에 높이 올려 놓았기 때문에 교회 분열의 잘못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물세례를 인정하지 않음)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지 않았으니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만든 규례입니다. 그 규례들이 사람을 분열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만든 규례를 높이거나 그것들은 중심 위치에 놓을 때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같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런 규례 때문에 분열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극악한 죄를 범하였거나 죄 가운데 있다면 교회는 그들을 징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성경의 전체 강조점은 사랑의 정신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 교훈은 우리의 목적인 사람들을 배제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초정하고 그들이 성찬식에 오는 것을 즐거워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사랑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고기를 먹으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주의 성찬식에 참여하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음을 그대는 알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다면 무슨 권세로 그를 거절하는가? ”바로 그러한 논리입니다. 신약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서 생기는 한 가지 난제가 있습니다. 바울이 이 시점에서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4장에서 사도는 그가 사랑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러나 갈 4장이나 골 2장에 가면 하나의 모순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4:7-11“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4:8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에서 사도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 를 지키고 싶어 하는 갈라디아 그리스도인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 2:16-22”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하는 것이니 2: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사도 자신이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여기 롬 14장에서는 어느 편도 들지 않고 관용을 보여 언뜻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다가 위와 같은 곳에서는 강하고 거의 단호하게 정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사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4장에서는 믿음의 이해에 대한 의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믿음에 대한 연약한 이해 때문에 불행해졌습니다. 그들은 과민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것을 알고 그들에 대하여 관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우처럼 그들이 만든 규칙을 절대적인 본질로 삼게 될 때 사도는 정죄한 것입니다. 더 연약한 자들이 법을 만들고 여러 조건들을 전제해 놓고 자기들이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때에는 정죄의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사도는 정확히 동일한 원리 위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4장과 롬 14장의 모든 교훈을 주관하는 한 원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관용을 자세를 취했지만 그러나 바울은 어떤 원리든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에 대하여 절대적인 자세를 견지했고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가르친 것과 자신의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3. 전환

초대 교회는 위대한 원리를 세웠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를 보세요.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 아래 들어가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천 만에요.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연약한 자로 하여금 주장하는 자가 되게 허락하지는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일을 피하고 그들을 깨우치려 애를 쓰며 그들을 인내하십시오. 오래 참으십시오. 그들을 달래고 할 수 있는 한 멀리까지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나 결단코 진리(원리)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타협을 위해서 절대적인 진리를 뒤로 물리지 마십시오. 그들의 연약함으로 하여금 교회 정치나 교회 질서의 주도적인 원리가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중립적인 문제들을 기준 삼아 그리스도인이니 아닌지를 결정하는 일은 결코 하락하지 마십시오. 사도의 가르침 중 결코 모순점이 없습니다. 교회는 항상 이 가르침을 견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자주 그 가르침에서 이탈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나는 이것 위에 서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위에 서 있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까?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면 그대가 누군데 저를 거부한단 말인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나요? 여기에 논점이 제기됩니다. 연약한 형제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 만일 채소만 먹는다면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다고 안심하고 믿지요 자 이러한 태도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대답은 이러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받으셨는지를 정당하게 알게 하는 분명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3:16-18”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만일 사람들이 내가 죄인인줄 압니다. 나는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내 행위는 쓸모없음을 저는 잘 압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 내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의지합니다. 저는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신앙 고백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강한 증거를 추정케 해줍니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더하여 그들이 어떤 교회에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표명하고 세상 백성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들어가고 싶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다시 분명히 하나님께서 저들을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보편적으로 자기들의 신앙 고백과 일과성 있는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고 말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릇될 수도 있고 오도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6:4-6”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에 묘사된 사람들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그릇되게 사람들을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 더 깊은 지식을 배우고 또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가 성장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4. 대단원

또 하나의 시금석을 사도 행전해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유대인으로서 초기에 이러한 문제로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과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기도 중 행 10장을 보면 그는 환상 가운데 유대인이 먹지 않는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을 먹으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물론 유대인인 베드로는 먹지 못합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방인 고넬로가 보낸 사람들이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로 집으로 가자고 베드로에게 강권합니다. 유대인인 베드로는 거기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게 됩니다. 10:44-48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받으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면 내가 누구 관대 그들에게 세례 주기를 거부하리오?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의 논증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받은 것은 성령께서 이방인에게도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은 열망이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논리적으로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오이런 일로 행 11장에 유대인 베드로가 이방인을 영접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11:17”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하나님이 유대인인 나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동일한 선물인 성령을 주셨는데 내가 누구를 거절한단 말인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여기서 더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을 꺼려하지 말라.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그가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면 너도 그 사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전통을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점은 항상 교회 생활에 있어서 큰 난제 중 하나입니다. 자신들이 물려받은 입장 때문에 어느 전통 위에 서서 우리는 항상 그래 왔어요 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인간이 만든 전통위에 서서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위대한 원리들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