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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섬기는 일의 동기"수정본"

wordlove 2021. 4. 22. 05:52

1. 본문: 14:5-9

2. 명제: 중립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 섬기는 동기를 살펴서 판단해야 한다.

3. 제목: 주님을 섬기는 일의 동기

 

1. 갈등

중립적인 문제진리가 아닌 문제들 즉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들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첫 번째 해답은 각각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6절에서 바울은 두 번째 해답을 줍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사도의 원리는 이러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이 문제에 있어서 관용과 이해를 보이는 더 높은 동기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어떤 방식을 결정하는 정신은 어떤 의미에서 그 결정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순전히 지성적인 차원에서만 결정해야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거기서 출발해야 되겠습니다마는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유혹하여 학문적 이론적이 되게 만듭니다. 이러한 중립적인 문제를 만날 때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이론적인 자세로 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대들의 주도적인 사고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고 있다는 데에 있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해서 중히 여기고이 점을 반복합니다. 그는“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니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 ” 여기다“ 여기다 “라는 이 말은 무엇에 대하여 생각하다. 이해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날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두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주님께 속해 있으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 앞에 옳은 것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 요점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에서도 같은 요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원리입니다.

 

2. 갈등 심화

여기 롬 14장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우선적으로 자신의 자유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 자신의 자유나 우리 자신의 관점 우리 자신의 주장들에 관해서만 관심을 먼저 갖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선적으로 무엇보다 주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날을 특별한 날로 여기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그 사람이 그 날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아니면 그저 그 사람의 의견으로만 그렇게 하는지 보십시오. 만일 그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존중하는 일에 진정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다룰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비록 그 사람과 의견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 또는 자신을 내세우고 있지만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화하는 두 사람 모두 자기 자신 자신의 자유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는 한 함께 계속 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고기 먹는 문제로 논점을 돌려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점을 같습니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해서 먹으니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니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상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상은 순전히 사람의 상상으로 고안해 낸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사람은 그 고기를 자유로이 먹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이런 요점에 대해서 약한 형제들에게 말할 때 그 형제를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고 있다는 증거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의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있다는 훌륭한 증거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먹고 있는 이 고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의 동기가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기가 먹는 음식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점을 유의 깊게 주목하고 나서 이 사람에 대한 판단을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 믿음이 더 약한 형제를 거론합니다. 바울은 먹지 않은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물론 이 사람이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는 저 사람과 제가 같지 않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런 해석은 그릇된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해석은 바리새인의 해석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람이 자기가 먹는 채소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문제로 의견 차이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의 공통 부모를 주목하십시오. 그들 모두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모두 그리스도인 다운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주를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먹습니다. 그들은 다 같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고기를 먹고 한 사람은 채소를 먹습니다. 그처럼 사도는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로 어느 누구도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 강한 형제는 더 약한 형제를 멸시하지 말고 더 약한 형제는 더 강한 형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는 방식은 그 일 자체보다도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형제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동기와 이유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고기나 채소를 먹느냐의 문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다 같은 주님 같은 구주를 섬기는 데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둘 다 동등하게 하나님께서는 모두 선하고 모든 온전한 선물들을 주시는 분이시며 모든 음식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 고기를 먹느냐 않느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중립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위해서 본질적인 논점이 아닙니다. 그 양편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거나 주님께 감사하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바울은 논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런 문제는 너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주님의 영광과 그 은혜를 찬미하는 것이고 겸손과 감사함으로 주님께 찬양드리는 정신입니다.

 

3. 전환

그러므로 이러한 고기를 먹는 것이나 날들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너무 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중요하다고 느끼는 무엇을 말합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채소나 고기를 먹되 주님을 위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삶 전체에도 해당됩니다. 8 우리가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시겠습니까? 그는 특별한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편적인 영역에서도 해당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들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적인 진술을 만납니다. 이 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동일한.“ 긍정적인 국면을 만나게 되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해서 산다. ‘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사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7절에서 사도는 우리 주님과의 관계에 관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사도는 불신자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는 신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난제는 신자들이 만나는 문제들입니다. 이 말은 우리 중 어떤 한 사람도 어떤 한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섬기지 말아야 하며 우리 중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거나 자기 자신의 이해를 따라 살거나 자기 자신의 성향을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님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이익이나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거나 죽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원리가 삶 전체를 주장해야 합니다. 분명히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와의 차이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불신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삽니다. 바울은 이 원리가 우리의 죽는 것도 지배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내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죽을 때와 죽을 방식 죽을 장소를 결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자신을 위해서 죽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내맡겨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살을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살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에 관해서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후 4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지나온 무서운 시련과 환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런 다음 고후 5:1-2절에서 바울은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후 5: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 하노라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영화롭게 될 것과 자신의 몸도 영화롭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복된 소망 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결코 나는 죽고 싶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됨을 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그렇게 말합니다. 고통을 만나면 이 모든 일에서 벗어 날 수만 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든 고통과 염려와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패배주의요 이기심입니다. 그것은 좌절과 절망이요, 주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증거입니다. 위대한 설교가 조지 휫필드의 일화입니다. 그가 나이 많은 월리암 테넨 목사와 행복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휫필드는 매우 젊었습니다. 당시 나이 25세의 영적으로 고양되어 있었고 천상의 마음을 가진 젊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기이한 나타남을 경험했고 하나님과 비상한 교제를 나누웠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그것을 즐겼고 그 일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교제하는 자리에서 휫필드는 자신을 즉시 하늘에 가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말에는 선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월리암은 휫필드에게 날카롭게 질책했습니다. 그대의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그대가 언제 죽을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닐세. 그 일에 흥미를 가져서는 안 되네. 그저 주님을 섬기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파하며 이 특권을 우리는 계속하면 되는 거요. 이 문제는 온전히 주님께 맡겨야 해요. 무슨 권리로 내가 가고 싶다 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이요? 주님께서 그대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압니까? 무슨 권세로 자신의 소원을 주님의 마음과 생각 속에 집어넣는단 말이요?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는 죽음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문제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생애를 마치고 싶어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는 나무 지치거나 어려울 때 좌절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나도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유의 일을 이 세상에서 온전히 떠나는 차원에서 말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생애를 끝내고 싶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주님의 뜻이라면 언제든지 죽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문제는 온전히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고 싶다고 소원함으로써 결정하거나 우리가 가고 싶지 않다는 것 때문에 그 일을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은 주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순교적 죽음으로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복음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태도의 균형입니다. 떠나고 싶다 해도 안 되지만 떠나지 않으려고 움 추려 들어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또 여러분을 통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 자신께 영광이 돌아갈 것인지를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주 나의 죽음에 대하여 가볍게 또는 느슨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내 때가 되면 갑자기 죽기를 원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리처드 백서 트는주님 제가 살든지 죽든지 그것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제 몫이오니 주님 은혜로 그것을 허락하셔야 하겠나이다. 제 삶의 길이 길다면 오래 주님께 순종할 있어 기뻐할 것이고 제 생애가 짧다면 끝없는 날 속으로 날아 올라갈 뗀데 어찌 슬프하리이까?

 

4. 대단원

그리스도인은 모든 국면에서 전적으로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고기를 먹든지 채소를 먹든지 날을 지키든지 지키지 않든지 모든 것에서 그러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주관하는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죽음도 유익입니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만일 죽는다면 그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더 좋은 것 입니다. 언제나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십니다. 그분이 주입니다. 다른 문제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목숨뿐만 아니라 죽음을 통제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하여 바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가 여기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의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문제는 그 고기를 먹느냐 채소를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문제는 날들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 이십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손 안에 있고 자신과 마음과 생각과 뜻과 모든 것을 주님께 복종시켰다고 말하며 자신에 대하서 염려하지 않고 중심에 자신을 놓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옳으며 모든 것이 잘되어 있다고 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전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뜻과 방식에 온전히 매달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이것을 보게 하옵소서! 그것이 삶을 변화시키고 죽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안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