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주 되심"수정본"
1. 본문: 롬 14:9
2. 명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주가 되신 명백한 증거이다.
9. 제목: 그리스도의 주 되심
사도는 항상 먼저 교리를 전하고 이어 그 교리를 적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위대한 가르침에서부터 나옵니다. 롬 14장은 교리와 실천의 연관성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장의 주제는 어떤 음식을 먹는 것이 옳으냐? 어떤 특별한 절기를 지키는 것이 옳으냐? 의 실천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6절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사실상 문제가 되는 것은 동기와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6절“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여러분의 행동이 주를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점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주관하는 가장 높은 교리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바울은 이 요점을 확증시켜 9절에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 ‘사나 죽으나 우리 존재 전체의 주인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이 바울의 진술을 실증하는 방식입니다. ‘이를 위하여’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목적을 위하여’ 또는 ‘이 때문에’ “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결과로 당신 백성들의 주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 백성들의 주가 되십니다. 주님께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결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시고 모든 일 속에서 그들을 주장하십니다. 이것인 성경의 위대한 진리입니다. 이 말씀에서 지적하는 것은 주님의 주되심은 그 죽으심과 부활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사실상 그는 말합니다. ” 주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바로 그러함을 인식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니 주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결과로써만 그 지위를 차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 4:4-5”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율법 아래라는 말은 죽음 아래 즉 죽음에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교리는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본질적인 부분은 주님께서 죽음에 복종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나셨기 때문에 당분간은 죽음의 주가 아니라 그 죽음 아래 복종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그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그저 말씀하심으로써 구원의 선물을 주실 수 없으셨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기 위해서 주님께서 죽으셔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그 답의 한 부분이 나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죽지 않으셨다면 사망의 속박에서 우리를 건져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분명히 죽음의 문제 인간 조상 아담과 하와 즉 타락한 족속인 우리에게 관련된 것으로서의 죽음은 하나님의 단수한 말씀을 통해서 처리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해 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우리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교리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까?
첫째는 주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무덤을 패퇴시키셨고 사망 자체를 패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15장의 위대한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고전 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사망이 마지막 원수입니다. 사망이 존재하여 우리 모두를 대적하여 서 있습니다. 복음의 위대한 주장은 우리 주님께서 사망의 마지막 원수를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의 결과로 무덤이 인류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고 그 권세와 포악한 세력 아래 가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사망과 무덤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 주님이 오셨고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행 2장에서 베드로의 첫 설교의 주제가 ”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부활하심 “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 2:22-24” 행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행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행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모든 사람은 사망에 붙들려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망이 무덤 안에서 인류를 가두고 있음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같은 요점을 이렇게 말합니다. 행 26:19-23절에서 바울이 ”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 나사. “라고 한말을 주목하십시오. 바로 그분은 가장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입니다. 이전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난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의 경우에도 그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23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 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고전 15:23절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처음 딴 열매라는 것입니다. “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우리 주님은 죽음에 매여 있을 수 없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을 관통해 나가셨습니다. 그 결과 롬 14장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자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 죽음에 매여 있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이겼습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셨을 때 우리를 위해서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때문에 사망이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를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롬 14:9절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까?
두 번째는 주님께서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시는 것은 마귀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이점을 히브리 시서를 통해서 이것을 해설해 줍니다. 히 2:14-15“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여기에서 바울은 사망을 이긴 것을 다루기보다 마귀를 이긴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온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가졌다고 말할 때 무슨 의도로 그 말을 한 것입니까? 그 말씀은 우리가 언제 죽을지 마귀가 결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을 때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때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욥기가 증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내 손에 붙이노라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도록 마귀에게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욥 2: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허락 없이 마귀가 생명에 손댈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마귀를 사용하사 죽음을 산출하시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마귀는 우리가 살거나 죽거나 결정할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세력이라는 말은 영향력 또는 권위라는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왔고 그 사망의 속박과 지배하에 있도록 만든 자는 마귀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여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마귀는 그런 의미에서 사망의 원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죄는 결단코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망은 죄의 결과로 들어온 것이고 마귀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한 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어떤 종류의 권위를 가진 자입니다. 죄를 유혹하는 권위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성경은 마귀를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죽음을 산출하는 자가 마귀라는 의미에서 마귀는 살인자입니다. 마귀가 찌르는 것을 들여와 죽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사망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요일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처하 다라고 말은 무엇에 붙잡혀 누워있다.. 누구의 세력 아래 있다. 악한 자의 권세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를 가리켜 이 세상 신이라고 부릅니다. 고후 4:4“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악한 자가 인류 전체를 주도하는 주장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마귀는 인간 본성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 전체를 지배하는 권위와 세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모두 죄와 사단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사단이 남자와 여자의 삶의 주입니다. 사단은 사망에 대한 권위와 세력을 갖고 있는 주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마귀의 세력 아래 있습니다. 사망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원수요 그들을 붙잡는 것이 사단의 영향력과 그들이 사단에게 속했다는 사실의 결과 때문입니다. 이런 간접적인 방식을 마귀가 사망을 주장하는 세력 또는 권위를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에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려 오셨다고 말할 때 멸하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소멸시키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여전히 존재하며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멸망의 불 못에 던져져 영원토록 그 마땅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멸하다라는 말은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경우에 우리 주님이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마귀가 사망에 대하여 지니고 있던 그 특별한 세력을 마귀로부터 강탈하셨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는 “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 악한 자는 더 이상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주가 아니며 우리를 주관하는 권위와 권세를 전혀 갖지 못 합니다.. 구속받은 자로서 우리의 지위가 그러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마귀가 우리에게 행할 수 있었던 모든 일들은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아주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사망의 속박 자체로부터 뿐만 아니라 사망 아래 우리를 붙들고 있는 마귀의 폭군으로부터도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마귀는 그 힘을 강탈당하였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까?
마지막으로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망의 두려움에서 건짐 받았습니다. 히브리서는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한 사람은 사망의 세력에서 뿐만 아니라 사망의 두려움에서 마저 건짐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마귀가 우리 모든 사람들의 생각 속에 일으킬 수 있었던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위대한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 전체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을 때 마귀가 그들을 시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습니다. 초대교인들도 그와 같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준 것은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이 사망의 두려움에서 건져내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이 모든 사람을 두렵게 합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우리가 행한 일 마땅히 행해야 하나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사망의 두려움이 온 인류에게 군림하고 폭군 노릇을 하며 속박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다루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율법은 정죄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사망으로부터 쏘는 것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사망이 그리스도에게 결코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망의 두려움을 산출하는 것은 심판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러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깨끗하며 심판이 더 이상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심판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 사망 안에 그 어떠한 공포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망과 지옥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확보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음 자와 산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자의 주님이십니다. 고전 6:19-20”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유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사망과 생명의 주가 되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죽음도 우리의 종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899년 갑작스럽게 병으로 쓰러져 죽어가든 무디는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오늘은 내 개선의 날이요 대관의 날이다. 나는 수년 동안 이 날을 기대해왔다. “ ”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사망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던 마귀를 정복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 아직도 그 권세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망은 그 쏘는 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공포도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뵙게 하는 문을 열어주는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망의 위협과 고뇌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까?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무엇을 해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보십시오. 마귀의 유혹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마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십시오. ” 너는 졌다. 사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권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고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그리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 나는 사망을 이긴 이 복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내 주님의 손안에 있다. 그분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멸망치 않음을 밝히 드러낸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