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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이 아니라 형제임 "수정본"

wordlove 2021. 4. 28. 07:49

1. 본문: 14:10-12

2. 명제: 중립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권면은 우리는 재판장이 아니며 모두가 형제임

3. 제목: 재판장이 아니라 형제임

 

1. 갈등

중립적인 문제(진리와 죄에 대한 문제가 아닌 문제들)를 해결하는 자세는 무엇을 먹느냐 어떤 날을 지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하는가 라는 동기가 더 중요하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어 9절에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주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주가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산자나 죽은 자의 주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어째서 그대는 자기 형제를 판단하는가? 아니면 어째서 그대는 자기 형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는가?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권면으로 두 가지 논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모두가 다 함께 형제들이라는 사실입니다. 10 네가 어찌하여 형제를 판단하느뇨? ”사도는 여기서 우리는 형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로부터 연유되어 나온 말씀입니다.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는 생명과 사망을 주관하는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을 주관하는 주님도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즉 당신의 생명의 피 값으로 하나하나 사셨습니다. 특히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심으로써 우리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는 없습니다.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사람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육체에 속한 일을 생각지 않고 영적인 일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함께 형제 됨을 인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만일 이 원리를 항상 지켜왔다면 우리의 일들이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교회의 비극은 이것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의견에 찬동하지 않으면 원수로 보며 심지어 증오심을 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원수처럼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경쟁상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나뉘면 안 됩니다. 로마,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문제로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나뉘어 서로를 원수처럼 생각하여 싸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로 얼마나 쉽게 혈기를 내는지요! 교회 안에 불일치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난하거나 그가 잘못한 것을 들추어내지 말고 대신에 그 사람의 동기와 이유를 살피고 옳은 쪽으로 돌아서게 하려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다룰 때 항상 가져야 할 태도는 그 일 자체보다 그 정신 즉 주님을 위하여 라는 동기와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비본질적인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다 함께 형제들이며 주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사도는 이 원리를 약한 자와 강한 자 양편에 다 적용합니다. 먼저 그는 더 약한 형제에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 형제를 판단하느냐? ”다른 사람들은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언제나 믿음의 이해에 있어서 더 약한 형제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먼저 더 약한 형제에게 말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강한 형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 강한 너희는 어째서 너희 형제를 멸시하느뇨? 어째서 너희 형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느뇨? 그대들은 다 잘못하고 있다. 그것은 형제가 가질 마음이 아니다. 정신도 아니다.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것은 형제가 가질 마음이 아니다. 참된 형제의 특성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서로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서로 도와주려 결심하며 서로 바른 길로 인도하려 애쓰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정신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 원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영역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예언이나 세례 문제 등등입니다. 이런 주제에 대하여 특히 비본질적인 문제를 다룰 때 서로 형제라는 사실을 인식하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러다는 것을 입증할 양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하고 돕는 마음을 가지고 가능한 공통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서로를 도와주고자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첫 번째 권면입니다.

 

2. 갈등 심화

두 번째 권면은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사도는 이미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가 되심을 확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니 재판장도 그리스도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의 결과 중 하나는 주님이 재판장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온 세상을 심판하실 권세를 아들에게 넘기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그것을 가르치셨습니다. 5:20-22”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 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하나님은 이 심판의 문제를 아들에게 넘겨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은 보편적으로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재판장이시지만 그 심판하시는 일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게 위임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기록되었으니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으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으니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됩니다. 무릎을 꿇음으로써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는 셈이요. 특권과 권세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무릎을 꿇지 말라. 하나님이 재판장이다. 너희는 내게 무릎을 꿇고 내게 직고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재판장이라는 사실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바울은 마지막 심판 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재판장이심을 아뢰고 고백하게 될 것이며 그의 심판은 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거슬러 어떠한 불평의 근거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중에 누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재판장 노릇을 하려는 것처럼 괴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12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 하리라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배웁니까? 첫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성자 하나님 3위 중 제2 위격에2 해당됩니다.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동일하게 영원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성자 하나님이시며 재판장의 지위를 아들에게 위임하셨다는 놀라운 증거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2:7-8”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목적으로 ’’ 자신을 비워 ‘‘ 사람의 모양으로 오시고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9-11”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4장에서 사도의 관심은 성부께서 이 세계와 그 모든 일들을 아들에게 위임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자께서는 그 권세를 주관하는 모든 권세와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권세를 아들에게 주셔서 세상을 구원케 하셨고 세상을 구속하셨으며 세상을 처음 상태와 같이 회복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는 온 우주는 정화되고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14장이 바로 그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할들을 아들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심판의 역할을 포함하여 말입니다.

 

3. 전환

그러면 그의 심판의 성격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첫째 그 심판은 우주적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판단하실 것입니다. 5:28-29” 5: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와 같이 주님께서 ’’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온 세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은 이 거만한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할 증거는 이 세계가 심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 움직임들은 다가올 최후 심판들에 대한 전조와 암시입니다. 이 지상에는 그런 암시들이 늘려 퍼져 있습니다. 전쟁의 공포와 질병의 창궐 등등이 한 예입니다. 하나님의 더 무서운 심판이 올 것입니다. 성자께서 나타나실 그 최종 심판에는 그러한 것들이 태산을 이룰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심판하러 오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특별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네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네 형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을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될지 그렇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차원의 심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미 그 심판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롬 14장에서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심판을 통과했고 다시는 절대로 판단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을 주는 위대한 성경의 논증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친히 약속하신 말씀이요. 바울은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심판이 없나니. 그것을 통과하였으니 다시 그 심판을 통과해야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이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확신 없는 상태로 가두려 합니다.. 개신교는 항상 구원의 확신을 역설했고 거기에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킬 때 큰 기쁨을 준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절대 없다는 사실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갔습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성자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 안에서 우리의 죄가 심판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롬 14장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가르침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방식과 구원의 확신에 관해서 매우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특별한 위험성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심판을 통과하더라도 상급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사도는 서로 판단을 표명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판단에 대해서 주님 앞에 나타나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급 심판에 대하여 주님이 장사 비유를 통해서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주인이 먼 여행을 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달란트를 나누 주면서 열심히 장사하여 이윤을 남기라고 명령합니다. 주인은 주님이요 종은 믿는 신자들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되 주인이 모든 소유를 저희에게 맡기리라 그리고 주인이 다시 돌아오시어 결산을 합니다. 주님은 두 종류의 종을 차별 지어 말씀합니다. 둘 다 믿는 자들입니다. 그 둘 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벧전 4:17“ 벧전 4: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사도 요한도 같은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일 2: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교리는 복음주의자들이 등한시하기 쉬운 교리입니다. 우리는 구원과 죄 사함에 관해서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음을 아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심판과의 관계를 모두 마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과 보좌 앞에 여전히 서야 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소홀히 하면 무 율법주의와 방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4. 대단원

결론은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고전 5장에서 바울은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을 쫓아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을 교회의 권징을 시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권징도 본질적이지 않는 문제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출교 처분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소한 중립적인 문제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어떤 권위자들도 선출하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 하리라다른 사람의 일을 직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일만 직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판결을 선언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할 만큼 완벽한 사람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판단하는 재판장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도의 강조점은 자신의 일을 직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1초라고 형제를 판단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속아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기록됩니다. 모든 자기만족과 판단 그릇된 모든 일들 그 모든 것이 다 밝혀집니다. 우리는 서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나의 임무는 내가 판단받을 것이요. 인기를 얻기 위해 어떤 것을 감추거나 해도 주님 앞에 다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나를 판단하는 재판장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주님께 직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께 주님께 자신의 일을 직고해야 합니다. 이것이 본질적이지 않는 중립적인 문제에 대한 바울이 주는 죄 종적인 권면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