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수정본"
1. 본문 롬 14: 17
2. 명제: 교회 갈등과 분열의 원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어난다.
3. 제목: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
1. 갈등
바울 사도는 교회 내의 모든 문제들이 균형 감각을 견지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바리새인의 문제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균형을 상실하여 그 나라의 왕을 배척했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들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무시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밖에 있었습니다. 이 실패는 수세기에 걸쳐 교회분열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요한 17장에 기록된 우리 주님의 기도의 의미입니다.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어떤 논점들이 상대적 중요성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큰 맥락 속에서 취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황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균형을 잃은데로 쉽게 빠져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2. 갈등 심화
균형상실을 위한 그 해결책 첫 번째 원칙은 진리의 여러 부분들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관계에서만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고전 12장에서 바울은 거기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우리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전 12장을 기록한 이유는 우리 모두 그 몸의 지체들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몸은 부분 그 자체로만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항상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 점을 인식하는데 실패한 것이 여러 방면에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거의 모든 운동들의 결함입니다. 예언 운동 성결 운동 등등 그것들은 이 가르침을 어긴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교리들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따로 떼서 생각한다면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때마다 그 교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항상 탈선합니다. 두 번째 원칙은 이것입니다. 먼저 그것을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성경과 비교해야 합니다. 이단들이 생기는 이유는 어떤 특정 진리에 집중하고 난 뒤 그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모순되지 않는지 확인해 보는 수고 없이 하나의 교리를 그 특정 진술을 기초로 하여 정교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서로 모순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되 마치 몸에 있는 손과 발이나 다른 어떤 지체가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만일 진리의 어떤 국면이나 부분을 해석하고 있다면 우리는 내리는 결론 즉 우리의 교의 적인 가르침이 전체의 어떤 다른 국면과 충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중세 시대에 어떤 경건한 여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경건하고 헌신적인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최고의 야심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론적인 기독교를 아는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믿음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얼마 뒤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 가정을 버려두고 하나님을 위한 전임사역에 종사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확신을 실천에 옮길 정도로 충분히 정직하고 진지했습니다. 그녀가 집을 떠날 때 어린 자녀들이 울고 괴로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큰 희생적 봉사를 기꺼이 계속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이라는 식으로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문제는 그 여자가 한 국면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다른 교훈을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어머니의 최고 의무가 무엇입니까? 자기 가족을 돌보고 자기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명하신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것은 남자를 보필하고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여자의 크고 영광스런 역할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자를 불러 하라고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다른 부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자녀와 사회의 근본적인 법칙 중 하나와 충돌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이러한 유의 불균형이 나타나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그것이 전체에 일치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는 문제에 집중하거나 그것에 대해 너무 과도하게 반대한 나머지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균형을 지키지 못합니다. 세 번째 원칙은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놓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 부분들을 중심에 위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 부분을 너무 강조하여 중심의 영광을 감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풍자적인 비꼼으로 표현합니다. “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우리는 알다시피 초대 교회 가운데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보는 것으로 이해되고 먹고 마시는 것이 중심적인 논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분쟁은 하나님 나라 자체를 잘 모르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특정 부분들이나 진리의 어떤 국면들을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이 잘못되었듯이 너무 어떤 부분들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진리를 위해서 그릇된 것입니다. 이론적인 기독교 어떤 전제들에만 찬동하고 믿음과 정신만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이 자주 반 율법적으로 흘렀고 메마르고 냉랭한 열매 없는 삶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마음만 수반시키는 것도 잘못으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 머리를 쓰는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침을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육을 반대하고 오직 즐거워하기만을 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가르치려는 목사를 많이 비평합니다.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무엇을 원한다고 주장합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머리를 흔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것 그들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들고 무언가 ‘전율’‘전율’ 같은 것을 원합니다. 예배를 온통 ccm 공연장 무대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오락이나 즐거운 것을 바랍니다. 이런 풍조가 교회에도 들어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동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무와 어떤 일을 행하는 것에 쏠려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 같습니다. 그들은 엄청나게 일하는 일꾼들 활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서 그들에게 그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으면 그것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또 그들은 자주 냉냉 해지고 굳어집니다. 그들의 활동에는 어떤 기계적인 것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선하고 매우 활동적인 일꾼들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런 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남자나 어떤 여자의 한 부분만을 취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인이 수반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입니다. 거기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을 보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는 “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것저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무를 보느라고 숲을 놓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듯이 율법의 전체 목적을 놓치는 것은 우리가 너무 사소한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항상 따라다니는 위험입니다. 이제 중심으로 돌아가 ‘그 모든 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냐’라는 질문입니다. 항상 중심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 중심으로부터 모든 다른 것이 존재합니다. 모든 각 부분과 가지는 항상 이것에 비추어 숙고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관심을 어떤 분분들에 너무 지나치게 집중시킨 나머지 그것이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망각해 버리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프로테스탄티즘에 관한 작은 책자입니다. “ 모든 제도마다 그 제도를 반대하는 다른 제도가 산출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오늘날 개신교회들 거의 대부분이 그들의 기원을 망각하고 있음을 간단하게 보여 줍니다. 그 교회들이 이 요점 저 요점으로 시선을 옮길 때 너무 멀리까지 가버림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자들이 말했던 것의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무엇임을 사람들이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상세한 문제들에 너무 깊이 진입한 나머지 처음 시작했던 기원의 요점을 놓쳐버리고 중심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우리는 항상 가던 길을 멈추고 중심 기원 원천 원리의 근거를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것과 연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따로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3. 전환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니까? 성경의 위대한 주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세상 속에 살면서 그들은 순종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모반하고 불순종한 사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전체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막 1:14-15" 막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 마 13장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모든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나가서 자기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그리고 갑자기 보물을 발견하여 기쁨에 찬 사람과 같다. 우리의 오해는 항상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나는 이것저것을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에 관해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계획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계신 이 나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노릇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왕 노릇을 행하십니다. 물론 중심은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권위의 행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명하시고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나라가 그리스도 예수께 위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이 나라가 궁극적으로 그 영광스러운 충만함 속에 나타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들입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 나라라는 외적인 형태를 취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었고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새로운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하나님 나라가 이제는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위대한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고 당신의 원수들을 멸하시며 그 모든 것들을 불 못에 던지실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 나라는 우주적이 될 것이고 다음과 같이 외치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바로 그것이 종말입니다. 고전 15장에서 바울은 모든 세상 통치와 권세가 무너지게 될 것이고 모든 것에 그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세우질 것이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것입니다. 고전 15: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이것이 성경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보편적 가르침입니다.
4. 대단원
우리의 주관적인 문제들로 고심하고 우리의 작은 율법주의에 얽매이고 우리의 강조점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은 이 가르침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교를 잘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그것을 모릅니다. 모든 시선이 이런 세부적인 문제들에만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 나는 행복해요 ”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행복할 수 있죠. 그러나 행복하지만 하나님 나라 밖에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다른 모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시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인 우리 각자 속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면 바로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인 우리 모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행복한가? 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이시며 또 내 안에 계심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나의 최대의 관심은 먹거나 마시거나 어떤 날들을 지키거나 이것저것을 행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 왕께서 내 마음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이 내 최대의 관심이어야 합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이 관계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이 우리 안의 큰 원천입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를 먹고 마시는 것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처량한 일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매달려 이 놀라운 나라의 영광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얼마나 가련한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왕 노릇할 날이 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망각한 체 교인들의 개인 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싸우는 모습은 얼마나 꼴불견입니까? 바울 사도는 이 나라의 영광을 잊어버린 체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전 6:2-3“ 고전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사도는 꾸짖습니다. 너희는 누구이며 어떠한 자들인지를 아는가? 너희는 마치 여전히 세상에 속한 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들으라. 이것이 바로 너희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원리는 하나님 나라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 다음에 행하고 생각하는 다른 모든 일은 그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순간 중심에서 벗어나서 사소한 것들에 휘둘릴 것이다. 또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여러 혼란을 일으키며 하나님 나라에 해를 끼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