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디 있느냐?
1. 본문: 창 3:9
2. 명제: 하나님은 지금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인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3. 제목: 네가 어디 있느냐?
1. 갈등
9절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큰 맥락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에 속한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세상 역사뿐 아니라 구원의 주요 윤곽이 전부 나와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성경 역사를 모르면 온 세상과 각 사람이 이 지경이 된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전체적인 입장입니다. 저는 3장이 실제 역사를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 사람의 실제 행동을 온전히 설명해 준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옛사람들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현재 부산과 그 밖의 지역에서 사람들이 하고 있는 짓을 죽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전부 구약시대 사람들이 했던 짓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형태는 좀 달라도 결국은 다 같은 짓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가르치는 첫 번째 큰 교훈입니다. 세상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그가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인도하십니다. 찾아오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관계를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동산으로 그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그 말씀을 들었으며 그 말씀에 응답했습니다. 그때 세상은 완벽했습니다. 낙원이었습니다. 인간은 창조된 의도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인간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듣지 않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무 뒤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며 “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고, 역사를 통해 말씀하시며, 사건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모르면 역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세상 역사 속에서도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귀가 멀어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욥기에는 사람이 둔해졌을 때 가끔 꿈이나 밤의 환상으로 말씀하신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건을 통해, 질병을 통해, 죽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말씀은 바로 이 성경책,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무엇보다 아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히 1:1-2절“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2. 갈등 심화
이번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살펴봅시다. 첫 번째 요점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인격적인 호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를 호출하시는 것입니다. 서로의 입장이 바뀌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겪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호출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은 자신이 조사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사당하는 입장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내려와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의 형편과 처지를 조사하셨습니다. 종교나 기독교에 대해 토론할 때마다 발견하는 사실은 사람들이 조사자의 입장에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조사하려 듭니다. 그만큼 자신들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인은 우주를 조사하고, 종교를 조사하며, 하나님을 조사합니다. “ 어디 보자, 그리스도는 어떤가……. "인간은 자신이 조사자의 입장에 있는듯 착각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오히려 검토의 대상이라는 사실, 오히려 자신이 말을 들어야할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이 단계에 와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의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왔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영리하게 피해 버립니까! 우리는 기독교를 토론거리로 생각합니다. 다음에 다루는 문제는 예수의 갈보리 십자가 죽음과 '속죄' 교리-한 사람이 다른 이들을 위해 죽는 일, 그들을 대신하는 일 등 입니다. 여러분, 허구한 날 이런 토론만 하다가는 무덤까지만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일차적으로 논하는 대상은 사상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입니다. " 아담아, 어디 있느냐? 나는 너를 찾고 있다. 나는 너 개인에게 관심이 있다 "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 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에는 한 번도 자신을 직시한 적이 없습니다. 늘 자신을 방어했고, 자신을 숨기려고 위장했습니다. 그래서 철학과 사상과 비교종교학과 난해한 질문이라는 나무 뒤로 숨는 것입니다. 거기 숨어서 모든 인격적인 접촉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장애물을 헤치고 찾아오십니다.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이 인격적인 문제임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을 호출하십니다. 다음 단계는 우리의 실상과 처지를 똑바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정확하게 어느 자리에 있느냐? 거기서 뭘 하고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과 설교의 전적인 사명은 사람들이 현재 있는 자리, 사람들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똑바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이 낙원, 이 동산에 오실 때마다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나무 뒤에 숨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어디 있느냐?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느냐??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느냐? 어서 나오너라. 거기 숨지 마라. 네가 있을 자리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다. "지적인 측면에서 여러분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발견한 사실은, 기독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일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보려는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편견에 사로잡혀 그냥 일축해 버립니다. 성경을 전혀 읽지 않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죽음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의 도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적인 나무들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렇게 나무 뒤에 숨어 있으면 현실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다가와 던지는 질문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직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영적인 성결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뻔히 알면서도 계속 잘못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잘못을 즐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도덕적으로 지금 여러분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과 이력을 영상으로 보면 어떨 것 같습니까? 성경의 관심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과 사마리아 여자가 만나는 장면을 보기 바랍니다. 주님이 지쳐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는데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어 왔습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고 아주 영리하게 논쟁을 이끌어 갔습니다. 하나님과 예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불쑥 말씀하셨습니다. "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는 정직하게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그러자 주님이 여자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용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는 이 말씀으로 무수한 질문에 대한 논쟁과 토론에 종지부를 찍으시고, 여자 자신에게 초점을 돌리셨습니다. 사실은 음란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현실을 직시하게 하셨습니다. 요컨대 “ 나무 뒤에서 그만 나오너라. 여기 넓은 데로 나오너라. 나는 너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을 똑바로 보십시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좋아하고 어떤 상상을 즐기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부끄러워하면서도 놓지 못하고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이런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자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도덕적인 행동과 인격 전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저지른 일의 참된 본질과 성격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는 말씀하십니다. 11절 “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것의 정확한 본질을 보여 주셨습니다. 단순히 열매를 따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거룩한 법을 위반하여 반역을 저지른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점을 깨우치셨습니다. 복음이 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죄를 명명백백히 밝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밝힙니까? 죄의 참된 본질을 가르침으로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를 즐거워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의롭고 거룩하며 참되고 바르게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이러한 창조의 의도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를 특성 행동으로만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치 않게 사는 것은 전부 심각한 죄입니다.
3. 전환
마지막으로 드릴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 사는 일에 가장 큰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전부 더러운 죄인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현대세계가 정말 모르는 것이 이것 아닙니까? 많은 이들이 체면은 믿으면서 하나님은 믿지 않습니다. 눅 15:21절 "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것이 죄의 본질이자 우리 모두의 실상입니다. 이 점은 마지막 요점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인격적인 이야기를 하실 뿐 아니라 심판을 알리심으로 회개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 숨어 있던 자리에서 불러내시고 그들의 실상과 죄를 보여 주신 후에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으로 심판을 좋아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친히 심판하셨습니다. 숨어 있던 인간을 찾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심판은 지금도 각 개인과 세상 역사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현재의 심판과 미래의 심판이 있습니다. 현재의 심판은 죄의 결과로 즉시 나타나는 심판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창세기 3장에서 뱀과 여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영원히 싸울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신문과 광고판과 유흥업소와 길거리에서 우리를 꾀는 유혹-우리 속에 있는 가장 훌륭하고 고상하며 올바른 것에서 떠나도록 우리를 끌어당기며 꾀는 악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벌이는 싸움이 우리 삶과 생활의 모든 문제를 빚어냅니다.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고 있는 한 가지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눈이 가려 이것이 죄에 대한 심판임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마귀의 말을 듣고 금지된 열매를 따 먹으면 율법을 지킬 필요 없이 편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신이 되어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족쇄와 굴레에 매여 몸부림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수고와 고통도 겪고 있습니다. 16절 “ 수고하고 자식을 낳게 되었고, 아픔과 고통 속에 자식을 낳게 되었습니다 ” 이것은 실제 역사입니다. 한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얼마나 긴장하고 몸부림치며 고통하고 수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다 죄가 몰고 온 결과입니다. 그뿐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 - 생계를 위한 노역, 매일의 밥벌이, 고된 일, 가시덤불과 엉겅퀴, 경쟁과 충돌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그토록 무성히 자라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땅에서 밀이나 옥수수를 수확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애물들과 끝없이 싸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땀 흘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또한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인간은 타락 이후 내내 이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계속 낙원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신 후 두루 도는 불칼과 그룹을 세워 동산 입구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가지 못합니다. 인간은 죄의 심판을 받아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재의 심판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심판이 있습니다. 19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죽음, 육신의 죽음이 죄에 대한 심판으로 찾아왔습니다. 테니슨이란 시인은 말합니다. “ 인간은 자신이 죽지 않는 존재로 지어졌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원래 모습에 대한 기억이 일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첫 숨은 마지막 숨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숨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것은 병적인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납니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종말이 다가옵니다. 그렇게 죽은 후에는 하나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4. 대단원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산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자리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서 몇 년이나 살았습니까? 앞으로 몇 년 더 살 것 같습니까?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살아있을 때 그 말씀을 듣지 않으면 죽은 후에 들어야 합니다. 오직 절박한 사람만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의사가 필요한 병자임을 아는 사람만 나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치료해 줄 의사가 한 분 계십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에게 심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더 있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전투를 벌일 것입니다. 그러나 15절 “ 결국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어 버릴 것입니다 ” 하나님이 숨은 데서 나오라고 부르시는 것은 단지 정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정죄를 믿고 인정할 때 다시 낙원으로 돌아갈 길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독생자는 그룹과 불칼을 제치고 낙원으로 들어갈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는 자신을 믿고 바라는 자들이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당당히 동산 입구를 지나 기쁨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요 6:37절" 내게 오는 자는 내가 내쫓지 아니하리라 "부끄럽고 비참하고 불행한 실패의 자리, 지금 숨어 있는 그 자리에서 나와 부르짖으십시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분이 구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