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11:1-9
2. 명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모든 계획은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이다.
3. 제목: 바벨, 인간의 비극
갈등
창세기 앞부분을 연구하면서 우리가 전적으로 주장했던 바는 성경은 이 시대에 반드시 직시해야 할 여러 가지 질문에 충분히 답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 주는 유일한 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인을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무리 처방을 고민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이 항상 강조하는 점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셨음에도 인간이 반역함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3장이 끝나기 전에, 인간이 망쳐놓은 현장 한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와 구원의 약속과 메시지를 주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역사의 비극과 현 세상의 비극은 하나님이 제안하신 그 구원을 인간이 본 척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지를 주셨지만 인간은 또다시 그것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을 쫓아갔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끔찍할 정도로 악하고 추잡한 삶을 살다가 노아 홍수라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옛 세상을 멸하시면서 노아 가족 여덟 명만 건져 주시고 구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홍수 이후에 새롭게 출발했으며, 새로운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창세기 6장부터 11장은 인간이 여전히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의 씨앗이 남아 똑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게 했습니다. 새로운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놀라운 점이요. 경악할 만한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여전히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이제 똑같이 중요한 또 한 단계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을 수행하시며 에덴동산에서 주신 약속을 이행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되어 쉼 없이 싸울 것과, 그 무서운 싸움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고 뱀의 후손은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할 때 절정에 달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벨탑의 엄청난 이야기가 기록된 창세기 11장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을 만나게 됩니다. 11장은 국가 간에 혼란과 갈등이 빚어지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물론 이 설명은 나라 간의 갈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안의 갈등에도 해당됩니다. 지금 각 나라는 서로 간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 회담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계속 갈등을 해결하고 서로 힘을 합치고자 노력해 왔지만, 뜻을 이룬 적은 없었습니다. 분열과 대립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요? 창세기 11장이 이 질문에 대답해 줍니다. 구약의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던 50년 전에는 학자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지서에는 간혹 실제 역사가 섞여 있을지 몰라도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당연히 실제 역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세 같은 사람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인물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아주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구약성경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입니다. 학자들도 구약성경에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구약성경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열쇠이자 오늘날 온 세상의 상황을 이해하는 열쇠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고고학계의 잇따른 발견도 창세기 앞부분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지극히 중요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이 언어의 혼란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온갖 언어들을 보십시오. 이렇게 다양한 언어들을 몇 가지 기본 유형 내지 어족으로 묶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그것을 살펴보면 판이해 보이는 언어들의 유사성에 놀라게 됩니다. 예컨대 영어나 독일어가 속해 있는 인도 유럽 어족처럼 큰 어족을 살펴보십시오. 많은 언어들의 뿌리가 같다는데 깜짝 놀랄 것입니다. 바벨탑 시대는 한 언어를 쓰다가 분열되어 사방으로 흩어진 때를 기준으로 보면 약 75 퍼센트 정도 추적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앞부분의 메시지를 외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온당치 못합니다. 이제 이 사건이 주는 메시지를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바벨탑 사건이 참으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메시지는 이 사건이 인간 비극의 본질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3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팔레스타인에는 돌이 있었지만, 시날 사람들은 벽돌을 따로 구워 건물을 지어야 했습니다. 벽돌을 만든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요즘의 방법과 아주 흡사한 방법으로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진흙이 태양열을 받아 단단해지는 현상을 관찰한 것입니다. 진흙이 태양열을 받으면 점점 굳어 돌처럼 단단해집니다. 돌산이 없어 돌이 넉넉지 않았던 시날 사람들은 아마도 이 같은 태양의 작용을 지켜보다가 직접 돌을 만들 방법을 찾아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참 대단한 존재입니다! 관찰 끝에 이루어진 모든 발견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랍고 인상적인 업적이 있다면 바로 이런 발견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치료법은 다 이런 발견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머리와 두뇌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관찰에 근거한 발견에는 이러한 인간의 비범한 능력과 성향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방접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보십시오. 언젠가 천연두가 무섭게 창궐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제너 라는 사람이 보니 관찰하니 젖 짜는 여자들이 거의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찾던 제너는 여자들이 젖을 짜다가 소들의 젖통에 손이 감염되어 피부병 우두에 걸리는 일이 잦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연두와 흡사한 우두가 여자들을 지켜 준 것은 아닐까? 이렇게 해서 백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피조물은 아주 뛰어난 존재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대단한 인간이 사는 세상은 마땅히 완벽해야 합니다! 이 정도의 존재라면 마땅히 세상을 경영하는 법을 알아야 하며, 스스로 완벽해지는 법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인간 비극의 전적인 본질이 여기 있습니다. 그토록 완벽한 인간이 자기 일을 경영하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실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사는 법이나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법은 찾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벨탑 이야기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 치명적인 모순입니다.
3. 전환
이제 구체적인 메시지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의 구체적인 메시지는 사람들이 삶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완강히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벨탑 사건에 어떻게 나타날까요? 성 쌓는 일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위대한 성 어거스틴도 역사를 같은 틀로 파악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 하나님의 도성 The City of God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요점은 두 성 하나님의 성과 인간의 성이 갈등하는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 갈등의 근원은 태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맨 처음 성을 쌓은 자는 아담과 하와의 아들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이 도시와 문명 성을 쌓으려는 시도가 확대되고 확장된 것이 문명입니다. 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문명이란 사실상 ' 인간이 힘을 합쳐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들끼리 삶을 꾸리려는 시도 ‘ 입니다. 그 일은 바벨탑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4절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흩어지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같이 성을 쌓기로 했습니다. 시날 사람들은 장사와 오락과 안전을 위해 성을 쌓았습니다. 인간의 동기는 늘 똑같습니다. “ 실컷 먹고 마시려면 장사를 해야 한다. 그래, 같이 장사할 계획을 세워 보자. 오락도 당연히 즐겨야 한다. 재미있게 지내려면 흩어져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 누구는 농장에 살고 누구는 저 먼 곳에 사는 것보다 한데 뭉쳐 사는 편이 낫다. 그러니 전부 모여 살면서 즐겁게 살 계획을 세워 보자. 그러면 멋지게 지낼 수 있을 거다. 또 성을 떠나 떠돌아다니면 짐승의 공격을 받기도 쉽고 강도를 만나기도 쉬우니 전부 성에 모여 살자. 그래야 안전하다. 사방으로 큰 성벽을 쌓으면 아무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거다. "문제는 이것이 하나님을 배제한 삶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항구적인 건물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관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몰아냈습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성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세상과 세상 나라의 진화를 믿었습니다. 영원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다 완공되고 나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현대 철학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보여 주는 인간의 자부심과 자기 충족감, 자기만족의 요소도 강조해야겠습니다. 시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인간에게 무슨 한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면 올라가서 한번 잡아 보자는 것입니다. 눅 2:14절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라고 말하지 말고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인간에게 영광이요 "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발명과 발견과 진보를 보십시오. 원자까지 분할하는 것을 보십시오. 시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 그래, 우리의 능력을 입증하자. 모든 것에 우리의 이름을 새겨 두자. 위대하고 유일무이한 우리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자. " 찰스 다윈이 ” 종의 기원 “을 쓰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힘으로 다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믿었습니다. ” 우리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못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 "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1장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이야기이자 우리 문명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움의 망령까지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설교자에게 이것은 중요한 소재입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찔러도 속에는 항상 두려움이 잠복하고 있습니다. '혹시', '설마', '어쩌면 하는 불안’이 잠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5-8절 “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다.” 하나님이 내려와 인간의 반역과 교만을 보셨고, 하나님을 미워하여 떠난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시고 내려와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늘 이렇게 하시며, 이것은 한 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니느웨는 대단한 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찬란하지만 경건치 못한 문명을 자랑하던 앗수르의 수도는 완전히 무너져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벨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자기 신상까지 세워 놓고 만백성에게 명하여 힘으로 온 세상을 통일한 온 세상의 정복자 앞에 절하고 숭배하게 했을 정도로 바벨론은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망해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와 로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의 정복자가 된 것처럼 착각했던 어리석은 나라들은 전부 무너졌고 망했습니다. 히틀러도 스탈린 모택동도 김일성도 하나님을 떠나 설 수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왕국들이 차례차례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나라가 각자의 주권을 포기하고 연합하여 거대한 세계 국가를 만들고 연합정부를 수립하는 순간, 하나님이 가만히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에 내려와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사람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죄를 벌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 57:21절 "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음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벌하기 위해서만 혼잡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듯이 그들의 계획을 막기 위해서도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내려가 개입하고 무너뜨리지 않으면 일사천리로 밀어분일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법으로 전쟁을 추방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과학이 이렇게 놀랍게 발전했으니 머잖아 일할 필요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이런저런 발명으로 영구히 즐겁고 재미있게 살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과 유혈사태와 공포와 두려움과 실망과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서슴없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역해도 하나님은 목적을 이루십니다.
4. 대단원
창세기 11장이 주는 중대한 교훈, 바벨탑 사건이 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망각한 채 제멋대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그때 돌연 하나님이 내려와 모든 것을 무너뜨리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관은 무엇입니까?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계획은 무산되고 허사가 된다는 것이 11장의 교훈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좋아하지 않는 하나님이 내려와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없이 여러분의 인생을 세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 연합하는 길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 길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각기 다른 인종과 나라와 민족 사람들이 11절"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라고 말하는 장면을 봅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능력이 이일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로 진정 하나가 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점은 바로 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는 다 죄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동일한 구주께서 구원해 주셔야 합니다. 온 세상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고 성령을 주십니다. 인간이 자기 죄를 깨달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무력하고 소망 없는 죄인임을 깨달을 때, 시기와 질투는 사라지고 서로 원수 삼는 일도 사라질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며, 전에 원수 되었던 사람도 위에서 나란히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막힌 담이 무너질 것입니다. 서로 간의 차이는 사라지고 새로운 연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이 각 사람 속에 거하심으로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까? 그가 축복하시면 형통하겠지만 축복하시지 않으면 다 허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 달려가 여러분이 경건치 못했던 것과 교만했던 것, 자만했던 것과 어리석었던 것, 하나님께 적의를 품었던 것을 고백하십시오. 그 앞에 엎드려 참회하고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죄 사함과 용서가 임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영이 임할 것입니다. 새로운 지각과 새로운 시각으로 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들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히 11:10절의 ’’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하나님의 성' 새로운 성을 바라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